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7 - 탈출.(18)
[마을에 마수가 나타났다는데?]
[마수가 대체 어떻게 이 마을에ㅡ]
[뭐, 뻔한거 아니겠어? 저 안쪽에 있는 마족 짓이겠지.]
"...설마."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표정이 굳었다.
마수가 나타났다고? 갑자기 왜?
쿵쿵거리며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내 심장을 위협해대기 시작했다.
"여기는 내가 막고 있을게, 일단 도망쳐."
"...용사."
이를 악물었다가, 창문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목에 붙어있는 부적이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그 여우 수인의 귀에는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따로 하고 있는 일이 있다던지.
"죽지마, 절대로."
"응."
마지막 확답을 듣고는 빠르게 몸을 날렸다.
창문틀을 넘어 바닥에 내려설 때는 다리를 삐끗할 뻔 했지만, 어떻게든 착지하는데 성공했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지?
뛰고 있기는 했지만, 목에 걸려있는 족쇄 때문에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 여우 수인을 만나서 오해를 푸는 편이 가장 나을지도 모를 터였다.
"아..."
"키에에에에엑..."
하지만, 이런 경우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쓰러져 있는 벨의 옆에 마수가 아가리를 벌리고 서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앙앙 울고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구나.
속이 울렁였다.
"대체, 대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차라리 나 혼자면 불행하다면 몰라, 왜 주변 사람들까지...
마수의 주둥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도망치지 않으면 죽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경고에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키야아아아악?!?!!"
거대한 폭풍이, 마수의 몸체를 갈기갈기 찢어냈다.
짧은 울음 소리를 끝으로 넝마가 되어버린 고깃덩이의 옆으로 여우 수인이 내려섰다.
두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내가 이 녀석들 부리고 있는게 아니라고.
너도 눈이 있다면 알 수 있잖아, 응?
하지만 그런 내 생각에도 불구하고 목을 두른 부적은 실시간으로 그 크기를 줄여오고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흑, 크흣..."
"동족을 해치고는 몰래 도망치려고까지 해?!"
여우 수인의 외침에 주변의 공기가 일변했다.
분노로 휩쌓인 그 목소리는 마치 우레와 같아, 듣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이 들게 할 정도였다.
"내가, 큿... 한게 아니야..."
"거짓말 마라. 분명 네 년이 마수를 조종해서 저 가여운 아이를 해친거겠지!"
그런 것 따위 할 줄 몰라, 모른다고!
목을 조여오는 부적에 바닥을 긁어내렸다.
애초에, 이딴 걸 달고 그런 짓을 할 리도 없잖아.
숨을 쉴 수가 없으니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정말, 죽일 생각이야...'
강제로 아기를 낳게 하는 것보다는 동족을 해친 것에 대한 복수가 우선인 듯 싶었다.
하지만 그 복수를 대체 왜 내가 당해야 하는 걸까.
아이가, 벨이 저렇세 되어서 슬픈 건 나 또한 마찬가지인데.
이토록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운데, 왜 내가.
"끔찍하게 죽여주마. 아이가 겪은 것 그 이상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지."
"흑, 아으..."
신성력이 타오른다.
내 몸속에 잠들어 있던 여신의 잔재가, 여우 수인의 분노에 따라 뾰족한 창이 되었다.
찌르고, 찌르고, 계속해서 찔러오는 고통에 마른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하고 내뱉어지는 핏덩이가 바닥을 적셨다.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에 가까운 덩어리를 보니 구역질이 솟아올랐다.
"그만, 그만..."
이제 그만해.
아프단 말이야.
아파서, 죽을 것 같으니까.
제발.
빌고, 애원하고, 부탁했다.
하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심혀져 갈 뿐이었지.
"마왕님!!"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구원은 있었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할리벨이 팔을 휘두르자, 여우 수인이 저 멀리 밀려났다.
"마왕이라니, 설마... 푸, 푸하하하하!!!"
"..."
"그러면, 더더욱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구나."
"켁..."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목을 조여온다.
고통을 주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순식간에 다가오는 죽음에,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싫어. 죽기 싫어.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이제야 조금 나아졌는데, 이렇게 죽을 수는ㅡ
"파하?! 흐, 케헥, 흑, 켁, 켁!!"
작은 파열음과 함께 부적이 깨져나갔다.
다시 찾아온 공기에,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셨다.
추한 몰골일게 틀림 없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리엘 씨."
"...엘리."
바닥에 쓰러져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으니, 부드러운 손길이 내 머리를 감쌌다.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엘리가 나를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이제 안심하셔도 좋아요.
속삭이듯이 내뱉어진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이 모시고 있는 신이, 아무래도 여신인 것 같구나."
"알고 있어요. 저라면, 아주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까."
제 몸 속에 들어찬 신성력과 같은 힘.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바보나 다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저건 조금 다르네요.'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미쳐 날뛰는 신성력에 엘리가 표정을 찡그렸다.
오로지 치유의 목적으로만 신성력을 사용해온 그녀였기에, 저런 식의 운용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쩌면 저도 가능할지도 몰라요.
그렇게 된다면 분명 맞설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신성력을 사용하게 된다면, 여신이 깃든다.
단 하나의 사실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할리벨이 앞에서 버티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몸은 신성력을 쐬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입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해.
이를 악물고 신성력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아."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성녀가 아니게 되는 방법은 처녀를 잃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처녀가 아니라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상대의 처녀를 부수면 쉽게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손에 들린 단검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할 수 있어.
마수를 상대하던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걸음을 내딛었다.
"할리벨 씨!"
"...윽, 빨리 저 녀석 좀 어떻게 해! 아파 죽겠네, 진짜!"
할리벨이 비켜서니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런 그녀를 스치듯 지나간 엘리가 상대를 향해 팔을 뻗었다.
무모한 짓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었다.
"하, 그대로 죽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신성력이 뭉쳐져, 뾰족한 칼날이 된다.
선명하게 보이는 폭력의 줄기에도 엘리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저 신성력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잡았다."
"무, 뭣?!"
인간과 수인의 신체 능력은 꽤나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순식간에 미코를 넘어뜨린 엘리가 상대의 목에 날붙이를 가져다댔다.
조금만 움직여도 목에 상처가 생기겠지.
여전히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상대에게 샐쭉 웃어보였다.
"아리엘 씨를 해치려고 하다니, 정말 너무하시네요."
"...신의 힘이 통하지 않다니, 큭."
"하지만 그런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여신에게 조종당하신게 분명하니까요."
엘리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흐트러진 옷 사이로 드러난 매끈한 허벅지에 손가락이 얽혔다.
"당신을, 여신의 굴레에서 해방시켜드릴게요."
엘리가 방긋 웃으며 미코의 가장 안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는지, 새하얀 얼굴이 더 할 수 없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만... 그만, 두거라..."
제발, 그만...
상황을 깨달았는지 눈물을 퐁퐁 흘려대는 상대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리가 미코의 고간 위에 붙어 있던 부적을 순식간에 뜯어냈다.
여태껏 감춰져 있던, 동시에 보호받고 있던 자그마한 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예쁜 모양으로 닫혀 있는 균열을 바라보다가도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어느 정도로 해야 할까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콕, 하고 찍어누르니 절박하게 바르작거린다.
안타까워라, 안타까워.
처음은 사랑하는 분에게 잃는 편이 좋을 텐데.
"제발..."
"미안해요."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오랫 동안 열리지 않아 강한 저항감이 들었지만, 엘리의 움직임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피부에 들러붙는 점막이 새것처럼 쫀득하게 감겨왔다.
"히약..."
터져나오는 신음 소리가 귀여웠다.
적이 아니었다면 분명 좋은 친구가 되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여신의 힘을 사용한다면,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을 터였으니.
"으응, 여기일까요... 으으으응..."
"흣, 그만, 힉, 그마아안!!!"
손가락 끝에 걸리는 이물감을 찾아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다.
여긴가? 여기? 여기일까요?
이리저리 들쑤시면 하지 말라는 듯이 꿈틀거린다.
그렇게 잠시.
얇은 막 같은 것이 손톱 끝에 걸릴 때 즈음이었다.
"아, 안 된다. 이, 이럴 수는 없어... 그게 없으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사라진단 말이다..."
"어쩔 수 없어요."
툭, 하는 느낌과 무언가가 뜯겨나갔다.
소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의 절망 서린 비명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이 나쁜거니까.
여신을 모시고, 그 힘으로 아리엘 씨를 해치려고 한 당신이 나쁜거니까.
이런 벌 정도는 달게 받아주시길.
손 끝에 묻어난 핏자국을 문지르며, 엘리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