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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95화 (95/342)

Chapter 95 -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6)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드는 칙칙한 색의 감정.

그것을 두 눈으로 마주한 다음에는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하지 못하게 되었다.

"큭, 흐으...."

마왕이 신음을 흘렸다.

겨우 손길 몇 번에 빳빳하게 그 크기를 불린 자지가 그대로 상대의 몸 속을 파고들었다.

고통으로 물든 그 표정을 보며 용사가 몸을 굳혔다.

이런게, 절대 정상일 리가 없었다.

"...한 가지 가르쳐 줄까?"

저번에 젖어서, 그 좆에 느낀 건 너에게 마음을 열어서 그런게 아니야.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그만큼 지독했다.

제 등을 감싸안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올리자 황금빛 눈동자가 달빛을 반사해 처연히 빛나고 있었다.

"할리벨의 체액을 마셨었거든."

너와의 섹스는 구역질 날 정도로 끔찍해서, 그게 아니라면 절대 흥분하지 못하겠더라.

네 얼굴, 네 체온, 네 목소리...

아니, 네 존재 자체가 싫어서.

밉고, 또 밉고, 너무도 증오스러워서.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아이를 낳으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 걸.

"내가, 잘못 했어."

용사가 용서를 구했다.

제 좆에 꿰뚫려 있는 마왕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으며, 사죄했다.

눈물, 흐트러지는 호흡, 그리고 떨리는 신체까지.

그 무엇 하나 용사의 심장을 찢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움직여."

그때와 같이 거칠게 움직여.

나를 죽일 기세로 움직이란 말이야.

왜, 그때처럼 목이라도 졸라보면 어때?

"이런 건, 그만 두자."

"왜?"

황금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어둠 속에서도 보일 만큼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안에 자리잡은 동공은 힘 없이 풀려있었다.

그제서야 용사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마왕은 정신을 놓아버렸다고.

제정신으로 자신과 몸을 섞을 수 없었기에, 완전히 생각을 포기 해버렸다고.

"아픈게 싫다고 했잖아. 나는, 이제 네가 그만 아팠으면 좋겠어."

"그건 저번에도 했던 말이잖아, 아서."

또 이름.

너에게 이름으로 불리면, 나 또한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이를 악문 용사가 마왕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는 천천히 들어올렸다.

전혀 젖지 않은 질에 붙잡혀 있던 좆이 바깥으로 빠져나가며 상상 이상의 쾌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쾌감은 그의 심장을 난도질 할 뿐이었다.

"너와 함께 있는 하루ㅡ 아니, 일 분 일 초가 나에게 있어서는 고통이야."

마왕이 그렇게 말했다.

힘 없이 늘어진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우리들은 마주해서는 안되는 존재들이다.

그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관계였으니까.

"그러면, 내가 떠날ㅡ"

"아니."

뻗어진 손가락이 용사의 입술을 꾹 짓눌렀다.

그만 말하라는 듯 내리누르는 압력에 마른침을 삼키자, 마왕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야 해."

네가 도망치는 꼴 따위를 내가 두고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크기를 줄인 좆에 시선을 준 마왕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가벼운 경멸이었다.

"그게 내가 너한테 주는 벌이야."

네가 받아야 할 벌이기도 하고.

마왕의 손가락 끝이 귀두 끝을 쿡 찔렀다.

내장이 짓이겨진 바퀴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것을 만지작거리던 마왕이, 불현듯 고개를 들어올렸다.

짝, 하고 손바닥이 마주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니면, 그래. 나를 사랑해보는 건 어때?"

"......뭐?"

마왕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잔뜩 풀린 동공이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조성했지만, 조금 전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그저 멍청히 되물을 뿐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라고?

"너를 무척이나 증오하는 나를, 네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거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언젠가 내 뱃속에 아리엘이 생기고, 아리엘이 태어나, 아리엘이 자라나, 아리엘이 모든 것을 떠올리게 된 순간.

"그때 그렇게 말해."

나는,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진 마왕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상처입은 악마가 깔깔 웃었다.

말도 안되는 비극을 떠올린 소설가처럼 하늘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제 손가락을 마치 깃펜처럼 휘둘렀다.

좋아, 그게 좋겠어!

"결국 네가 나에게 그런 짓을 한 건, 네 소꿉친구를 되살리지 못했기 때문이잖아."

동시에, 네 소꿉친구를 되살리기 위해서였지.

맞는 말이었다.

그 무엇 하나 틀리지 않은 진실.

"나는ㅡ"

***

숨을 들이쉰다.

순간적으로 뒤바뀌는 풍경에, 용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이는 식은땀이, 전신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몸 위에 놓어져 있던 이불을 걷어낸 용사가 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찌를 듯한 두통에 신음을 내뱉으니 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리엘."

문을 여니, 베개를 품에 안은 마왕이 제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울고 있었는 듯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안쓰러워, 용사는 상대를 방 안에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꿈을 꿨어."

아리엘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네가 내 꿈을 꿨다고 고백하는 꿈을 꿨어.

내 입장이 되어서, 자기 자신에게 강간 당하는 꿈을 꿨다는 꿈을 꿨어.

거기에 대고 나는 꼴 좋다고 했지.

"이제 증오하는 건 지쳤어."

마왕이 읊조렸다.

아이를 잃는 것도, 제 손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아이가 아픈 것도, 용사를 미워하는 것도.

무엇 하나 그녀에게 있어서는 고통스러운 것들에 불과했다.

아픈 것을 싫어하는 특이한 마족.

제 마음이 아픈 것조차 오래 버티지 못했기에, 이런 미련한 소리를 내뱉고야 마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런 아리엘을 앞에 두고, 용사가 무릎을 꿇었다.

꿈 속에서 들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처박은 채 그대로 사죄의 말을 내뱉었다.

"전부 내 잘못이야. 내가, 죽을 죄를 지었어."

아무리 분노했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

선이라는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인간이고 누가 마족일까.

스스로의 정당성을 망가뜨린 건 다름 아닌 자신.

그렇기에 그는 사죄할 수 밖에 없었다.

심장을 옭아맨 죄책감에 사로잡혀 고뇌하는 건,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뭐든지 할게."

단순하지만, 그만큼 진실성 있는 말이었다.

동시에, 위험하기도 했고.

만약 자신보고 죽으라고 한다면?

인간들을 죽이라고 한다면?

하지만 그것들은 용사가 신경 쓸 것들이 아니었다.

아니,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은 그저, 상대에게 사과를 하는 것만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래?"

마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용사를 바라보며, 품에 안긴 베개를 내려놓는다.

뭐든지 한다.

뭐든지 한다라...

"..."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용사가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렸다.

허공에서 낙하하는 눈물 사이로, 창백한 달빛이 산란되었다.

"자."

아리엘이 손을 뻗었다.

무언가를 원하는 듯한 행동에 용사가 머뭇거리기도 잠시, 제 손을 부드럽게 쥐는 손길에 멍청히 팔을 내주었다.

"너 때문에 꾸는 악몽이니까, 네가 책임 지고 없애."

양 손으로 제 손목을 꾹 쥔 아리엘이 그대로 팔을 들어올렸다.

흑색의 정수리에 얹어지는 손에, 용사는 멍청히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왜.

어째서...

"...너무, 힘들어."

목소리가 희미해진다.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잔뜩 조여진 음성이 아리엘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제 미워하는 건 너무 힘들단 말이야..."

"..."

상처가 커도 너무 커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린 사람.

어색한 움직임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자, 그의 손길이 닿은 신체가 흠칫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꿈에서, 레이나가 나왔어."

"..."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줬는데, 손에 피가 너무 많이 묻어서..."

훌쩍거리던 아리엘이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와 동시에 길게 뻗어진 머리카락이 힘 없이 흘러내렸다.

언제나 증오를 외치던 존재의 연약한 모습에, 심장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너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건 다름 아닌 나다.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어.

"미안,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한 품에 들어오는 몸을 꽉 껴안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상대의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서는 포옹을 멈추지 않았다.

쿵쿵, 하고 심장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빠르게 뛰던 박동이, 점점 느려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느릿하게 변했다.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

"지금은."

어쩌면 1년, 10년,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난 뒤에조차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이 용서를 구하는 걸 멈추라는 뜻은 아니었다.

용서 받지 못했다면, 용서를 받을 때까지 노력하면 되는 거야.

...용서를 하지 못했다면, 용서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고.

"용사."

아리엘이 부드러운 손길로 아서의 몸을 밀어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체온이 평소보다 더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게 해다오."

황금색으로 물든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졌다.

여전히 상처 투성이였지만, 얼마나 아름답게만 보이던지.

그렇기에 아서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건넨 말의 의미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았기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

그럼에도 어떻게든 목소리를 낸 건, 더 이상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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