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0 - 탈출.(1)
"...그래서 지금."
"..."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분명 질책을 받는 건 용사인데 왜 내가 더 움츠러드는 걸까.
이 정도로 격한 감정 표현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슬금슬금 구석자리로 몸을 내뺐다.
그런 나를 보며 할리벨이 키득키득 웃는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저 아이의 눈치를 보는 수 밖에 없었다.
"멀쩡히 찾아오라고 했는데 대체 왜 임신을 시켜서 오신 건가요? 콜록, 콜록!"
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연신 기침을 쏟아낸다.
서둘러 달려가 등을 두드리니 아이가 내 품으로 머리를 파묻었다.
미안, 사실은 내 잘못이야.
용사가 덮친게 아니라 내가 덮친거였어.
"그으, 사실은 내가 먼저 덮쳤다."
"어머니가 덮쳤다고 해서, 용사가 떨쳐내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확실히 맞는 말이기는 했다.
아무리 틈을 찔러서 덮쳤다고는 해도, 겨우 나 따위를 용사가 떨어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설마 나랑 하고 싶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던 걸까.
용사를 째려보니 정말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몸도 안 좋으신데..."
"...미안하구나."
할 수 있는게 사과 밖에 없다는 건 또 어떤 느낌이려나.
아픈 아이를 이 정도로 걱정시키는게 과연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인가를 고민하다가도, 잘게 떨고 있는 아이의 몸을 꼭 껴안았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무리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잘못은 전부 저 사람이 했으니까."
용사를 잔뜩 흘긴 아이가 내 품으로 얼굴을 묻었다.
더 이상 저런 사람 따위는 보기 싫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나저나, 엘리가 보이지 않는구나."
원래라면 가장 먼저 뛰어왔을 텐데.
그러고 보니 최근 엘리를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레이나와 마법사가 죽은 뒤로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여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년이라면 분명 엘리조차 이용할게 분명해.
엘리의 몸에 깃들 수 있다는 걸 이용해서ㅡ
"윽..."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대체 어디까지 약점을 잡혀 있는 걸까.
심장을 옭죄이는 비참함이 오늘따라 더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용사."
엘리를 찾아다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움직이고 싶었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뛰는 건 물론이고 걷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터였다.
애초에 용사와 성녀의 관계이니 별로 부담스럽지도 않을 테지.
"알겠어."
짧은 대답을 끝으로, 용사가 방을 나섰다.
***
교단의 건물이 불탔음에도 주변이 조용한 이유가 뭘까.
아니, 애초에 조용할 이유가 없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때 아닌 화제에 교단이 전소되었다는 소문은 저 멀리 왕도에까지 알려졌다.
그런 수상한 현상과 상황의 파악을 위해 교단이 사람을 보내지 않을 리 만무.
며칠 전부터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이단 심문관들의 모습에, 엘리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최근 레이나 씨와 에밀리 씨의 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느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게 패착이었다.
왕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분교라서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 아리엘 씨에게 알려야ㅡ"
"당신."
"힉?!"
사람들 틈에 섞여 이단 심문관들을 바라보다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굳어버린 목을 억지로 움직여 삐걱삐걱 고개를 돌리니,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는 신부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알겠군요, 성녀님."
"아, 네!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그으, 누구신지..."
솔직히 말하자면 교단 내에서도 사람들과는 별로 친분을 쌓지 않았던 터라,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하물며 그게 남자라면 더더욱.
만나서 영광이라는 듯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는 남자의 모습에, 엘리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 누구였지? 누구였더라?'
허둥거리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왕도에 있는 교단에서는 본 적 없는 사람.
그렇다면 용사님과의 여정 중 만났던 사람일 텐데, 도대체 떠오르지가 않았다.
"빅토르, 빅토르 입니다. 남부 전선에서 같이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아."
이름을 듣고 나서야 떠올랐다.
그때는 분명 귀족 중 한 사람으로 싸웠을 텐데, 교단의 신부복을 입고 있으니 알아보지 못할 법도 했다.
전장에서는 이리저리 뻗친 머리에, 제대로 정리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었으니까.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성녀님."
"저도 반가워요, 빅토르 경. 아니, 빅토르 신부님?"
신부라는 말이 듣기 좋았는지, 빅토르가 입꼬리를 빙긋 말아올렸다.
그의 주변에 있는 자들이 이단 심문관들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조차 괴로워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어서 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신부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냥 빅토르라고 불러주세요."
"...저도 그냥 엘리라고 불러주세요, 빅토르."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레를 치고 있었지만,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띄여진 틈 사이로, 진한 의심이 쏘아지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나저나, 성녀님께서는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그, 잠시 마을을 둘러보려고 혼자ㅡ"
"제 말은, '왜 이 마을에 계시냐'는 뜻이었습니다."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눈꼬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언젠가 만난 전장에서도 언제나 칼 같은 분위기를 내뿜던 사람의 시선이, 엘리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마왕을 처단하지 못했다면 그 목숨을 잃었을 것이고, 마왕을 처단했다면 충분히 왕성에 도착했겠지.
그것을 전제로 향해진 의심.
"조금, 휴식이 필요해서요."
평생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는 그녀의 최선은, 어떻게든 있는 그대로의 진실로 설득하는 것 뿐이었다.
어설픈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가는 분명 들통나겠지.
하물며 그게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까."
하지만 너무 과하게 걱정했던 걸까.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다행히도, 수상함을 느끼지는 못한 듯 싶었다.
"그렇다면, 마왕 토벌은 성공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무, 물론이죠!"
성공ㅡ 이라고 봐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부정을 답할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겠지.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로군요. 어서 빨리 알리지 않은 것이 의문스러울 정도로 말이죠..."
순간 딸꾹질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어떻게든 집어삼킨다.
...차라리 이 자리에 있던게 용사님이었으면 나았을 텐데.
어서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억누른 채, 마지막까지 화사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표정 관리라도 잘 한다면 그나마 나을 테니까.
그래, 그나마 나았을 텐데.
"아, 그러고보니 말입니다. 최근 마을 사창가에서 마족을 봤다는 소문이 있던데, 알고 계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네?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 한 마디에 가까스로 두르고 있던 가면이 깨져나갈 뻔 했다.
사창가의 마족이라면, 분명 할리벨 씨를 말하는거겠지.
"그건 조금 유감이군요..."
"..."
"뭐, 아무튼. 좋은 휴식 되시길 바랍니다, 성녀님."
"감사합니다, 빅토르 경."
차마 '빅토르 경도 원하시는 바를 이루셨으면 좋겠네요.' 같은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어물어물 감사 인사를 던졌다.
...다시 봐도 어려운 사람이네요.
꾸벅 인사를 하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이단 심문관들에게 할리벨 씨가 들리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아리엘 씨가 들키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혹시라도 마왕이 살아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물론 마왕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조차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약 그녀의 위치가 들통난다면 사람들의 증오가 전부 이곳을 향할 터였다.
"아리엘, 아리엘 씨..."
숨을 헐떡일 정도로 뛰고, 또 뛴다.
디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바라볼 정도로 눈에 띄는 행동이었지만, 엘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생각이 없었다.
여관을 둘러싸고 있는 이단 심문관들이 아니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터였다.
"설마..."
다른 사람들이 볼세라 서둘러 근처의 골목 안으로 몸을 숨긴다.
...어째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잠재운 엘리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들키지는, 않았겠죠?"
마족을 향한 사람들의 증오는 상상 이상이라, 무슨 짓을 당해도 이상하지가 않았다.
제발 저 안에 그녀들이 없기를 기도하며 계속해서 여관을 바라보던 그 때.
"엘리."
"흣?! 요, 용사님?!"
"쉿, 일단 지금은 이쪽으로."
등 뒤에서 나타난 용사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긴다.
"아리엘 씨랑 다른 사람들은요?"
"마차에 있어."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을 통과하자 자그마한 마차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
"아리엘 씨! 아니, 그보다 무슨..."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반가운 얼굴들에 소리를 치기도 잠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아리엘의 배를 본 엘리가 말문을 잃었다.
대체 제가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마부석에 앉은 용사에게 질문할 틈도 없이, 마차가 출발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아리엘 씨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힘겹게 미소짓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엘리가 천천히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일단은 모두 무사한 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