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3 -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4)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하루? 이틀? 그것도 아니라면, 일주일?
멍청히 고통에 몸을 맡기기도 잠시, 순식간에 하얗게 물드는 시야에 용사의 정신이 점멸했다.
"컥, 커헉... 켁..."
머리통을 붙잡고는, 뭉쳐져 있던 숨을 거칠게 토해낸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듯한 절망이 그의 침에 섞여 줄줄 흘러나왔다.
...겨우 이걸로 끝이 아니었어.
그 뒤에 더 있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정도였다고?'
물론 그녀가 겪은 절망을 폄하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자신이 헤쳐왔던 역경보다 더 큰 고통에 반사적으로 의문을 가질 뿐이었지.
갓 태어난 사슴처럼 바르작거리던 용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신을 물들이는 식은땀이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ㅡ"
그러다가 문득, 시야 한 켠의 붉은색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긴다.
멍하니 고개를 돌려보면 작은 아이가 땅에 쓰러져서는 가쁘게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달려든다.
순식간에 아이를 들어올린 용사가, 뜨겁게 달아오른 아이의 체온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나에게 그 꿈을 겪게 해주겠다고 이렇게 된 건가.
...아서, 너 때문에 또 한 사람이 쓰러지는구나.
죄악감이 목덜미를 감싸안았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
아직까지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뚱이었지만, 달리는 것 정도는 문제 없이 가능했다.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속도로 달려낸 끝에 여관으로 들어서니, 이미 하늘은 어둡게 물든지 오래였다.
"용사, 갑자기 그렇게 문을 박차고 와서는ㅡ"
"...마왕."
마왕의 얼굴에 불쾌감이 서렸다가, 용사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 제 모습을 담있던 눈동자가 이번에는 아이의 모습을 가득 담아냈다.
이제 용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이는 눈치였다.
"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냐?!"
마치 보물을 감싸안듯이 소중히 품에 안는다.
마왕은 붉게 홍조가 뜬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도, 슬픈 눈으로 그 뺨에 입술을 꾹꾹 찍어눌렀다.
언젠가 보았던 풍경이 시야를 물들인다.
정말로 저것이 사악한 존재라면, 그보다 더한 짓을 한 자신은 얼마나 구역질 나는 존재라는 것일까.
"설마 뿔이 잘린 것 때문에 그런 걸까..."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마왕이, 돌연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죄책감으로 가득 찬 표정은 용사로 하여금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저 얼굴을 계속 보고 있다가는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을 것만 같아서, 그는 둘의 모습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어라, 걔는 왜 그래요?"
"...나도 잘 모르겠다. 용사가 데리고 왔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어서는ㅡ"
"용사요?"
붉은 시선이 용사를 향해 쏘아졌다.
의심을 가득 머금은 눈동자가 마치 자신을 타박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한 일이 아니야.
하지만,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아무래도, 꿈을 과하게 다뤄서 과부하가 온 모양이네요."
"...심각한 건가?"
"며칠 푹 쉬면 나아질 거에요."
몽마가 달뜬 숨을 내뱉고 있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내렸다.
"이 아이 혼자였다면 조금 오래 걸렸겠지만, 여기에는 믿음직스러운 보호자가 있으니까요!"
가슴을 탕탕 두드리자 마왕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 그림 같은 광경에 끼어들 수 없다는 건, 과연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조금 전에 겪었던 고통을 떠올리며 용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이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라는 인간은, 마왕의 옆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 사실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자, 이리 주세요. 일단은 제가 돌보고 있을 테니까."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 아이의 얼굴을 쫒았다.
너는 그런 일을 겪고, 그런 꿈을 꾸면서도 아이를 사랑할 수 있어?
고통과 절망, 그리고 짙은 혐오감 속에서 태어난 아이를 그 정도로 보듬을 수 있다고?
'나였다면.'
나였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짚는다.
분명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구역질이 치솟아 올랐다.
제 속에 불로 지진 쇠막대기가 들어차는 듯한 감각.
그리고 그것이 거칠게 움직이며 몸 속을 진창으로 만드는 것까지.
"헉, 흐......"
얼마나 뒷걸음질을 쳤을까.
등 뒤에 닿는 차가운 감각에 용사가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딱딱한 나무 문의 감촉에 그 문고리를 잡아채서는 도망치듯 문 밖으로 나섰다.
...이제 그만 떠올려.
"그냥, 꿈이었을 뿐이야."
현실이 아니었다고.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었다면?
그걸 실제로 겪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하, 하하하...."
실성한 듯이 헛웃음을 내뱉는다.
겨우 꿈.
겨우 꿈이었다고.
내가 겪은 건, 겨우 꿈에 불과했다고.
짙은 죄악감이 파고든다.
언제나 느꼈던 그것의 수십, 혹은 수백 배.
"...뭐가 용사라는 거야."
손에 묻어 있는 피가 전부 정당한 것들이었다고, 어느 누가 증명할 수 있지?
내가 해왔던 일들이 전부 옳은 일들이었다고, 어느 누가 변호해줄 수 있지?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것들을, 대체 누가.
"아리엘..."
이제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마을이 습격 당했을 때?
너를 구하지 못했을 때?
그것도 아니라면, 마왕을 처음 만났을 때인가.
'여신의 말은 믿지 마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믿어다오.'
그 눈에 담긴 감정.
그것이 기만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왜 이제서야 깨달았는가.
왜, 직접 당해보니 상대를 이해할 것 같아?
이해를 해서, 드디어 그때의 말과 행동 전부가 진실인 것처럼 느껴져?
그런데 이를 어째.
이미 늦었잖아, 멍청아.
"제길, 제길, 빌어먹을..."
그 때도,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언제나 늦을 뿐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친구.
아리엘.
마을 사람들.
기사.
스승.
동료.
나.
그리고 마왕.
"윽, 으아아아아......"
지금까지 억눌러 왔던 것들이 터져나온다.
스스로를 지탱하던 마지막 자존심.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흑색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내가."
내가 잘못한 거야.
차라리 내가 아니었다면 좋았어.
왜 나 같은 인간이 용사가 된 거지?
언제나 도망치기만 하던 인간이 성검을 잡는다고 뭔가 달라질 리가 없잖아.
차라리 용감하게 마족의 앞을 막아섰던 친구가 성검을 쥐었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제 스승이 성검을 쥐었더라면.
...어쩌면, 결과가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당신이 조금만 더 빨리 왔었더라면...'
'네가, 조금만 나를 더 일찍 믿어줬더라면.'
그래.
이번에도 늦었지.
차라리 미친 척을 하고 마왕의 말을 믿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를 터였다.
손에 들린 성검의 단면에 용사의 얼굴이 비쳐졌다.
끔찍할 정도로 일그러지고 망가진 인간의 얼굴이었다.
"용사."
그렇게 스스로의 죄악에 몸서리 치고 있던 와중,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 근래에 익숙해진 목소리.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마왕의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마 환상이라도 보는 걸까.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이자, 마왕의 환영이 제 앞에 쭈그려 앉았다.
"괜찮느냐?"
천천히 뻗어진 손이 용사의 뺨을 쓸어내렸다.
다른 이들보다 차가운 체온에, 그가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걱정이 담긴 눈빛이 제 얼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네가 어째서..."
나를 걱정해.
너에게 있어서 나라는 인간은 원망하고, 증오해야 마땅할 존재인데 왜 네가 나를 걱정하냐고.
멍청히 올려다 보던 용사의 눈동자에 마왕의 미소가 비쳤다.
울 듯이 일그러진 그 웃음을 보며 감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심장이 철렁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용사가 숨을 삼켰다.
'이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리엘.
그 세 글자에 담긴 것의 의미가 어찌나 커다랗던지.
겨우 이름이 같을 뿐인데도 나는 이토록 무너져 내린다.
"아서."
얼굴이 바뀐다.
동시에, 사람이 바뀐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소꿉친구의 모습이 된 환영이 용사를 내려다 보며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 미소 하나라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었는데.
"그런 짓을 했는데도, 잘도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구나."
"..."
소꿉친구의 목소리가 돌변한다.
차가운 음성이었다.
같은 이름.
어째서 나에게 그런 짓을 했냐는 증오 어린 속삭임에 목구멍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무언가 변명을 해야만 했지만, 할 수 있는 변명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기껏 눌러두었던 기억이 다시 한 번 터져나왔다.
피와 고통.
공포와 절망.
증오와 슬픔.
마왕과, 용사.
"내가, 잘못했어..."
전부 내 잘못이야.
땅을 긁어내리고, 이마를 바닥에 찧는다.
쿵쿵, 하고 울려퍼지는 둔탁한 소리에 나무에 앉아있던 나비 한 마리가 저 너머로 날아갔다.
마왕이 있을 여관으로 향하는 그 자그마한 모습을 바라보다가도, 자괴감을 참을 수 없어 흙바닥에 머리를 묻었다.
"그래, 전부 네 잘못이야."
선명하게 들어차 있던 환영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조금 전에 꾸었던 꿈 한 조각이 전부인 채, 용사는 그 자리에서 한참이고 오열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그 순간까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