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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16화 (116/342)

Chapter 116 - 탈출.(17)

기껏 내려왔던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니.

사방이 풀과 나무들 뿐인 풍경에 혀를 쯧쯧 차댄다.

등에는 꼬맹이, 품에는 아기.

물론 별로 무겁지는 않았지만 짐덩이를 지고 다닌다는 건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꼬맹아,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건데?"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등에 매달린 아이의 옆구리를 쿡쿡 쑤시니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무래도 집중을 방해한 듯 싶었다.

잠시 기다리며 할 것도 없었기에, 할리벨은 제 품 안에 안긴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

딱히 떠오르는 인간은 없는데.

"이렇게 된거 일단 쉬었다 가죠!"

마수의 피를 잔뜩 묻힌 성녀가 해맑게 외쳤다.

겉모습과 말투의 괴리감이 상당해서 그런지 뭔가 무서웠다.

확실히 그 움직임이라면 자신 있을 법도 했네.

성녀가 마수를 썰어내던 광경을 되새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어땠어요?"

"...어땠냐니, 뭐가?"

상대의 물음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했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마족이 성녀를 칭찬하다니, 할까 보냐.

들러붙는걸 밀어내니 입을 비죽 내밀어댔다.

"너무해요!"

"너무한 건 네가 더 너무해. 피 묻으니까 조금 떨어져 줄래?"

시무룩해진 성녀가 타박타박 걸음을 옮겨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았다.

그래, 이제야 좀 낫네.

그래도 저렇게 그냥 두기에는 양심이 찔려서 닦을만한 천 정도는 던져줬다.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 기분 나빴지만.

"...찾았어요."

앉아있던 아이가 소리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 멍해보이는 모습에 슬쩍 이마를 찌르니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화는 내는데 정작 손을 쳐내지는 않는구나.

그 점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아이를 등에 업었다.

군말 없이 업히는 모습에 괜히 키득거렸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는데?"

"...여기보다 더 아래에 있어요."

린의 손가락이 땅바닥을 가리켰다.

지하.

저 깊숙한 곳에 용사가, 그리고 마왕님이 있다.

이번에는 제가 구해드릴 차례에요.

할리벨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키에에에에에엑!!!!!!"

"저, 저건 또 어디서 나온 거야?!"

옆 풀숲에서 튀어나온 마수의 모습에 할리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도 오랜만이지만, 저딴 괴상한 생명체를 눈에 담는다는 것부터 타격이 상당했다.

일단 도망가야 해.

또 성녀가 처리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무래도 조금 지친 것 같았으니까.

"도망치죠!"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더욱 빨랐다.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촉수들을 피하며 할리벨이 이를 갈았다.

어째 이쪽을 더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슬쩍 뒤를 바라보니 마수의 아가리가 쩌억 벌어져 있었다.

이런 미친.

흉측한 꼴에 기가 질려서는 그대로 속도를 높였다.

"꼬맹이, 아직 길 못 찾았어?!"

"조, 조금만 더 직진하시면 돼요..."

아이의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조금씩 헛구역질도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멀미가 난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라니, 얼마나 조금만 더?

때 아닌 소란에 아기가 잠에서 깨어나 앙앙 울기 시작했다.

숨이 차고, 귀가 아프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몽마로 태어나 이토록 필사적으로 달려본 적이 있었던가.

"서큐버스는 절대 천박하게 뛰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8자 걸음으로 우아하게 걸어야 하는데!"

"소리 지를 시간에 속도나 높이세요."

무미건조한 타박에 울컥했지만, 등 뒤에 매달린 꼬맹이를 내던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 길 안내를 하고 있기는 했으니까.

가도 가도 풀과 나무만 보인다는게 불안 요소이기는 했지만.

"저쪽 풀숲 안에 지하로 통하는 통로가 있어요."

"...진짜지?"

"제 목숨도 달린 일인데, 설마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앞서가는 엘리를 향해 할리벨이 외쳤다.

거기 풀숲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

대답도 없이 녹색으로 가득 찬 곳에 몸을 던진 엘리가 어서 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기 받아, 아기!"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법한 틈.

먼저 들어간 엘리에게 아기를 건넨 할리벨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몸을 날렸다.

조, 조금만 늦었으면 분명 죽었어.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등 뒤에 매달린 꼬맹이가 잘 살아있는지 확인한다.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기는 해도,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다.

"...설마 안쪽까지 쫒아오지는 않겠죠?"

"에이, 이렇게 좁은데 설마ㅡ"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길다란 주둥이가 틈 사이를 파고 들었다.

제 허벅지 근처까지 파고든 마수의 이빨에 할리벨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일은 알아서 생각하고."

버둥거리며 틈새를 넓히는 마수를 뒤로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것을 보니, 저 작은 틈새만 뚫어낸다면 마수 또한 손쉽게 침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일단은 마왕님을 구한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뒤쪽의 저 혐오스러운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표정이 왜 그래?"

"아니, 그게...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나서요..."

킁, 하고 코를 울린 엘리가 표정을 찡그렸다.

익숙한 냄새.

언젠가 신전에서 자주 맡았던 향.

저 멀리 등 뒤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속이 안 좋아졌다.

"아니, 그럴 리는 없겠죠..."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눈앞의 빛을 향해 몸을 날린다.

일단은, 아리엘 씨를 구하는게 우선이었다.

***

벨에게 행복이란 영원히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이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을 잃은 날 이후로는 꿈조차 꿀 수 없은 환상과도 같은, 머나먼 무언가.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마족이라는 예상 외의 존재와 함께, 부모님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리 한참이고 작아진 채였지만 분명 부모님이 맞았다.

'이제 언제까지고 함께야...'

더 이상 마족도, 그리고 다른 동족들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지쳤으니, 이제는 행복에 젖어들고 싶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죽상이던 녀석이, 오늘은 웃고 있네?"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를 집에 틀어박히게 만들었던 망나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너무 부모님의 체취에 취한 나머지, 저 빌어먹을 녀석의 냄새를 맡지 못해버렸다.

...도망칠까?

하지만 무턱대고 도망친다면 의심을 가지고 쫒아올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도망치지 않으면?

어떤 선택지던지 별로 내키지 않은게 사실이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아니, 언제나 얼굴 구기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표정을 피고 있으면 그 누구라도 궁금하지 않겠어?"

이 녀석의 앞이라면 언제나 움츠러든다.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품에 잠든 날붙이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가까이 오기만 한다면 그 얼굴에 칼날을 들이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아기들 정 하나를 품에서 떼어놓아야만 했다.

'...그건, 절대 안 돼.'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다가오는 걸음에 맞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동족이란게 대체 뭔데.

이딴 놈들을 가만히 놓아두는게 동족들 간의 의리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또 어디서 훔쳐온 아기냐?"

"...훔쳐온거 아니야."

훔친게 아니라, 정당하게 돌려받은 것이었다.

아리엘 씨도 허락해 주셨는걸.

마지막으로 보았던 눈빛이 슬픔으로 젖어있기는 했지만, 분명 고개를 끄덕이셨단 말이야.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 때문에 억지로 부모님을 주신거라면 또 어떨까.

그도 그럴게, 본인이 직접 낳은 아기잖아.

내 부모님이지만 아리엘 씨가 배 아파서 낳은 아기잖아.

부모님께 태어난 나조차도 이렇게나 슬프고 기쁜데, 부모님을 낳은 아리엘 씨는 얼마나 더 아프고 슬플까.

잠시간의 짙은 죄책감에, 벨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그 시간은, 상대가 아기를 낚아채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너랑 빌어먹을 정도로 닮은 아기잖아?"

"도, 돌려줘!!"

빌어먹을 새끼에게 붙잡힌 아기가 앙앙 울음을 터뜨렸다.

팔을 뻗어 붙잡으려고 했지만, 녀석은 더더욱 팔을 들어올릴 뿐이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이제야 겨우 되찾았는데, 왜 또 나를 괴롭히는 거야?!

"그렇게 해서 닿겠냐? 조금 더 뻗어보라고!"

"...버려."

"...응?"

"죽어버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동족들에게 쫒기는 삶을 보내게 된다고 하더라도, 눈앞의 녀석 만큼은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뽑혀진 날붙이가 상대의 목줄기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분명 이대로만 간다면 저 두꺼운 목을 찢고 아기를 돌려받을 수 있겠지.

"...!!"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상대가 막았다던지, 피했다던지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애초에 목에 닿지 않았다.

아니, 목에 닿을 수가 없었다.

상대의 목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으니까.

와득, 와드득, 와득!!!

"힉..."

소름끼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양아치의 머리통을 뼈 째로 씹어먹은 마수가 그 아가리에서 침을 뚝뚝 흘려대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기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키에에에에엑!!!!"

"...큿."

도망칠 수 없어.

남은 방법은 다른 동족들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 뿐이었다.

부디,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기를.

벨이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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