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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02화 (102/342)

Chapter 102 - 탈출.(3)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꿨다.

엄마랑, 아빠랑, 그리고 나랑.

셋이서 나들이를 가던 때의 꿈이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몸뚱이보다도 한참 작아서, 두 분의 손을 잡은 채로 공중에 매달릴 수 있을 정도였었지.

"보고 싶구나..."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절망을 느낀다면 조금 주책일까.

어치피 원래 세계로 돌아가더라도 나를 맞이할 사람 하나 없는데, 굳이 고통 받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어째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지.

멍청히 그런 생각을 하다가, 품에 안긴 아기를 꼭 껴안았다.

"...흔적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인가."

조금 묵직해진 무게감에 쓴 웃음을 짓는다.

바깥에서는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왕왕 들려오고 있었다.

할리벨, 엘리, 아이, 그리고 용사.

젖에 입술을 가져다대는 아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모르는구나."

지금까지 아가라고만 불러와서 그런지, 이름을 묻지 못했다.

여태껏 낳아온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준 적이 없기도 하고, 애초부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였다.

지금이라도 물어보는 편이 좋겠지.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마왕님. 몸은 괜찮으세요? 옆에서 이 망할 성녀가 어찌나 정신 사납게 굴던지, 참다가 화병 날 뻔 했다니까요!"

"당신도 마찬가지거든요?!"

정말이지,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구나.

"갑자기 왜 웃으세요?"

"아니, 그냥..."

대답을 얼버무린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는 책을 읽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니,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가 나를 향해왔다.

...뭐라고 운을 띄워야 할지 모르겠네.

"어머니."

"응, 아가. 혹시 옆에 앉아도 될까?"

"얼마든지요."

작은 몸뚱이가 꼼질거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살짝 비어있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니 아이의 체온으로 덥혀진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도, 어느새 책이 아닌 아기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아이에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아기가 신기하니?"

"...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낸다.

그렇게 뻗어낸 손가락을 아기에게 붙잡히니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되겠니?"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조금 슬픈 이야기였지만, 아이에게는 이미 이름이 있었으니 그것으로 불러주는 편이 더 낫겠지.

직접 낳았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 죽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응.

이 정도로도 충분히 괜찮으니까.

"리아드린."

"...리아드린."

"하지만, 오직 스승님만이 저를 린이라고 불렀어요."

린이라는 한 글자 애칭 속에 잠들어 있는 의미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저 그리움으로 젖은 눈빛과 재회를 원하는 표정 뿐.

그것만으로도 만족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한 애칭을 나에게도 알려줬으니, 단지 그것으로 족했다.

"린."

"...어머니."

어쩌다가 이렇게 됐더라.

고민을 해봐도 답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평생 동안 찾아다녀야 할 질문이 될 것이라는 건, 이미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어머니라는 세 글자가 가지고 있는 무게.

그것을 과연 내가 짊어질 수 있을까.

떠나보낸 두 아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내 이름은, 아리엘이란다."

잘 부탁해.

아이가 제 부모의 이름을 알게 되는 건 언제일까.

생각해 보면, 내가 부모님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인 것 같았다.

부모님의 이름은 그저 엄마랑 아빠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아리엘, 아리엘... 네, 기억했어요."

내 이름을 되뇌이며 방긋 웃어보이는게 어찌나 예쁘던지.

그 뒤에 이어진 건 기분 좋은 정적이었다.

서로 어떠한 대화도 하지 않았지만 그저 온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그런 침묵.

아이의 푹신한 머리카락이 내 팔을 간지럽힐 때 즈음에는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저리를 펴야 할 것 같은데."

품에 안긴 아기를 슬슬 흔들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들어올리니 얼굴에 흙먼지를 묻힌 용사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멀었느냐?"

"해가 지기 전까지 도착하는 건 무리야."

뺨 근처에 묻은 진갈색의 얼룩이 신경 쓰여 슬쩍 닦아낸다.

애도 아니고 뭘 그렇게 묻히고 다니는 거야.

더러워진 손으로 아기를 만질 수는 없어서 옷자락에 슥슥 닦아내니, 용사가 내 손목을 붙잡아 왔다.

"여기는 추우니까, 이쪽으로 와."

"...그래."

부드러운 손길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니, 작은 모닥불이 주변을 따뜻하게 밝히고 있었다.

"마왕님,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으로!"

모닥불 앞에 놓인 통나무 위에는 할리벨과 엘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처음 들렀던 마을에서도 이렇게 모닥불을 피워놓고 있었지.

물론 그때보다 크기가 훨씬 작기는 하지만.

"어때요, 괜찮지 않아요? 낭만도 있고, 마왕님도 있고! 그런 의미로 진~한 사랑의 키스 한 번ㅡ"

"그만 잠이나 자세요!"

공격적으로 입술을 내밀어 오는 할리벨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로막힌다.

순식간에 티격태격 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언제나 이렇게 평화로우면 좋을 텐데.

"조금 자두는 편이 좋을 거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상냥한 말투를 어색하다고 느끼기도 잠시, 슬쩍 시선을 피한다.

아기를 안고 있어서 그런지 어떻게 자야 할지를 모르겠어.

누워있자니 아기가 불편해 할 것 같고, 그렇다고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기에는 걸리는게 너무 많았다.

"아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내가ㅡ"

"아니."

친절은 나쁘지 않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너에게 양보하는 선은, 그리고 그 배려를 받아들이는 것은 여기가 한계니까.

비싸게 군다고 욕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기를 맡길 수는 없었다.

...이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자 미련이니까.

"아기는, 내가 데리고 있으마."

용사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집착.

아기를 건네지 않는다는 행동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주변에 자그마한 풀벌레만 울리는 그곳에서, 오직 나 혼자만이 잠들지 않았다.

점점 사그라드는 모닥불 안으로 장작 몇 개를 던져넣고는 한숨을 내뱉는다.

숨을 불어넣자 마치 살아움직이듯 일렁이는 불꽃이 작은 불티 하나를 남기고는 저 하늘 위로 제 몸을 태워댔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아리엘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깔끔하게 잘린 단면이 눈에 띄었다.

"정말, 네 뿔이 없다면 예전과 같은 관계가 되는 걸까."

품 안에 잠들어 있는 뿔을 만지작거린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심란해질 때 즈음이면 그녀의 뿔을 만지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너는 알까,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너로 인해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이상해졌는지.

"누워서 자도 되는데, 미련하기는."

얼굴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자, 세상 모르고 잠든 얼굴이 드러났다.

곤히 자고 있음에도 누군가에게 빼앗길세라 아기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애뜻했다.

이래서야 누가 아기인지도 모르겠네.

잠든 얼굴만 봐서는 평소와 완전히 다른 인상이었다.

언제나 인상을 쓰고, 멍하니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울 듯한 표정이었는데.

"어쩌면 정말 미쳐버린 걸지도 모르겠어."

이름이 같다고 절대 같은 사람이 아닐 텐데.

어째서 이렇게나 가슴이 시린 걸까.

감상에 젖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여정의 끝에서 마주한 기묘한 인연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었고.

그것도 아니라면, 동료들을 잃은 슬픔 때문일지도 모르지.

"이런 찝찝한 느낌 따위 원하지 않았어."

너를 쓰러뜨린다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줄만 알았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아름답고도 깔끔한 마무리가 될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결국 모든 것들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왕도로 향한다는 목표마저도 사라진다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

풀숲을 헤치며 다가오는 아이의 모습에 용사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런 용사를 본 아이가, 반쯤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를 쏘아붙이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아리엘을 빤히 바라보고, 신경질적으로 용사의 다리를 걷어찬다.

겨우 아이의 힘이었기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짜증 정도는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신."

"...응?"

"이름이 뭐죠?"

갑작스레 들려오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어서 대답하라는 듯이 노려보는 시선에, 용사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아서, 아서야."

하지만 그런 대답에도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당신의 애칭 따위를 알고 싶다는게 아니였어요."

"...아스테리아."

제 이름을 듣자마자 책을 펼치는 모습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쉰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와 함께 빼곡하게 채워진 한 면을 장식한 제 이름에 용사가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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