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1 -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2)
아이의 신체란 생각 이상으로 따뜻했다.
마족들은 하나 같이 차가운 체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이는 인간의 피가 섞여서 그런지 따끈따끈했다.
본래 인간이란 다른 이의 체온에서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었나.
이런 따스함이 하루 종일 품에 안겨있으니 악몽을 꿀 틈이 없었다.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한 가지.
아직까지도 손 끝에 남아있는 감각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레이나의 목을 꿰뚫은 거울 조각과 그것을 쥔 내 손.
그리고 그 손을 물든인 핏자국까지.
그녀를 되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러고 있으면 안됐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책에 시선을 주고 있던 아이가 나지막이 말을 건네왔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에는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쿵쿵 뛰어내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나는 염치가 없지 않았기에, 은혜를 입으면 갚아줘야 하는 성격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목숨이라면 더더욱.
용사와 몸을 맞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끔찍했지만, 은인을 되살릴 수 있다는 느낌으로 접근한다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저에게 있어서는 다른 무엇보다 어머니의 건강이 우선이니까.
그런 말을 하며, 아이가 제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푹신푹신한 뒤통수가 가슴에 닿자, 심장이 간질거렸다.
...순식간에 떠나버릴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눈을 꼭 감으니 아이 특유의 기분 좋은 분내가 맡아졌다.
"그나저나,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는구나."
엘리와 할리벨은 최근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느니, 아니면 본인이 돌봐주겠다느니 하며 난리였었는데.
요즘에는 아이에게 전부 맡겼다는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차라리 옆에 있어주는 편이 좋은데.'
드워프나 마법사가 옆에 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 둘은 진짜 내 편이라는 느낌이 강했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들러붙는거,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냥 방 안에 있어도 되는데.
무언가 응석받이가 된 것 같아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두 분이라면 아까 전에 무덤가로 향했ㅡ"
"..."
답을 해주던 아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눈치를 보는 것이, 괜히 말했다는 듯 찔끔거리는 것 같아 보였다.
무덤가.
...레이나가 묻혀있는, 무덤가.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
괜찮지. 괜찮고 말고.
언젠가 다시 보게 될 건데, 안 괜찮을 리가 없잖아.
아이의 몸을 두르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응, 지금은 아이만 있으면 충분해.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그래도, 한 번 쯤은 다녀오는 편이 좋지 않을까.'
죄악과 마주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내 실수로 인해, 내 손으로 죽인 첫 번째 생명.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말도 이제는 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품에 안긴 아이를 달랑 들어올렸다.
허약해진 몸으로도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무게였다.
"잠시 나갔다가 올까?"
"...원하신다면, 부디."
아이의 정수리에 손을 얹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의 끄덕임에 맞춰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의 로브를 몸에 두르고 여관을 나서자, 아이가 슬쩍 내 손을 붙잡아 왔다.
'...역시 사람이 많은 건 질색이야.'
아직까지도 저 시선들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열심히 다리를 놀리니 옆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헐떡거리는 듯한 거친 음성에 슬며시 고개를 돌리자, 짧은 다리를 놀리던 아이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자, 업히렴."
"아니, 괜찮아요."
시선을 피한다.
자그맣게 홍조가 띈 얼굴은 아이가 부끄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정도로 지치는 건 아이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뿔이 잘려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뿔이 잘려진 단면에서 작은 고통이 몰려왔다.
"아리엘 씨."
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눈가를 붉게 물들인 엘리가 우리를 맞이해줬다.
할리벨은 어디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자, 근처의 나무 위에 올라가서는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에게 있어서 레이나나 마법사는 적에 불과했으니까.
"...레이나 씨가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요."
엘리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엘프는 거의 영원을 산다고 해도 좋을 종족이었기에, 언젠가 제 마지막 날에 찾아와 달라며 우스갯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고.
그런데 이런 식으로 먼저 가버리니 기분이 이상하다며, 엘리가 웅얼거렸다.
"저는 다른 분들이 모두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욕심이었을까요?"
드워프도, 레이나도, 하물며 마법사도 사라졌다.
이제 남은 용사 일행은 용사와 성녀가 전부.
봉긋하게 솟아오른 언덕을 천천히 쓸어내린 엘리가 가까이 다가온 내 품 안으로 몸을 날렸다.
"죄송해요."
"...네가 미안할게 뭐가 있다고."
엘리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고 있자니, 덜덜 떨려오던 신체가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여신이 깃들 수도 있는 가능성이 아직까지 남아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피하기에는 마음을 너무 많이 준 상태였다.
"다시 볼 수 있으니, 너무 슬퍼하지는 말거라."
하복부를 쓰다듬으며 읊조리니, 엘리가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에 빙긋 웃어보이니 뭔가 더 심각해졌다.
왜 그래, 갑자기.
"싫으시면, 꼭 억지로 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래, 이제는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싫다고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삶이라는 것이 이토록 각박하지도 않을 터였다.
원하는 목표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해야한다면, 감내할 수 밖에.
"할리벨."
"응, 으응... 마왕님?"
내 부름에 느릿느릿 눈을 뜬 할리벨이 슬며시 나무 밑으로 내려왔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거에요? 좀 더 나아진 다음에 오셔도 됐을 텐데. 그보다 꼬맹이, 왜 안 막은 거야?"
마왕님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그건, 어머니가 원하신 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할리벨의 꼬리가 아이의 뺨을 쿡쿡 찔렀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하트 모양의 끄트머리가 피부를 파고들 때마다 부드러운 볼이 꾹꾹 눌렸다.
"너무 타박하지는 말거라. 다 내 잘못이니까."
"마왕님은 그게 문제에요. 언제나 내 잘못, 내 잘못, 내 잘못..."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는 할리벨에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내 잘못이 맞는 걸.
천천히 손을 뻗어 레이나의 무덤을 쓸어내리자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흣."
"......조심하세요."
고통, 고통, 고통.
무의식적으로 묻어두었던 기억.
그것을 떠올리자마자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만, 떠올리지 마.
더 이상 그때 일에 대해서 떠올리지 말라고.
그렇게 했다가는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니까.
"나를 원망하지는 않니?"
아무리 너를 살리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너의 의견조차 묻지 않았더랬지.
뿔이 잘리는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내 이기심 때문에 그리 되었으니까.
"전혀요."
하지만 아이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들꽃 같은 얼굴로, 맑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 얼굴을 보면, 안심할 수 밖에 없잖아.
결을 따라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잊고 싶은 것이 있다면, 굳이 떠올리지 않으셔도 돼요."
이 세상에 있는 무언가는 잊혀진 채로 있는게 더 좋을지도 모르니까요.
억지로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고통 받는 기억이라면, 차라리 잊어버리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용사를 따로 불러내어 어머니에게서 떨어지라고 한 건, 다름 아닌 그 이유 때문이었다.
용사와 함께 있으면 그 기억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될 테니까.
"맞아요! 지금은 현재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니까요~♥"
"...히얏?!"
"떠, 떨어지세요!!"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니, 할리벨이 꼬리를 흔들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뭐야, 그 얼굴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옆에서 엘리가 튀어나와 할리벨을 멀찍이 밀어냈다.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는게, 꽤나 화가 난 듯 싶었다.
"하? 얼마 전의 걸로 1대1인데?! 기어오르지 말라고, 이 음탕 성녀가!!"
"읏?! 아, 아직 승부가 나지 않은거지, 진 건 아니거든요? 이 음탕 서큐버스가!"
"서큐버스는 원래 음탕하거든? 바보 아니야?!"
순식간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니 골머리가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뭔가 잘 맞는 것 같으면서도 시시때때로 싸운단 말이지.
귓가에 들려오는 소음에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자니, 아이의 뒤통수가 내 가슴을 쿡 찔러왔다.
...음, 뭐랄까.
"...나쁜 기분은 아니구나."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래,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