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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10화 (110/342)

Chapter 110 - 탈출.(11)

"그리고, 당신이 저를 업으면 당장 전투는 어느 누가 하나요."

말은 물음이었지만 말투가 물음이 아니었다.

확정하고 말하는 듯한 말.

한심함을 가득 담은 눈빛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마법사들은 눈빛도 실체화 시킬 수 있다거나 그런 거야?"

"지금 건 딱히 실체화 시킨게 아닌데요."

할 수 있다는 뜻이구나.

고개를 까딱거리는 아이에 할리벨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투라면 제가 할게요!"

"...네가?"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엘리에 고개를 갸웃한다.

이 녀석이 전투.

이 녀석이 전투라...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분명 용사 일행 중 하나라고 하지만, 뭔가 믿음이 가지를 않았다.

"싸울 수 있기는 해? 성녀라면서."

"성녀라도 싸울 수 있는데요?"

엘리가 굳은 살 하나 박히지 않은 손을 꼭 쥐며 할리벨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저런 손으로 대체 뭘 하겠다고.

물온 자신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이쪽은 마족이고 저쪽은 인간이었다.

애초에 기본적인 스펙부터 다르다고, 스펙부터.

"그래, 일단 알아서 해. 대신 위험해진다 싶으면 바로 끼어들 테니까."

꼬맹아, 업혀.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는 린을 업어든 할리벨이 손 한 가득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입가를 씰룩였다.

어린아이의 감촉.

소아성애자는 아니었지만, 어른스러운 아이의 애 같은 모습을 보는게 최근 그녀의 즐거움이었다.

"자, 출발 출발~"

미묘라게 늘어지는 기합과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

길게 이어진 절벽은 대체 어디로 내려가야 할지 모를 정도로 길었다.

걸어갈수록 고저차가 낮아지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기에 다람쥐가!"

"..애냐고, 무슨."

고양이가! 강아지가! 새가!

지나가면서 보이는 모든 동물들을 바라보며 소리쳐댄다.

숲 너머로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한숨을 픽 내쉬었다.

마왕님을 찾으러 간다는 소리가 그렇게 좋았으려나.

'단순해서 부럽네.'

누구는 매일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는데.

사랑하는 마왕님의 얼굴을 떠올린다.

나를 구해주신 분.

그리고 언제 사라질지 모를 정도로 희미하신 분.

하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닐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앗, 저기 마수가!"

"너, 조금 조용히 좀 해주지 않을ㅡ"

성녀의 외침에 신경질이 난 할리벨이 짜등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외치려고 했다.

저 멀리에서 보이는 마수가 아니었다면.

"야, 너 미쳤어? 저게 여기로 오면 어쩌려고 소리를 그렇게 빽빽 질러?!"

"그, 그치만..."

마족들은 마수를 다룰 수 있는거 아니었나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의 모습에, 할리벨이 표정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온지 모르겠는데.

"누가 그렇게 말하든, 응?"

빨리 이쪽으로 오기나 해!

어벙하게 서있는 꼴에 손을 잡아끌며 자리를 옮겼다.

"아니, 그러면 지금까지 마족들과 마수들이 같이 움직인 건..."

"마수들을 길들이는 녀석들은 있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거든? 아니 그보다, 애초에 저 녀석들에게 마수라는 이름을 붙인 건 대체 누구야?"

마족들이 마수라고 불리는 개체들은 따로 있었다.

애초에 마계에서 나고 자라는 야수들을 마수라고 부르는데, 이 세계에 있는 것을 마수라고 부를 이유가 없었다.

인간 중 하나가 마수, 마수 하고 부르다 보니 그렇게 굳어진 듯 싶었다.

"아니, 그러면 저건 대체..."

"몰라. 그냥 부르던대로 계속 마수라고 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길목을 저 녀석이 막고 있다는 것이었지.

"...유인해야 하나?"

그렇다면 누군가가 희생양을 자처해야 할 텐데, 딱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성녀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꼬맹이는ㅡ

저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어봐야 자신이 빠르게 걷는 것보다도 한참 느릴 터였다.

그렇다고 내가 하기는 또 싫었고.

"그러면 쓰러뜨린다던지..."

이쪽도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선택지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지금 보면 저 자리에서 딱히 움직일 것 같지도 않은데.

시간을 허비하면 허비할수록 마왕님의 생존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 터였다.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말해봐."

"저 마수를 쓰러뜨리고 가는 거에요."

자신감 있는 건 좋았지만,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래, 용사 일행이었다는 건 인정해.

그렇다고 이 녀석이 잘 싸울 것 같다, 하면 또 그건 조금...

"진짜 진지하게 하는 질문인데, 정말 싸울 수 있는거 맞지?"

"물론이죠!"

품에서 작은 날붙이를 꺼내든 엘리가 방긋 웃어보였다.

저걸 지금 무기라고 꺼낸 걸까.

마수는 커녕 인간 하나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 크기의 단검에 할리벨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원래라면 타인에게 폭력을 쓰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의 저는 성녀가 아니니까요."

신을 모시는 성직자가 되어서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는 건 언어도단.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간단한 방법이 바로 폭력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지금의 앨리는 성녀가 아닌 그냥 엘리.

그 말은, 마음껏 나설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용사님께도 인정 받은 실력을 보여드릴 테니까요!"

"...그래."

목숨을 버리는 선택인 것 같은데.

할리벨이 한숨을 토해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방 안을 깔끔하게 치운 다음에야 뭘 하지 않겠느냐.

그 한 마디에 빠른 속도로 청소를 마친 뒤의 일이었다.

"...조금은 지치는구나."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은 아리엘에, 용사가 마른침을 내뱉었다.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반사적으로 시선을 빼앗긴다.

지친 듯 반쯤 감긴 눈에서 나오는 피곤함마저도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보였다.

"왜 그렇게 빤히 바라보느냐?"

"아니, 그냥..."

스스로의 마음을 자각하고 난 뒤가 문제였다.

상대가 무엇을 하던지 시선이 따라간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찾으려 하고, 괜히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마음에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이런 꼴이 되어서야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쁘구나, 싶어서."

"..."

갑작스레 내뱉어진 말에 아리엘의 몸이 바짝 굳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용사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미친놈,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수습을 하기에는 이미 늦어도 한참이나 늦어버렸다.

"뭐, 그래. 응,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화를 내야 하나 아니면 경멸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한 눈빛 사이로 작은 웅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당황한 건 자신 뿐만이 아니었는지, 그 새하얗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표정은 또 처음이라, 말문이 막혔다.

"목에 그건,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잘 모르겠어."

축 늘어진 눈썹 사이로 동글동글하게 변한 말투가 귓가에 울렸다.

버림 받은 고양이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린 아리엘은, 평소의 딱딱함을 전부 버린 채였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만큼 고됐다는 뜻이겠지.

"성검으로 잘라내는 건 어떻게 안되ㅡ 켁, 크흣..."

작게 발광하며 목을 조여오는 부적에 기침을 토해낸다.

아무래도 부적을 때어내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작동하는 형식인 것 같았다.

바닥에 머리를 묻고는 고통에 바르작거리는 아리엘을 품에 안은 용사가, 이를 득득 갈았다.

"괜찮아?"

"...전혀."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니 끈적한 식은땀이 잔뜩 달라붙어왔다.

어째서 네가 이런 짓을 당해야 하는 걸까.

내가 저지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할 정도로 고통 받았는데, 대체 왜.

"그 여우 수인이 모시고 있는 신이라는 작자가, 아무래도 여신인 것 같구나."

이 부적은 여신의 힘을 빌려서 작동하는 것 같고.

아리엘의 말에 용사가 표정을 찌푸렸다.

여신.

그 가증스러운 이름을 되새긴다.

자신을 부추기고, 저주를 걸어서 아리엘을 범하게 만든 장본인.

그런 존재가 또 다시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오다니.

"이걸로는 어떻게 안 될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용사가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자그마한 뿔에, 아리엘이 표정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뿔이 잘릴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싶었다.

"마족의 뿔에는 저주를 해제하는 힘이 있으니까, 부적을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몰라."

"...한 번 시도는 해보자꾸나."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뿔을 가져다 댄다.

그렇게 잠시.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른 부적에 용사가 한숨을 토해냈다.

결국은 그 여우 수인의 말에 따르는게 최선인 걸까.

"일단은 다른 수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지."

"..."

동족들을 전부 낳으면 돌여보내 준다고 했던가.

어처구니가 없는 조건이었지만, 지금은 그 말에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감히 어떻데 그녀의 몸에 손을 댄다는 말인가.

"솔직히 너와 몸을 섞는 건 여전히 싫지만ㅡ"

"..."

"ㅡ그래도, 다른 녀석들에게 강제로 범해지는 것보다는, 낫겠지."

체념 섞인 말이었다.

이미 자신을 강제로 범하고, 그 일을 후회하고 있는 존재와 함께하는 것이 처음 만나는 녀석에게 범해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그런.

그런 아리엘을 향해 손을 뻗은 용사가, 천천히 그 자그마한 몸을 품에 안았다.

"미안, 미안해..."

"...알았으면 됐다."

그 말이 어찌나 아프던지, 용사는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죄악을 과연 씻어낼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의 죄악이 준 상처를 덮어낼 정도로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물든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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