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9 - 탈출.(10)
"...여기에서 지내고 있던 거야?"
"지내고 있었다기 보다는, 가둬져 있었다는게 맞겠지."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방 안에 용사를 들였다.
딱히 내 물건이라고 말할 것들도 없었지만, 그나마 쓸만한 것들은 이미 사용인들의 손에 망가진 채였다.
더워진 방 안을 치우고, 또 치워도 원상복구 되는 꼴이 질려 청소를 포기한지도 한참이었다.
분명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참 오래도 있던 것 같았다.
"내 이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해다오."
엘리는, 할리벨은, 아이는, 그리고 아기는.
전부 무사한거겠지?
간절함을 담아 묻는다.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멀쩡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다들 무사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따지고 보자면 나 때문에 그런 꼴을 당한 거였으니까.
나 때문에.
"그러면, 다들 어디에 있는 거지?"
물론 이곳으로 오지 않는 편이 더 나았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으니 용사의 얼굴이 푸르게 질렸다.
"...설마, 거기에 그대로 두고 온 건 아니겠지?"
"..."
아니겠지.
그 넷만 숲에다가 달랑 버려놓고 나를 찾으러 오지는 않았겠지.
생각이라는게 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겠지!
"미친 거냐? 미친 건가?! 아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소리를 치며 어깨를 마구 두드린다.
나를 구하러 온게 잘못됐다는게 아니야.
그런데, 최소한 애들은 안전한 곳에 두고 와야지!
"미, 미안, 미안해..."
"왜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는데? 내가 아니라 그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해야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그런지 말이 막 튀어나갔다.
멍청한 놈. 쓰레기. 병신. 나가 죽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베개로 용사의 얼굴을 후려치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터져나왔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흰 깃털들 사이로 거친 숨결이 스며들었다.
"죽어버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잔뜩 곪은 상처 하나가 톡, 하고 터졌다.
그 아이들 먼저 신경 쓰지, 왜 앞뒤 안가리고 나부터 찾으러 온 건데?
물론 이게 억지라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걱정이 되는 걸 어떻게 해.
성녀와 서큐버스, 아이 하나에 아기 하나라는 조합이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아무런 조치도 없이' '무책임하게' 그냥 두고 온거지?"
"에, 엘리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꽤나 확신하고 있구나."
그래, 그래도 엘리와 오랫동안 같이 다녔으니 그녀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고 있을 터였다.
솔직히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용사 파티기는 했으니까.
...괜찮겠지.
오하려 너무 불안해 하면 실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아이도, 몸은 어리다고는 하지만 에밀리의 스승이니까."
"애라는 사실은 변함 없지 않느냐."
"정신은 어른이잖아."
그런가?
더 대화를 나눴다가는 설득 당할 것만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니까.
"정말 그 녀석 말대로 할 거야?"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 목에 붙어있는 부적쪼가리 하나 때문에,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용사가 아무리 검을 잘 다룬다고 해도 정확하게 부적만 잘라낼 수 있을까.
상상을 하니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미래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곳에서 몸을 섞고 싶지는 않았다.
깔끔을 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글쎄.
여기서는 눕고 싶지조차 않았다.
"일단 치우자꾸나."
바닥을 굴러다니는 깃털을 걷어차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원래도 더러웠던 방이었는데 이제는 돼지 우리처럼 변해버렸다.
몸을 구부려 천천히 손을 움직이니 용사가 거들어줬다.
...왜 이렇게 처량하지, 나.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
아리엘의 걱정과는 다르게, 나머지 일행들은 잘 지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듯 꽤나 그럴 듯하게 움직이는 엘리.
거기에 마족의 육체와 마법사의 두뇌가 합쳐지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마왕님..."
하지만 나쁘지 않다는게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찔할 정도로 가파르게 깎여진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본 할리벨이 눈을 꾹 감았다.
나무가 우거져 있으니 죽거나 그러시지는 않았을 거야.
심지어 마왕님은 마족인걸?
인간들과는 다르게 강인한 신체를 가졌으니까ㅡ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불안해지잖아, 으.."
부정적인 생각 하지 말자.
부정적인 생각 하지 말자.
언제나 그랬잖아.
힘들 때면 그러려니 넘어가라고.
오히려 좋은 생각을 하며 버텨내라고.
인간들의 사창가에서도 그렇게 지내왔으니까.
"그렇게 걱정되시면, 찾으러 가시죠."
"...깜짝이야."
제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할리벨이 몸을 움찔거렸다.
이 꼬맹이, 다닐 때는 인기척 좀 내고 다니라니까...
분명 같은 몽마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당최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마법사라고 했는데, 설마 마법일까.
린의 정수리를 톡톡 두들기며 표정을 찌푸린다.
그보다, 방금 얘가 뭐라고 말했었지?
"걱정되면 찾으러 가자니, 마왕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아는 거야?"
"어머니의 위치는 모르지만, 용사의 위치는 알 수 있어요."
그 남자에게 위치 추적 마법을 걸어놨거든요.
완벽하지 못한 몸 상태로 마법을 사용해서 그런지 조금 애매하게 걸리기는 했지만...
가느다랗게 연결되어 있는 마력의 실을 흘끔거리며 할리벨의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숲에서의 노숙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이미 엘리 씨에게는 이야기를 드렸어요. 지금쯤이면 준비가 다 끝나셨을 테니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전위를 맡을 마족에, 화력을 책임질 마법사.
그리고 회복이 가능한 성녀까지.
실상은 서큐버스와 어린아이, 여신이 깃들까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성녀의 조합이었지만 대층 구색 정도는 갖출 수 있을 터였다.
"아, 준비는 다 끝났어요!"
성녀ㅡ 이제는 성녀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교단의 신관복을 벗어던진 엘리는 성녀라기 보다는 천진난만한 시골 처녀에 가까웠다.
아니, 자라온 환경이나 정신 상태를 보자면 철부지 귀족 영애 정도 되겠지.
등에 커다란 가방을 지고, 한 팔로는 아기를 품에 안은 채로 손을 마구 흔든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마왕님을 찾으러 간다고 하니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으음, 으으으음..."
"왜, 문제라도 있어?"
그렇게 린의 안내를 받아 용사를 찾아가가기 직전, 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할리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린이 곤란하다는 듯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절벽 아래에 있어요."
"? 그게 왜? 내려가면 되잖아."
"...마법을 너무 애매하게 썼는지 직선 경로만 알려주는게 문제죠."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직선 경로라고 한다면 뛰어내리는 수 밖에 없겠지.
그 사실을 떠올린 할리벨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맨몸을 내려가는 건 물론, 밧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수직으로 내려가는 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 나 고소공포증 있단 말이야!"
"그러면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도록 하죠."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해도, 떨어져 죽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계속 떨어져 죽는다, 떨어져 죽는다, 이야기를 하니 진짜로 떨어지신 어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몸도 약하신 분인데 정말 어디가 잘못 됐다거나 하셨으면 어떻게 하지?
"...서두르죠."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물론 어린아이의 몸으로 빨리 걸어봤자 자박자박 걷던게 뽈뽈거려댈 뿐이었다.
옆에서 나란히 걷던 할리벨이 그 모습을 보며 비죽비죽 웃음을 내뱉었다.
"업혀, 꼬맹이."
"...싫은데요."
칼 같은 거절에 표정을 와락 찌푸린다.
기껏 마음 써서 한 소리였는데 얘가 왜 이런데?
억지로라도 등에 업으려고 했더니 조막만한 주먹이 허벅지를 마구 내려쳤다.
주먹에 담겨 있는 짜증 가득한 감정이 아팠다.
"아, 진짜!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애 취급하지 마세요."
린이 마법사가 된 뒤로 가장 처음 배운 것이 바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절대 외형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빨리, 그리고 확실하게 배울 수 밖에 없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자면, 지금의 자신보다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수염 난 노인 모습의 마법사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도 있었더랬다.
다 늙은 노인이 소녀도 아닌 유녀에게 누님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지금 떠올려도 충격적이었다.
"해가 지면 이상한 것들이 나올지도 모른다니까? 빨리 움직이려면 차라리 나한테 업히는 편이 낫다고!"
"...그래도 당신 등에 업히는 건 조금."
할리벨의 등에 업혀 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절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자신을 업으며 보여주는 잔뜩 뻗대는 얼굴이 마음에 안들어서ㅡ
ㅡ랄까.
"당신이 엉덩이를 조물거려서 싫어요."
"조, 조물거리다니 누, 누가?!"
"당신이요."
잔뜩 당황하는 할리벨에 린이 싸늘하게 답했다.
아이가 쏘아내는 경멸과 혐오의 눈빛은 그 자체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할리벨은 단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미안."
물론, 작은 사과는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