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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88화 (88/342)

Chapter 88 - 사랑하는 나의 스승님.(8)

"하, 하하, 하......"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매캐한 냄새에 용사가 표정을 찌푸렸다.

전쟁터에서 몇 번이고 맡았던, 살이 타는 냄새.

주변을 자욱하게 채운 연기를 훑어내자, 자닥에 주저앉아 실성한 듯이 웃고 있는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

"...레이나."

그리고 그 옆.

반쯤 잿더미가 된 채, 목에 커다란 거울 파편이 틀어박혀 죽은 시체가 하나.

그것이 누구의 시체인지 따위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죽였는지까지도.

"아서, 아서, 아서!! 드디어 왔구나! 왜, 저 년을 살리려고 온 거야?! 용사가, 마왕을?!"

에밀리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주변에 붉은 불꽃이 탁탁 튀었다.

더 이상 감정을 다스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마법사.

금방에라도 스스로를 포함에 주변의 모든 것들을 불태워버릴 듯한 모양새였다.

"너를 죽일거야."

"...하?"

낮은 읊조림이 주변의 공기를 물들인다.

눈앞에서 선언되는 살해예고에,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저 녀석이, 나를 죽이겠다고 한 거야?

아서가, 나를?

"하, 하하하하하... 못 본 사이에 농담이 많이 늘었잖아, 아서? 그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ㅡ"

"..."

"ㅡ하, 미친 새끼."

웃음이 멈춘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분위기가 잿더미가 된 바닥을 천천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이겠다고? 네가? 나를?

감히?

"너 따위가 나를ㅡ"

불꽃이 휘날린다.

그 속에 섞인 건 업화의 편린.

달라붙은 모든 것을 태우는 화염이 그대로 용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

하지만 그 불꽃이 용사에게 닿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레이나가 쏘아낸 화살.

불의 정령이 담긴 조각 하나가, 그녀가 피어올린 지옥의 불길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을 뚫고 휘둘러지는 건 다름 아닌 새파랗게 물든 성검의 칼날이었다.

"무슨, 짓을..."

"해야할 일을 한 거야."

처음부터 그랬다.

마족으로 인해 멸망한 마을에서, 그 어떤 이가 다른 희생자들을 놓아두고는 제 실험만 신경쓰겠는가.

만약의 경우를 상상한다.

이 세계에 마족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경우를.

'죽여야 할 이를 죽인 거야.'

덜덜 떨리는 손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렇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쉽게 되지를 않았다.

팔다리를 잃고 바닥에 널브러진 에밀리를 내려다 보다가, 용사가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저런 것보다 마왕이 우선이었다.

"...마왕."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울고 있을까, 아니면 웃고 있을까.

천천히 손을 뻗어 어깨를 건들자, 마치 고장난 태엽인형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들어올린다.

"내가 죽였어."

멍하니 내뱉어지는 한 마디에, 용사가 이를 악물었다.

***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레이나를 죽였어.

이 손으로 죽였다고.

분명 살아있었는데, 내가 죽여버렸어.

"내가, 이 손으로 레이나를 죽였어..."

봤지? 봤어? 응?

용사의 뱌짓가랑이를 붙든다.

자, 봐.

내가 네 동료를 죽였어.

지금까지 생사를 함께한 동지를 죽여버렸다고!

"이제 나를 증오할 마음이 생기나? 죽여버리고 싶나?"

그 손으로 내 목을 졸라.

그 입으로 나를 욕해.

그 좆으로 나를 범해!

네가 원하던 마왕의 등장이야.

이제 뭘하면 되는지 답이 나오잖아, 응?

"그렇게 해."

그렇게 해도 좋으니까, 제발 해줘.

이 손에 묻은 피가 지워질 때까지.

계속, 계속, 계속, 계속, 계속...

하지만, 내 귓가에 들려오는 건 원망의 말이 아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잠시 생각이 멈췄다.

아니, 애초부터 생각은 안 하고 있었는데.

멍청히 용사를 올려다 보다가 표정을 찡그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했다니까?

내가, 레이나를 죽였는데...

"네 잘못이 아니야."

"...아."

용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믿어주지 않았잖아.

나를 싫어하고, 증오했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나를 미워하잖아."

그러니까 계속 미워하면 되잖아.

마왕과 용사란, 그런 거잖아.

"...이젠 아니야."

"...흐."

작게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떨군다.

핏방울이 섞인 눈물이 차가운 바닥 위로 방울 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런 말을 들어면 좋아할거라고 생각했어?

아니면, 너를 용서하기라도 할 줄 알고?

"그냥, 처음처럼 해줘."

지금의 나에게 필요힌 건 한 조각의 친절과 자그마한 위로 따위가 아니었다.

죄에 대한 벌.

레이나를 죽인 살인자에게 떨어지는 처절한 분노가 필요했다.

이 피를 씻어야 해.

그런데, 어떻게 해야 지울 수 있지?

"아니."

하지만 부정당한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손길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너는 전부 내가 원하는 것의 반대로만 하는구나.

믿어달라고 하면 믿지 않고, 죽고 싶다고 하면 살리고, 분노를 토해내라고 하면 친절을 건넨다.

"돌아가자."

어디로?

집으로?

하지만, 이 세상에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은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원히 떠도는 방랑자가 되어서 모든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이리저리 흘러다니겠지.

"...그래."

힘 없이 답하자, 용사가 내 몸을 들어올렸다.

상상 이상으로 부드러운 손길에 놀랄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지칠대로 지쳐서, 그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이대로, 가게 둘 것 같아?!"

그렇게 용사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고막을 꿰뚫었다.

시선이 돌아가는 순간 가까워진 흑색의 창에, 나는 또다시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죽는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이었다.

찍찍.

"...거짓말. 거짓말 하지마. 거짓말이야?!?!!"

별안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느새인가 재생된 팔로 제 머리카락을 쥐어잡은 마법사가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미친듯이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간 끝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사역마.

작은 울음 소리와 함께 이쪽으로 달려온 쥐 한 마리가 내 앞에 무언가를 내려두었다.

".....설마."

아기의 꼬리와 날개를 엮어 만들어진 끈과, 그 위에 뿔을 장식한 팔찌였다.

멍하니 팔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자 홍옥과도 같은 뿔이 자그맣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 쯤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가."

품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 보니, 아기가 시선을 마주쳐왔다.

네가 나를 구한 거니?

마지막에 보았던 흑색을 창을 떠올린다.

분명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사라졌었지.

"네가, 네가 나를 속였어. 네가 나를 속였다고, 네가!!!"

마법사가 다시 한 번 비명을 내질렀다.

제 얼굴을 긁어내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댄다.

마치 혼이 쏙 빠진 것 같은 텅 빈 눈동자에,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강렬한 감정이 그 공포심을 뚫고 튀어나왔다.

"스승님. 아아, 사랑하는 나의 스승님... 어째서 어째서..."

멍하니 내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던 마법사가, 돌연 제 손에 들린 지팡이를 반으로 부러뜨렸다.

마법사가 지팡이를 부러뜨린다는 건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뾰족하게 부러진 그 끄트머리가 그녀의 심장 쪽을 향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몸통을 관통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순식간이었다.

"...죄송해요, 스승님. 죄송해요. 죄송ㅡ"

그런데, 저 모습이 왜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용사의 팔을 뿌리치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부러진 다리에서 격통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절뚝거리며 다가가 그 앞에 주저앉는다.

"죽어서 도망치려고 했어?"

"..."

그런 짓을 해놓고, 감히 도망치려고 한단 말이야?

그러면 안 되지.

절대로 그러면 안 되지.

"다시 태어났을 때, 네가 그렇게 증오하던 마족으로 태어나면 어떨까."

속삭인다.

증오스러운 원수의 귓가에, 절망을 들이붓는다.

네가 한 짓에 대한 책임은 져야지.

안 그래? 응?

"그만, 둬..."

"그러는 너는, 왜 내가 그만 두라고 했을 때 그만두지 않았어?"

왜? 왜? 대체, 왜?

꼴에 도망치겠다며 뱌르작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아아, 안타까워라.

제대로 심장을 찔러서 즉사했다면, 이런 비극적인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혀를 깨물었다면 내 손에 죽지 않을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다시 살아나면, 너에게도 좋잖아. 응?"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스승님도 만날 수 있고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법사의 몸에 틀어박힌 쐐기를 움켜쥐었다.

조금만 비틀어도 숨이 끊어지겠지.

그리고 그게 내 2번째 살인이 될 터였다.

"...붙잡지, 말아줘."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죽음을 막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마왕의 손에 제 동료가 죽는 꼴은 못보겠다는 건지.

하지만 그 생각 틀렸다는 것 쯤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죽이게 해줘."

내 원한이니 내가 끝을 보겠다.

그 끝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꼭 네가 하지 않아도 돼."

혼자 하지 않아도 되고.

부러진 지팡이를 움켜쥔 손 위로 용사의 손이 감싸졌다.

그 뜨거운 온기를 느끼며, 손에 쥐여진 죽음을 있는 힘껏 비틀었다.

어째서인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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