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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94화 (94/342)

Chapter 94 -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5)

아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본인이 아이라는 사실이었다.

겨우 아이에 불과한 몸으로 그 질척한 악몽을 다루려고 하다니.

자신이 쓰러진 것으로 끝난다면 다행이었지만, 겨우 그정도가 아니라는게 문제였다.

"...어머니는."

"마왕님은 잘 지내고 있으네까 걱정 하지마, 꼬맹이."

...잘 지내고 있으실 리가 없잖아요.

잠시 눈을 붙이기만 해도 끔찍한 악몽을 꾸시는 분이다.

그런데 그 악몽을 먹어치우는 존재가 없다면, 지금도 그 악몽을 꾸고 있다는 뜻 아닐까.

"이겨내실 수 있을 거야."

꿈을 먹어치우는 몽마 둘의 손이 이렇게 묶여버린 이상, 악몽을 이겨내는 건 그녀 혼자 해야 할 일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 때문에.

제가 괜한 짓을 해서.

"네가 나쁜게 아니라, 용사가 나쁜거지."

할리벨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었다.

그들 중 잘못한 이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용사 하나 뿐일 터였다.

잘못을 물을 이는, 이미 다 떠나고 없었으니.

"마왕님이 괴로워하신 만큼, 돌려주면 되는 거야."

용서 따위는 사치에 불과했다.

있는 그대로 돌려주지 않으면 섭섭하지.

서큐버스가 몸서리 칠 정도로 구역질 나는 악몽이란, 그녀의 마왕이 어떠한 짓을 당했는지 뼈저리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니, 복수한다.

단순한 사실이었다.

"너는 걱정 말고 몸조리나 잘 해, 알겠지?"

"...네."

같은 서큐버스라서 그런 걸까.

서로를 대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아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인간에게 상처 받은 이가 마족에게 치유 받는 건, 과연 불행일까 행복일까.

"마왕님..."

눈을 감은 아이가 규칙적인 숨을 흘리기 시작할 무렵, 할리벨이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 높이 뜬 달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가 얼마 전의 일을 천천히 떠올렸다.

그러니까, 자신이 창관에서 구해진 뒤의 일이었지.

'할리벨, 부탁이 있다.'

용사로는 절대 흥분하지 못하겠다며 울먹거리던 그 얼굴.

제 체액을 담아달라면서 작은 병을 내미는 그 손길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더랬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이 세상에 넘쳐나는 것이 남자인데, 왜 하필 용사와?

"차라리 내가 남자였다면..."

마왕님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몽마의 체액이 담긴 병을 받아들고 고맙다며 미소 짓던 얼굴이 아직까지도 생생히 떠올랐다.

그런 것에 고맙다고 말하시면 어떻게 해요.

...별로, 좋은 것도 아닌데.

***

악몽이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휴식까지 앗아가는 최악의 질병이었다.

요 며칠간 편안하고, 푹 잘 수 있다며 좋아했건만...

"헉, 허흐..."

온몸을 끈적하게 물들인 식은땀이 기분 나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머리맡에 놓인 물병을 더듬거렸지만, 그것을 손에 쥐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철퍽...

"...아."

힘 없이 추락하는 물병과 함께,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달빛에 비친 웅덩이가 붉은색으로 보였다.

붉은색.

피의, 붉은색.

"그냥 꿈이야, 그냥..."

꿈일, 텐데.

손바닥이 붉게 물든 채로 나를 비웃고 있었다.

네가 죽였잖아.

네가 레이나를 죽였잖아.

"아, 으으으으으......"

속삭임이 들려온다.

나를 탓하고, 경멸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몸을 바르작거린다.

누군가 와주기를 바랬지만, 내 옆에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제발, 도와줘.

"흐..."

균형을 잃고 침대 아래로 추락한다.

바닥에 고여 있던 웅덩이에 얼굴이 처박혔다.

피부에 느껴지는 미지근함에 정신을 차리기도 잠시, 어두운 방에 혼자 있다는 그 사실 하나가 내 정신을 좀먹었다.

"...누구, 없어?"

엘리, 할리벨, 아가...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마른 기침을 내뱉는다.

목이 마르다 못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목줄기를 긁어내리니 손톱 끝이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너 따위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리고 생각한 거야?

앞으로 100만이나 더 낳아야 한다고.

멍청히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푹 떨궜다.

...힘들어.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마치, 이 세계가 나를 배척하는 것처럼.

"내가, 뭘 잘못 했는데..."

한 번 차오른 눈물은 가라앉지 않았다.

전부 쏟아낼 기세로 쏟아지는 뜨거움이, 바닥을 물들인 미지근함에 섞여들었다.

무슨 짓을 해도 이 악몽에서 빠져나올 수 없겠지.

이건 마치 하나의 운명과도 같았다.

절대 거스를 수 없는, 그런.

"용사, 용사..."

그 녀석이 있어야 해.

혐오할 정도로 끔찍한 그 인간이 있어야만,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서는 그대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몸이 시키는대로 계속해서 걸었다.

"...마왕."

"...용사."

달밤 아래의 밀회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눈 밑에 다크 서클을 매단 두 남겨가 서로를 바라보는 광경은 또 얼마나 우스울까.

그 표정조차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더더욱 그랬다.

"표정이 좋지 않구나. 왜, 악몽이라도 꾸었느냐?"

악몽이라면 왜, 소꿉친구가 살해당할 당시의 꿈이라도 꾼 걸까.

한 걸음 다가서니 한 걸음 물러선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 자체가 싫다는 듯한 반응에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피하지마."

"..."

"다른 모두가 피해도, 너 만큼은 피하면 안 되지. 응?"

등이 벽에 닿아서야 멈춰서는 그 모습을 보며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도망치지마.

나와 함께 있으며 상처 받는게 두려워?

그런데, 진정으로 미안하다면 그 상처까지도 버텨내야 하는 거잖아.

"...네 꿈을 꿨어."

그런 나를 보며, 용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했던 짓을, 네 입장에서 겪는 꿈을 꿨어."

"...그래서?"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겨우 꿈 따위로?

꿈은 그저 꿈일 뿐이야.

깨어나면 그걸로 끝일 뿐인, 그런.

"그래도..."

계속 꿨으면 좋겠네, 그 꿈.

내가 꾸는 만큼 너도 꿨으면 좋겠어.

내가 아팠던 만큼 너도 아팠으면 좋겠어.

비명을 지르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고통 받았으면 좋겠어.

나라는 인간은 그다지 성숙하지 못해서, 어디의 성인군자들처럼 쉽사리 용서하지를 못하겠더라.

"그러니까 용사."

나와 함께 있어.

내가 나머지를 전부 낳을 때까지, 절대 떨어지지마.

...아니.

"나랑 같이 떨어지자꾸나."

저 나락 끝까지.

샐쭉 입꼬리를 끌어올리니 상대의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가득 담겼다.

정말이지, 완전히 미쳤구나.

아니, 이미 처음부터 미쳐있었지.

"자, 이거 봐."

손을 뻗어 용사의 팔을 붙잡았다.

마왕군을 도륙내던 그의 몸이 내 연약한 힘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딸려왔다.

그 축 늘어진 팔을 움직여,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에 내 목을 가져다댔다.

너 때문에 한 일이야.

"네가 조른 곳이, 미친듯이 가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

끈적한 선혈이 용사의 손에 잔뜩 묻어났다.

그래, 이제야 어울리네.

그 손이 깨끗한 채라면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으니까, 앞으로는 그렇게 피를 칠하고 다니도록 해.

"용사, 용사, 아서..."

마치 노래를 부르듯 그를 부른다.

달이 높게 뜬 밤에 듣는다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음산한 목소리였다.

너에게 이 고통을 돌려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내가 행복해 보인다고 해서 네 죄가 가벼워지는게 아니야."

내가 왜 행복해 보일까.

정말로 행복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지금까지 겪어왔던 일들에 비해 그나마 나아서 그런 걸까.

하루 종일 물 속에 머리를 담그고 있던 사람이, 물 위의 공기를 마셨을 때와 같은 감각이겠지.

그때는 그저 숨을 쉴 뿐인데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나를 용서한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나를 믿겠다고?"

그게 아니야.

네가 해야할 말은 그게 아니야.

"너는, 가장 먼저 나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어."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땅에 처박고 모두가 수군거릴 정도로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용서를 구해야 했다고.

왜 네가 더 고통스러운 척 해?

왜 고뇌에 빠져서 초췌해진 척 해?

겨우 사과 한 마디로, 끝날 것만 같았어?

"네가 아프다고 해서, 내 상처가 사라지는게 아니잖아."

"..."

하지만 이 상처들을 치료하는 것 따위는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오히려 더 상처 받기를 택했지.

그렇기에 네가 더 고통 받기를 원한 것이었다.

그래, 바로 지금 같은 표정을 보기 위해서.

"네가 내 꿈을 꿨다면, 이제 알 수 있겠지."

너와 몸을 섞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몸을 두르고 있는 옷가지를 슬쩍 집어내린다.

더 이상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너에게 위안이 된다면, 내가 절대 그렇게 두지 않겠다.

"나를 상처 입히고, 너도 같이 상처 받는 거야."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준다는 건 서로에게 마음이 있을 때나 해당하는 이야기일 터였다.

그런데, 내가 너에게 마음을 줄 리가 없잖아.

몸은 주되 마음은 주지 않는, 그 괴리감이 네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더욱.

"기억해."

너와 처음으로 몸을 섞은 사람은 네 소꿉친구가 아니라, 다름 아닌 나야.

그런 짓을 하고도 소꿉친구에게 사랑을 속삭이려 하지는 않겠지?

결국 네 사랑 따위는 이미 끝나버린지 오래라는 거야.

"자, 시작하자."

내 사랑(증오)을, 너에게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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