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3 - 탈출.(4)
눈가를 비추는 햇빛에 천천히 눈을 떠보면, 용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흐악..."
괴상한 소리를 내며 허겁지겁 떨어지기도 잠시, 품 안에 안긴 아기가 멀쩡한지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잘 자고 있구나.
잠을 자고 있을 때의 아기는 하나 같이 죽은 듯 자서 그런지, 볼때마다 심장이 덜컥였다.
"그나저나, 용사가 자고 있는 모습은 또 오랜만에 보는구나..."
내가 옆으로 비켜섰음에도 불구하고 용케 균형을 잡는다.
그 모양새가 신기해서 작게 감탄을 하고 있으면, 꿈틀거리던 눈꺼풀이 슬며시 들어올려졌다.
"일어났구나."
"...그래."
작은 기지개나 하품도 없이 조용히 일어난 용사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와줄까, 하다가도 품에 안긴 아이에 결국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양심이 쿡쿡 찔러왔지만, 상대는 그 용사라며 스스로를 설득시켜서 어떻게든 버텨냈다.
"이번에는 다음 마을까지 바로 갈 거야. 지금부터 출발하면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으응."
이곳의 지리는 전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모르고 있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댔다.
일단은 다른 녀석들을 깨우는 편이 우선이려나.
한대 뒤엉켜 있는 할리벨과 엘리를 톡톡 건드리니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어댔다.
"으헤으으으..."
"허, 허리가..."
땅바닥에 누워서 그냥 잤으니 당연히 허리가 아프겠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쪽은 그나마 편하게 잤다고 볼 수도 있을 터였다.
...용사의 어깨에 기대서 잤을 뿐이지만서도.
"아리엘 씨, 잘 주무셨나요?"
"간만에 푹 잤다."
다행이네요, 하며 둥글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감동스럽다.
교단에서의 일이 떠오를 때면 이렇게 얼굴만 보더라도 울렁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 사귄 친구 같은 존재라서 그런 걸까.
친구, 친구, 친구...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호칭을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보고는 마주 웃어줬다.
"치사해요! 저도 마왕님이랑 달콤한 아침 인사 할래요! 츄~♥"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뺨에 축축한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고개를 돌렸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다면 입술을 빼앗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뭔가 점점 더 적극적으로 변하는 것 같은데.'
괜한 불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부터 완전히 '저는 당신을 엄청나게 좋아해요~' 라고 광고하는 꼴이었으니까.
확실히, 지옥과도 같은 삶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던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동성이라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자, 이제 출발할 테니까 준비나 하거라."
"다, 다음에는 반드시 입술을ㅡ"
"빨리 타기나 하세요, 이 변태 서큐버스!!"
역시 할리벨이 상대라면 목소리 높이기를 주저하지 않는구나.
평소에는 조곤조곤 말하던 엘리도 할리벨에게 만큼은 또래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왁왁 소리를 쳐댄다.
저러다가 시선이 맞으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게 꽤 재미있었다.
"린, 린. 일어나렴, 린."
담요를 덮고 누워있는 아이를 슬슬 흔들어 깨운다.
곤히 잠든 아이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어 있었는데, 몇 번이고 흔들어서야 겨우 깨어날 기미가 보였다.
"으응, 으, 누구..."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촤르륵, 하고 펼쳐진 책과 함께 집중하는 모습에 웃음이 비죽비죽 흘러나갔다.
일어나자마자 책을 읽다니.
내 어렸을 적에는 상상도 못하던 버릇이네.
"자, 가자꾸나."
"네."
아이의 등을 톡톡 두드리니 꼬물꼬물 자리에서 일어난다.
뭔가 터치하면 움직이는 로봇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것마저도 귀여웠지만.
콩깍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란 자식이 어떤 모습을 보이던 전부 예뻐보이는 법이었다.
...비록 그게 반쪽짜리라고 해도.
"다 탔지?"
아이를 데리고 마차에 오르고 잠시.
마부석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앞쪽을 똑똑 두드렸다.
그에 맞춰 점점 속력을 내는 마차에 창 밖의 풍경이 슥슥 지나갔다.
'...그나저나, 저번에는 몰랐는데 조금 아프네.'
사실 조금이 아니라 꽤 아팠지만.
제대로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니면 역시 마차의 한계인지 모르겠지만 승차감이 아주 쓰레기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엉덩이를 마구 걷어차는 것 같달까.
나만 그런 건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다 똑같았다.
역시나.
"풍경은 좋네."
외진 길이기는 했지만 넓게 펼쳐진 녹색 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그보다, 조금 위험한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창 밖으로 보이는 까마득한 절벽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대로 떨어진다면 평범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이렇게 된 이상 노래라도 부르면서 갈까요?"
"노래라..."
별로 좋은 기억은 없었다.
반사적으로 떠오른 안 좋은 추억에 입을 꾹 다물자, 할리벨이 내 눈치를 보며 슬슬 시선을 피했다.
딱히 그 의견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건 아니었는데.
너무 눈치를 보면 오히려 이쪽에서 더 미안해진다.
아우우우우!!!
"우왓, 갑자기 무슨 울음 소리가..."
"소리를 들어보면 늑대인 것 같네요."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하울링에 할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해가 떠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둑어둑한 숲의 분위기가 한층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이렇게 생생한 늑대 울음 소리를 듣는 건 또 처음인데.
그렇게 늑대 울음 소리에 품에 안긴 아기가 울먹이는 것을 달래려던 순간이었다.
"...어."
별안간, 시야가 뒤집어졌다.
***
"아, 으..."
아파.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누군가가, 도와줘.
"...족...냄새...여야..."
"도와, 도와다오..."
힘이 풀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리가 부러져서 그런 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대롸 소리를 향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커다란 이명 뿐이었다.
..여기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켁, 흐으..."
하지만, 그런 애원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내 머리카락을 붙잡은 손길이, 그대로 팔을 들어올렸다.
주욱 따라 들어올려지는 고개 위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도와, 줘..."
차라리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았을까.
내 목덜미에 대고 냄새를 맡은 상대가, 별안간 소리를 질러댔다.
주변에서 울리는 발소리에 눈을 깜빡이니 어느새 사방이 꽉꽉 들어찼다.
"역시 이 년, 마족이잖아!"
"...아."
어째서인지 그 말 만큼은 확실하게 들렸다.
그건 목숨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아니면 상대의 목소리에 진한 혐오가 묻어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분명 뿔을 잘랐는데, 어떻게?
덜덜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진정할 수가 없었다.
살의가.
당장에라도 나를 찢어낼 듯한 진한 살의가ㅡ
"흐, 으으..."
철퍽, 하고 머리를 처박는다.
내 머리카락을 놓아버린 상대는 마치 짐승의 배설물을 만졌다는 듯 팔을 휘적이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몸이 움직이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끝이야? 정말로?'
시야가 어지럽게 물든다.
내가 팔을 위로 뻗고 있는 건지, 아래로 뻗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를 않았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무사할까?
린은? 그리고, 아기는?
"아가, 아가, 아..."
까무룩, 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 때 쯤이면 이미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주변의 소리조차 울렁거릴 정도가 되어서야 발버둥을 멈추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과연,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
***
잘 달리던 말들이 갑자기 공포에 질려서는 미쳐 날뛰었다.
어떻게든 고삐를 잡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짐승을 제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커다란 통나무가 날아와 마차에 직격하는 것과 동시에, 크고 작은 나무 파편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큭..."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른 끝에 겨우 멈춰선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용사가 서둘러 성검을 뽑아냈다.
예고에도 없던 기습이었지만, 머리가 조금 어지러운 것 빼고는 멀쩡했다.
"...다들, 괜찮아?"
"저, 저는 괜찮아요!"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 너머로 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가니, 하나 둘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엘리, 몽마, 아이, 그리고 아기까지.
바닥에 널브러져 앙앙 울고 있는 아기에게 손을 뻗다가도, 잠시 머뭇거린다.
'...무슨 말이라도 들을 테니까 잠시만, 잠시만 안을게.'
속으로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아기를 품에 안았다.
콜록 콜록 기침을 내뱉으며 다가오는 할리벨에게 용사가 물었다.
"...아리엘은?"
"...당신이랑 같이 있는거 아니었어요?"
되물어지는 답변에, 두 사람 모두 돌이 된 듯 바짝 굳어버렸다.
쿵, 하고 울리는 심장 소리가 마치 사신의 선고와도 같이 느껴졌다.
아리엘이, 없어.
"설마..."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 사이로 나뭇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방을 가득 채운 녹색들의 너머로, 까마득하게 펼쳐진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거짓말이지?"
"..."
할리벨이 주저앉았다.
남은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실감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