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8 - 타인을 이해해는 방법.(9)
"당신이 그런 짓을 당하고도 왜 그렇게 멀쩡하겠어요."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미 미쳐버리고도 남았을 텐데, 어째서 꾸역꾸역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요?
키득거리는 웃음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거짓말 하지마.
"그, 그럴 리가 없잖ㅡ"
"무엇 하나 특출날 것 없는 당신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 밖에 없잖아요?"
아니면, 증거라도 보여드려야 하나?
이제는 석상의 모습을 반쯤 벗어던진 여신이 내 팔을 꽉 붙잡아 왔다.
분명 부드럽게 감싸안았을 뿐인데도 떨쳐낼 수 없는 힘에, 나는 그저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자, 그러면 축복을 거둬 가볼까요?"
"...아."
여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이마를 콕 찍어눌렀다.
찍어눌렀다.
찍어눌...
찍어ㅡ
"아."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파살려줘싫어더이상그러지마때리지마내안에좆을집어넣지마신성력싫어내몸을만지지마네멋대로내안에손가락집어넣지말란말지팡이로그만때려죽어뼈가부러졌어가기싫어가기싫어가기싫어의사가필요아이낳기싫어아파아파아파내아기를돌려줘이빌어먹을드워프왜보고만있는거야나를도와주겠다고했잖아망할엘프년근데왜그렇게죽어내가왜죽여야하는데아파무서워싫어배가찢어져그만그만그만꿈에서나오지마나한테사과하지마그만둬그만그만그만그만ㅡ
"그, 그먄, 그먄 뎌...크에, 으, 흐엑..."
"그러게 제 말을 잘 들으셨어야죠, 네?"
"이, 이졔 그먄 그, 에에엑......"
여신의 다릴 붙잡고는 빌었다.
빌고, 빌고, 또 빌었다.
내 머릿속을 유린하는 끔찍한 기억들을 억누르기 위해, 비참할 정도로 빌었다.
"이러면, 처음 만났을 때랑 똑같네요?"
하반신은 이미 내가 싸지른 오줌으로 축축해진지 오래였다.
코를 찌르는 지린내와 더불어, 끝나지 않는 절망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서워, 그만, 이제 그만 살려줘...
"축복을 돌려드릴까요?"
"졔발, 졔발 돌려주세여... 머, 머든지 할게, 흑, 요......"
자애로운 손길에 내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눈물 범벅이 된 내 얼굴을 향해 혀를 내밀어 맛을 보고는 깔깔 웃어보인다.
...신이 아니라, 악마야.
나는 이미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진거나 다름 없다고.
텅 빈 마음속을 채우는 질척함에,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에 대한 고통과 공포가 나를 죽여버리기 위해 칼날을 갈고 있었다.
"제가 최근에 참 재미있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말이죠?"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느니, 뭐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건방지게.
제 소꿉친구를 살려주겠다고 하는데도 그런 선택을 하다니.
용사님도 참 멍청하다니까요.
"아아, 두 사람의 치정극이 꽤 재미있어서 두고 봤었는데..."
그냥, 나머지 하나 남은 뿔까지 가져갈까 싶기도 하네요.
길게 뻗어진 손가락이, 뿔이 잘려진 단면에 닿았다.
가벼운 두드림이었지만, 찌릿하게 파고드는 신성력에 뇌가 익어버리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아, 아으, 아, 으...."
"제 저주를 막아줄 뿔이 없어진다면, 용사님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그대로 당신에게 친절할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제 저주의 영향을 받아서 당신을 거칠게 범할까요.
어떻게 될지는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때 느꼈던 고통의 몇 배를 느끼게 될지도?
"나, 낳을 테니까... 낳을 테니까, 졔발... 흐그..."
"당연히 그러셔야죠, 당연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친절 따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재미를 위한 관심 뿐.
여신이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차분해지는 심장에 구역질이 났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무엇 하나 선택할 수 없는, 장난감에 불과했었어.
"당신의 몸 안에 제 신성력이 듬뿍 들어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굳이 귀여운 성녀가 아니라고 해도 당신을 보는 것 쯤은 일도 아니니까.
마치, 지금처럼 말이죠.
"당신은 그저 계속해서 아이를 낳으면 되는 거에요."
계속, 계속, 계속해서.
그러니까 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마세요.
행복해지려 하지 마세요.
벗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몸과 영혼 전부 제것이니까.
"...대체, 이래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러는 게냐."
"이득이요?"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있음에도, 여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바르작거리는 내 머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리더니, 자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이득, 이득이라...
고민을 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몸을 바짝 웅크렸다.
왜인지 모르게, 상대가 내뱉을 답을 알 것만 같았다.
"그러고보니, 인간들은 하나 같이 득실을 따지는 경향이 있었죠."
그런데 말이에요.
이쪽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랍니다.
이득이니 손해이니, 저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구요.
"하지만 꼭 이유를 꼽자고 한다면..."
당신이 더 괴로워 했으면 좋겠으니까.
더 비명을 지르고, 절망하고, 고통에 바르작거리면서 자비를 구했으면 좋겠으니까!
끝내는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처절하게 용서를 구했으면 좋겠으니까.
"그래서에요."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생기가 사라진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 본다.
여신은 마치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지금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것조차 자신이 최대한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처럼 지껄여댔다.
그럼에도, 내가 반항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뿐.
"자, 이제 용사님에게로 돌아가셔야죠."
아이를 낳으려면 그와 몸을 섞어야 할 테니까.
그와 얼굴을 맞대는 것으로 흥분해, 당신의 남성성을 전부 버린 채로 그의 물건에 헐떡여야 하니까.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지.
여신이 맺어준 인연이라니, 정말 로맨틱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래도 뭐, 당신에게 좋은 소식 하나 정도는 알려드릴게요."
"...무, 슨."
"당신이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하고, 또 용서하려던 용사님이 행복해지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거랍니다."
당신 때문에 말이죠.
같잖다는 듯 내려다 보는 시선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더 이상, 괴롭히지마.'
이제, 나를 놓아달란 말이야.
"하으, 흐, 흐아아아아아......."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엎어진 채, 서럽게 울었다.
울고, 울고, 또 울어서 바닥이 흥건하게 젖을 때까지 오열했다.
딸꾹질을 하고, 숨을 제대로 못쉬어 헐떡이고, 그렇게 결국 탈진할 때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흐끅, 흐아아아아아아..."
끝을 알 수 없는 막연함이, 내 심장을 움켜쥐었다.
***
"아, 아아..."
"왜 그래, 꼬맹이?"
느껴진다.
짙은 절망과 슬픔의 감정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천천히 마음을 갉아먹는 그 칠흑이.
"어머니를, 어머니를 찾아야 해요."
달뜬 숨을 내뱉으면서도, 허겁지겁 저를 간호하고 있던 할리벨의 소매를 잡아챈다.
지금 당장 찾아야 해요.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게 분명ㅡ
"내가 찾아올게."
"...너."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울려퍼졌다.
낮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둘을 응시한 용사가, 천천히 아이의 앞으로 다가섰다.
"더 이상 다가오지마."
"..."
아이를 아프게 한 주제에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찾아온 건데?
거기에, 뭐? 마왕님을 찾으러 가겠다고?
할리벨의 목소리가 점점 과열되기 시작했다.
마왕님께 그런 짓을 해놓고는, 감히. 감히. 감히!
"..."
"...꼭, 찾아올게."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행동을 보며, 할리벨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용사가 자존심을 버리고 할리벨을, 그리고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꼭 찾아올 테니까, 아프지 말고 있어줘."
천천히 뻗어진 손이 자그마한 정수리를 쓸어내렸다.
마치 오물에 닿았다는 듯, 아이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하지만, 정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했을 때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뿐이었다.
이 연약한 몸뚱이로는 그저 방해만 될 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반드시, 멀쩡한 상태로 모시고 오세요."
루비색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감정에, 용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인이 직접 찾으러 가지 못한다는 것과 용사에게 그 역할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까지.
원래라면 충분히 참아낼 수 있었겠지만,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눈물이 비죽비죽 흘러나왔다.
"...당신 따위, 진심으로 싫은데."
여느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비죽이고는 이불 아래로 몸을 숨긴다.
그런 아이의 정수리를 쓰다듬던 할리벨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용사를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따지고 보면 이쪽이 용사에게 무어라 타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괜히 신경질이 났다.
"그러면, 다녀올게."
"꼭 어디 한 군데 부러져서 돌아와. 마왕님이 위험하다 싶으면 절대 몸 아끼지 말고, 팔이라도 자르던지. 아, 죽으면 더 좋고."
저주에 가까운 말에도 용사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황하던 눈빛은 이미 단단하게 굳어진지 오래였다.
문 밖으로 나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할리벨이 혀를 쯧쯧 차냈다.
"...멋진 척이나 하고, 역겨워 죽겠네."
저놈의 용사는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