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8 - 탈출.(9)
"여기다냥."
작은 틈 사이로 길게 이어진 통로가 보였다.
라뇨리가 손짓을 하자 우거져 있던 수풀이 양 옆으로 비켜섰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법한 틈새에 용사가 표정을 찌푸렸다.
"이게 함정이 아니라는 증거는?"
"내, 내 목숨줄을 쥐고 있으면서 의심도 많다냥!"
인생을 살면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의심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심지어 상대는 마족이 아닌 수인인데!
과도한 불신이 대한 불쌍함을 가지기 전에, 그 정도가 지나쳐 경악하고 마는 것이었다.
"좋아, 믿어보지."
"...마음대로 하라냐."
믿으면 어떻고, 믿지 않으면 또 어떨까.
어차피 이곳이 마을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비좁은 틈 사이로 몸을 밀어넣자, 꼬리에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조, 조금은 살살 잡으라냥..."
이 인간, 힘 조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맷돼지 수인과도 좋은 승부를 벌일 수 있을 정도의 악력이었다.
하, 하마터면 꼬리뼈가 부러질 뻔 했다냥.
제 자랑 중 하나인 꼬리가 직각을 꺾이는 꼴은 볼 수 없었다.
"그래, 그 정도로만 잡으라냐."
슬쩍 힘을 조절하는 용사에 랴뇨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잡을 수 있었으면서 대체 왜 그런거냥.
하지만 선택을 한 건 자신이었으니 불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한당에게 꼬리를 내어준게 잘못이었으니까.
물론 그 불한당이 용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테지만 말이다.
"도착했다냥."
처음에는 엄청나게 비좁던 통로도, 조금씩 나아가니 점점 넓어졌다.
옷가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용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 곳에 숨겨져 있었다니...'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세계라.
천장을 수놓은 수많은 발광석은 마치 하나의 태양과도 같았다.
마을 하나 정도의 크기였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쪽에 낮과 밤이 뒤섞인 곳이 촌장님이 계시는 곳이다냥."
그리고 그곳에, 네가 찾던 마족이 있지냐.
발광석이 비추는 곳과 비추지 않는 곳의 경계.
랴뇨리가 그 중앙에 지어진 오두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구하고 사라져줬으면 좋겠는데냥.
마족 이야기를 하니까 꼬리뼈가 으스러져라 쥐는 손길이 무서웠다.
"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테니까 빨리 가기나 해라냐!"
이 녀석을 놓아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입막음을 할까.
그런 용사의 생각을 눈치챈 라뇨리가 펄쩍 펄쩍 뛰었다.
다른 녀석들에게 알릴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 안내하지도 않았겠지.
정말 이 녀석을 그냥 둬도 될까 싶었다.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한 정도로 은밀한 인간이었지만, 지금의 꼴을 보자니 마구 날뛸 것만 같았다.
'일단은 이 녀석이 중요한게 아니니까.'
빠르게 판단을 내린 용사가 손에 쥐여진 꼬리를 놓았다.
불한당의 손에서 자유를 되찾은 꼬리에 기쁨을 만끽하기도 잠시, 저 멀리 사라지는 인간의 등을 보며 라뇨리가 혀를 쯧쯧 찼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감히 촌장님께 덤벼들었다가는 그 마족을 구하고 뭐고 할 것 없이 순식간에 비명횡사할게 뻔했다.
그런데 어쩌겠냥.
그렇게 되면 그게 저 녀석의 팔자인 것을.
"...내가 뭘 걱정하고 있는 거냥. 알아서 잘 하겠지냐."
물론 상대가 용사인 것을 알았다면 다른 사람을 걱정했겠지만서도.
***
선혈이 흩날린다.
찢어지는 듯함 비명과 함께,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러니까, 응.
"...왔구나."
"당연하지."
용사의 품에 안겨서는 한숨을 내뱉었다.
속에서부터 치솟는 뜨거움에 머리가 어질어질 했지만, 왜인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분명 처음에는 끔찍할 정도로 싫었는데.
이 손이 겨우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켰더랬다.
그런데 지금은?
"...늦었어."
"...알고 있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팔을 들어서는 용사의 가슴팍을 내려친다.
구하러 올거면 더 빨리 오지 그랬어.
왜 지금에서야 온 건데?
물론 수인들의 아기를 강제로 낳기 전에는 왔으니 괜찮기는 했지만서도...
억지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런식으로라도 불평을 토해내야 상대와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가까워지는 건 질색이니까.
"설마 했는데, 당신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누구지?"
상대의 말에 용사가 갸웃했다.
이번 회차는 용사가 미코를 만나지 못한 회차였나?
바닥에 흩뿌려진 핏자국들 사이로 커다란 털뭉치 하나가 처량하게 떨어져 있었다.
꼬리가 아홉 개여야 구미호니 이제는 팔미호라고 불러야겠네.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며 용사의 옷깃을 꼭 붙잡았다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걸로 됐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와서 나를 습격한 이유가 무어냐?"
눈으로 보고도 질문을 하는구나.
당연히 나를 구하러 왔으니까 그렇지.
내가 아니면 제 소꿉친구를 되살릴 수 없으니까 필사적으로ㅡ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ㅡ필사, 적으로?
"...무, 뭐라는 거냐!"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있는 힘 없는 힘 다 짜내서 날린 일격이었건만, 용사에게는 그 어떠한 타격도 없는 듯 싶었다.
아니, 그보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방금 전에 용사가 내뱉었던 말을 멍청히 되새김질 한다.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
미친 걸까, 진심으로.
나든 용사든, 분명 누구 하나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딴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올 리가 없었으니까.
어쩌면, 수인들의 괴롭힘 때문에 귀나 뇌 중 어느 한 곳이 망가졌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푸, 푸흐... 푸하하하하하!!!!"
용사의 말이 꽤나 우스웠는지, 여우 수인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고상한 척 분위기를 잡던 행동들은 싹 다 내버리고, 아주 경박하게 몸을 뒤틀어대고 있었다.
재밌겠지.
듣는 나도 이렇게나 유쾌해 죽어버리고 싶을 지경인데.
"요, 용사가, 마족을 사랑하는 꼴이라니! 살다 살다 이런 농담은 처음 들어보는구나!"
그녀의 말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사이에 참 많이도 몰려들었구나.
누기 반쯤은 짐승 아니랄까봐, 냄새를 맡고 몰려오는 꼴이 참 그짝이었다.
"그래서, 무슨 이유로 우리들을 습격했지?"
"당연히 그쪽의 마족을 마을로 데려오기 위해서지, 무엇이겠느냐."
"...왜 아리엘을ㅡ"
"당신도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 죽은 이들을 되살리기 위한 모체인데, 가져오지 않는게 이상하지. 안 그런가?"
굳어져 있던 분위기가 더더욱 경직된다.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린 용사가, 이내 표정을 구겼다.
"그 입 닥쳐."
"누가 닥치게 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저 미소는 제 구역이라는 것에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아니면 용사와 일 대 일로 맞붙을 수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ㅡ
"흑, 켁, 케헥... 흑..."
"아리엘?!"
목이 조여진다.
내 목덜미를 둥글게 감싸고 있던 부적들이, 나를 죽일 기세로 맹렬히 수축하고 있었다.
"이제야 네 녀석의 처지를 좀 알겠느냐?"
기분 나쁜 미소였다.
용사는 그런 미소를
설마 하니 내가 인질로 잡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용사에게 나라는 인질이 효과가 있을 줄 몰랐다.
"하지만, 나도 그녀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우리 협상을 하는게 어떠겠느냐?"
"협상이라니 무슨..."
"간단한 이야기다. 우리가 잃은 동족들을 전부 낳으면, 멀쩡히 돌려보내주도록 하마."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마족들에게 희생당한 이들이 도대체 몇이나 될 줄 알고?
하지만 이건 내 양심을 시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죽은 이들을 전부 낳겠다고 한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발끈해서는 성검을 들어올리는 용사의 손을 꾹 쥔다.
"...아니, 그 말대로 하마."
"아리엘!"
"대신."
대신, 교합을 나눌 상대는 내가 직접 정하게 해주거라.
당연하게 요구해야 할 권리였다.
혹여나 제 동족들이 임신시키지 않으면 인정하지 못한다 어쩐다 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기에 내뱉은 이야기였다.
용사의 충격받은 얼굴이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뭘 그리 충격 받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냐. 설마ㅡ"
"..."
ㅡ내가, 너 말고 다른 사람과 몸을 섞을 것 같아서 불안한 건가?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용사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가까이 붙어있어서 그런지 쿵쾅거리며 내달리는 심장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 말 한 마디에 왜 그렇게 흥분했을까.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용사가 나를...'
머릿속에서 떠오르려는 생각을 순식간에 지워내며 여우 수인을 바라봤다.
어서 대답이나 해.
"그래, 좋다. 내 꽤 심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으니 그 정도는 받으들이도록 하마. 그리고ㅡ"
"...읏."
"여자의 생명은 얼굴이라고 하지?"
기분 나빠.
벌겋게 달아오른 화상 자국이 사라진 건 좋은 일이었지만, 신성력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꽤나 마이너스인 치료였다.
심지어 내 얼굴을 그런 꼴로 만들어 놓은 건 봄인들이면서, 치료해줬으니 고마워하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상당히 역겨웠다.
동물들은 전부 순수하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자."
"하지만, 아리엘..."
"...제발."
주변의 시선이 무서워 용사의 품에 머리를 처박았다.
증오와 경멸이 섞인 시선들이 마치 칼날처럼 내 심장을 난도질 해대고 있었다.
어서, 빨리.
더 이상은, 이곳에 있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