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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90화 (90/342)

Chapter 90 -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1)

사락사락하고, 책 넘기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느새부터 마왕의 품을 차지한 아이는 절대로 그녀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시선을 느낀 아이의 눈썹이 비죽 치솟아 올랐다.

"당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이의 푹신푹신한 머리카락이 바로 제 눈앞에 있었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눈동자가 몽롱함을 담고 자신을 올려다 보았다.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용사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어째서인지 거부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마왕을 바라보면, 어느새 잠들어서는 침대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설마 이 아이가 한 일일까.

"...그래."

자신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그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리기 시작했다.

방에서 나가, 복도를 지나, 여관을 빠져나간다.

아이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도착한 곳은 마을 어귀에 있는 커다란 나무 밑이었다.

"제가 왜 당신을 따로 불러냈는지, 알고 있나요?"

나무 밑에 만들어진 자그마한 둔덕을 쓸어내린 아이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자신을 바라보며 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목소리는 용사의 귓가에 확실하게 틀어박혔다.

"...아니."

"모르신다면 정말 실망이네요."

뾰족함을 담은 음성이 용사의 심장을 찔러댔다.

진한 적대감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의문을 묻기 전에 아이의 말이 이어졌다.

"배 속에 있는 아기는 자신을 품고 있는 어머니와 같은 꿈을 꾼다는 사실, 알고 계세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자그마한 둔덕 위에 에밀리라는 글자를 새겨낸 아이가, 용사와 눈을 마주쳐왔다.

그 눈동자 안에 담긴 감정.

그것이 무엇인지 쯤은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신이 싫어요."

짙은 혐오가 용사를 향해 쏘아졌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조차 싫다는 듯, 아이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그럼에도 별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당연히 감내해야 할 취급이었다.

그녀가 꾼 꿈이 평범한 것일 리 없으니까.

"그런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계속 옆에 있는 당신이 혐오스러워요."

진한 적대감이었다.

제 어머니를 괴롭힌 존재, 라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그녀가 당한 일들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짓들이었으니.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용사 쪽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죄악을 마주하니, 끝 없는 자기 혐오가 제 몸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족과 인간이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봤을 때는 별로 다른 점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마족이면서 인간인, 동시에 마족도 인간도 아닌 아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당신이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죠.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절대로."

꿈의 내용을 되새겼는지 자그마한 팔뚝이 덜덜 떨려왔다.

그 모습은 마치 고통에 찬 것 같기도, 분노를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이에 의해서 스스로의 죄악을 마주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아니면, 아직도 소꿉친구를 살리고 싶으신 건가요?"

"..."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어떠한 비웃음도 담기지 않은, 순수한 궁금증만이 담겨 있는 물음이었다.

아리엘을 되살리고 싶냐고? 당연하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그녀를 만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인이라고?"

마왕군과 마왕.

그 둘의 관계가 타인이라면, 대체 마왕군은 무엇이고 마왕은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마왕을 향한 증오는 이미 가라앉은지 오래였다.

그저, 그 둘의 관계성에 대해서 고민할 뿐이었지.

"그녀가 원해서 한 일들이 아니란 걸,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같은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지는 않잖아요?"

마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마왕군과는 관계 없는 존재.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어떻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몽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사죄하고 싶다면, 그녀의 곁에서 떨어져 주세요."

그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죄이니까.

미련을 가지고 옆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녀에게 상처를 줄 뿐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아이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용사는 감히 붙잡지 못했다.

***

어머니. 나의 어머니.

저는 당신의 얼굴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당신이 너무도 가엽다는 것.

"아."

몽마, 서큐버스란 다른 이들의 정기를 먹어치우는 것과 동시에 다름 이들의 꿈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태아는 자신을 품고 있는 어미와 같은 꿈을 꾼다고 했었나.

서큐버스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었기에, 그 경험을 더욱 생생히 할 수 있었다.

'사려, 사려, 줘......'

...끔찍할 정도로 생생히.

쳐음에는 고통이었다.

용사의 성검에 베인 그녀는 제 몸을 가르는 고통에도 설득을 멈추지 않았더랬다.

다시 시간이 흐른다.

용사에게 범해진 마왕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동료인 드워프에게 빼앗겼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십 가지의 자살 충동을 버텨내고, 또 버텨내도, 또 다시 버텨낸다.

그럼에도 그녀를 이해하려는 자는 없었다.

"어머니."

"...왜 그러니?"

아이가 제 어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흐릿하게 걸리는 미소에 심장이 저릿거렸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미소가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작은 소망을 품고서는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맡겼다.

"...나는 진짜 엄마가 아닌데, 그래도 괜찮니?"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에 아이가 머리를 들어올렸다.

자신을 내려다 보는 얼굴은 분명 미소로 가득 차 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인 것만 같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금은 당신의 아이이지 않습니까.

"죽기 전의 저는 어머니의 얼굴도,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고아였어요."

마음으로 따르는 자를 부모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 스승이요, 자신을 낳아준 자를 부모라고 따진다면 가장 처음의 부모일 터였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해주는 존재가 부모라면, 당연 눈앞의 여인이 제 부모일 터였다.

"자신감을 가져주세요."

손을 뻗어 그 뺨을 톡톡 두드리니, 곧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버린다.

손목에 매달린 팔찌가 달랑달랑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던 시선이, 어느새 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슬픔을 덜어드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법사ㅡ 아니, 에밀리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누구 하나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주제에 아이는 침묵했다.

에밀리, 제 딸아이와도 같은 존재.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느냐면, 곧바로 부정할 수 있었다.

제자의 잘못은 스승의 잘못이기도 하니 분명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겠지.

하지만, 그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것 쯤은 있었다.

"그 아이가 죽은 건 슬픈 일이지만,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당신이 슬퍼할 일도, 죄책감을 가질 일도 없답니다.

당신은 그저 상처를 치유하고, 몸을 회복하는 것에만 전념해주세요.

에밀리는 그저 스스로의 죄에 대한 값을 치렀을 뿐이었다.

그녀의 뱃속에 잉태되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까지, 완벽한 벌이었다.

"자, 조금 더 주무세요. 지금은 안정을 취하시는게 우선이니까."

"...응."

등받이에 몸을 기댄 어머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안정을 주고, 악몽을 꾸지 않게 해주는 것 뿐.

더 큰 도움이 되려면 어서 빨리 힘을 기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로 괜찮겠지.

"...윽."

기억이 들어온다.

동시에 그녀가 꾸고 있는ㅡ 아니, 꿨어야 했을 꿈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몽마란 꿈을 다루는 일족.

다른 이의 꿈에 나타나는 것도, 더 나아가서 다른 이의 꿈을 먹어치우는 것도 가능했다.

그것은 반쪽짜리인 자신도 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녀가 잠들 때마다 악몽을 먹어치웠더랬다.

"지극정성이네."

"...당신."

그러다가 문득,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린다.

제 머리카락, 그리고 눈동자를 쏙 빼닮은 여인 하나가 기다란 꼬리를 흔들거리며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 사람도 서큐버스구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자니, 상대의 손이 뻗어졌다.

"이허 노흐세혀."

"요 깜찍한 것. 최근에 마왕님께서 악몽을 안 꾸신다 했는데, 다 네가 한 일이었구나?"

기특하다는 듯이 말하는 걸 보니 조금 뿌듯하기는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너무 과도한 애 취급은 사양이었으니까.

"너무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마. 너는 이제 갓 태어난 '꼬맹이'니까,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야지."

"...그러네요."

지끈거리던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도 꽤나 상태가 괜찮아졌다.

마주선 분홍빛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니, 상대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악몽을 같이 먹어주는 듯 싶었다.

"...역시, 다시 생각해도 용사 그 녀석은 상상 이상의 쓰레기야."

대체 얼마나 끔찍한 기억이어야만 같은 인물의 모습으로 이토록 거무튀튀한 악몽을 계속해서 꿀 수 있을까.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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