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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97화 (97/342)

Chapter 97 -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8)

밤일 때와 아침일 때는 또 다르다고 했던가.

눈앞에 보이는 용사의 면상을 보니 괜히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잘도 자는구나."

어제 그 꼴을 봤으면서.

한숨을 푹 내쉬며 이불을 걷어내니 작은 칭얼거림이 들려왔다.

...히다하다 이 녀석의 잠꼬대를 듣는 날도 오네.

"어제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나?"

작게 속삭인다.

어제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의 의미, 모르지는 않겠지?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는 건, 곧 네 소꿉친구를 부활시킬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일 텐데.

"바보 녀석."

가장 소중한 이를 포기하면서까지 나에게 사죄하는 걸 택하다니,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지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용사가 내 몸을 만질 때는 그토록 무서웠는데, 그렇다면 내가 녀석의 몸을 만지는 건 어떨까.

느릿한 손길이 금색의 머리카락에 닿자, 푸석푸석한 감각이 잔뜩 느껴졌다.

딱히 몸이 떨려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잠을 거의 자지 않았었지."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심지어 밤이나 새벽에도.

용사란 인간은 잠을 자는 건가 싶을 정도로 수면 부족인 부류였다.

그것이 버릇인지, 혹은 강박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별로 유쾌한 이유는 아닐 터였다.

"이렇게 보면 너도 참 불쌍한 녀석이로구나."

물론 그런 자그마한 가여움 한 조각으로 네 행동들이 정당화 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사정이 딱하다고 여겼을 뿐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짝사랑하던 소꿉친구가 눈 앞에서 범해진 끝에 죽었는데 그 누가 눈이 안 돌아갈까 싶기도 했다.

"...어쩌면, 나도 너를 이해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처음에는 그저 게임 속의 세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용사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나쁜 새끼라고만 판단했지.

어떻게 보자면 그 또한 하나의 피해자에 불과했다.

내가 한 모든 회차의 용사들은 모두 소꿉친구를 잃는 비극을 겪었을 테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신이 문제야.'

증오하고, 복수해야 할 대상은 서로가 아니라 저 하늘에 있을 여신이 되어야 할 터였다.

나를 이 세계로 불러와 이 몸뚱이에 집어넣은 존재이자, 용사를 꼬드겨 나에게 그런 짓들을 하게 만든 장본인.

내 잘못이 없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게임을 플레이 한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그래도, 선이라는게 있지ㅡ'

"...왕."

"..."

"마왕."

"히약?!"

멍하니 생각을 이어나가던 도중,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감각에 몸을 비트니 순식간에 침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떨어질 뻔 했다.

"조심해."

"......."

나를 붙잡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됐었겠지.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와 뺨에 닿는 숨결.

삐걱거리는 고개를 움직여 용사를 바라보니, 걱정이 가득 담긴 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단순한 해프닝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아니었다.

강렬한 쪽팔림에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그게, 그러니까...

'...내가 용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

그러다가 용사가 깨어나서 말을 거니까, 깜짝 놀라서 침대 아래로 떨어질 뻔 한 거고.

그리고 그런 나를 용사가 붙잡아 품에 가둔ㅡ

"이, 잊거라! 절대 잊어버려라! 그, 그냥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니 잊어버려!!!"

용사의 팔을 뿌리치고는 베개를 휘둘렀다.

죽어, 죽어, 죽어버려!

용남충 주제에! 용남충 따위가!

수, 숨 쉬듯이 사람을 꼬시려고 하잖아?!

'그런데, 내가 왜 부끄러워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자니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은채 두들겨 맞던 용사가, 뻣뻣하게 굳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속이 안 좋아졌어.

"나, 나는, 이만 가보마."

내가 왜.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왜?

이유 모를 괴리감에 구역질이 치솟아 올랐다.

분명 뭔가 달라.

이건, 내가 아니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용사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는 한참이고 신음을 흘렸다.

그럼에도 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멍하니 걷고 또 걷다보니 눈앞에 보이는 건 잿더미가 된 폐허였다.

...내가 레이나를 죽인 곳.

"내가 왜 여기에..."

마법사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인기척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죽음의 냄새 뿐.

폐허 안으로 들어서, 기괴한 그림들이 걸려있는 복도를 계속해서 나아간다.

완전히 타오르지 못한 뼛조각을 바라보며 신음을 삼키다가도, 구석에 나있는 문에 슬며시 팔을 뻗었다.

'...마법사 녀석이 만든 공방이야.'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종이 조각들이 눈에 띄어, 그 중 하나를 집어올렸다.

여신의 저주.

짧은 제목과 함께 써져 있는 내용을 주욱 읽어내린다.

증오의 증폭과 이성의 상실.

...차라리 읽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저주, 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용사가 그런 짓거리를 한게 전부 여신의 저주 때문이었다고?

그 눈빛, 그 행동들 전부가?

그럴 리가 없잖아.

겨우 저주 따위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대체 나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할 셈인데."

왜, 내가 용서할 필요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용사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이니, 그에게 상처를 주는 일 따위는 하지 말라고?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빌어먹을.

"나와, 나와!! 당장 나와!!!!"

화가 치밀어 올라서는 주변의 물건을 마구 내던졌다.

여신, 여신, 여신!

그 증오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텅 빈 공동 안에 울리는 날카로운 음성이 사방으로 울려퍼졌지만, 나는 발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 가증스러운 얼굴을 때려주지 않고는 못 버티겠어.

그러니까, 빨리 나와.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른 생각에 움직임을 멈춘다.

엘리가 신성력을 사용한다면, 여신을 만날 수 있는거잖아.

그런데, 그렇게 불러내서 뭘 할 생각인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다.

분명 잔뜩 비웃음만 듣고 끝나게 될 만남이 될 터였다.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차가운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는 멍하니 중얼거린다.

이런 세계 따위,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뭐야 이게.

증오도, 분노도, 심지어 용서조차 빼앗아 버리면 나보고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

'처음부터 나한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고 말하는 거야?'

백만을 낳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나에게 주어진 길은 오로지 그것 뿐이라는 듯, 세계가 비웃어왔다.

...하, 하하.

바보 같아.

"으..."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구석에 놓여진 자그마한 문이 보였다.

방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흰색으로 칠해진 문의 모습에,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다가가지 마.

하지만, 확인해야 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문고리를 손에 쥐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전부가 타오른 폐허에 맞지 않게 이 방 만큼은 새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 안에 놓여진 건 여신상 하나와 방석 하나.

멍하니 그 앞으로 다가가니 괜스레 울분이 터져나왔다.

"대체,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대체, 왜?!"

여신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한 돌덩이 앞에서, 여신을 부르짖으며 원망을 쏟아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용사를 원망하는 것도 그만 뒀잖아, 그래서 용서하겠다고 했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용사조차 네 손에 놀아난 피해자였다는 거야?

"그, 그래도 그 녀석이 한 짓은 변함 없잖아. 아무리 네 저주를 받았다고 해도, 저주를 받은지 모르고 한 짓이라고 해도! 그, 그 녀석이 한 짓이잖아?!"

발작적으로 외쳤다.

추한 발버둥이었다.

내가 겪은 고통들의 주인을 정하려는 듯한, 처절한 몸부림.

하지만.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

게임인지 몰랐다고, 당신이 죽여댄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않아요.

게임인지 몰랐다고, 당신이 되돌린 시간들이 전부 없던 것이 되는게 아니에요.

전부 당신이 한 일들인데, 왜 당신이 피해자인 척 굴어요?

게임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잘만 죽였잖아요.

그렇게나 아끼는 성녀도, 제 손으로 죽였다며 울부짖던 그 엘프까지도.

전부 그 손으로 죽여왔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는게 어디 있어요?

"아니야, 달라... 나는..."

"뭐가 다르다는 걸까요, 우리 귀여운 마왕님은."

여신상이 생기를 가진 채로 움직여, 내 뺨에 손을 얹었다.

석상이라고는 생각되지 못할 정도의 온기에 소름이 돋아 몸을 바싹 굳혔다.

거짓말.

왜, 왜 여신이 여기에 있는 건데?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세요?"

"...힉."

농염한 속삭임이 귓가를 타고 흘렀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행복해지려고 하니까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구요. 귀여운 성녀도 최근에는 기도 한 번 올리지 않고..."

설마 진짜로 올 줄은 몰랐는데, 잘 되었네요.

키득거리는 웃음 소리가 기도실을 가득 채웠다.

"저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제 '축복'을 받아놓고서는 뻔뻔하게도...

"축, 복이라니. 그게 무슨..."

"아, 그것까지는 모르고 계셨군요?"

여신의 입꼬리가 빙긋 솟아올랐다.

마치, 장난감을 망가뜨리기 직전의 어린아이와도 같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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