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9 - 진실에 대하여.(1)
대체 얼마나 달렸을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는 것 뿐.
뒤에서 들려오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무시하며 한참이고 달렸더랬다.
빌어먹을 수인들이던, 마수들이던 전부 골치 아픈 녀석들 뿐이었으니까.
"...으."
"마왕님, 괜찮으세요?!"
심지어 제 품에 안겨있는 마왕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신성력을 쐰 것 때문에 문제라도 생기신 걸까.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 성녀의 등에 매달린 여우 수인을 노려봤다.
저 녀석만 아니었다면.
"...죄, 죄송합니다."
할리벨의 시선을 눈치챈 미코가 몸을 움츠렸다.
지금도 마족은 원망스럽고, 그 상대가 마왕이라면야 찢어죽일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저 모습.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 희미한 심장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러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정말 저게 마왕이 맞는 걸까.'
어쩌면 이름이 마왕인 건 아닐까, 같은 생각을 하며 귀를 축 늘어뜨렸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공포의 상징이던 마왕이 저토록 연약한 존재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앞에 뭔가 구조물 같은게 있네요."
"일단은, 조금 쉬었다가 가자. 신성력에 당한 상처도 그렇고, 힘들어 죽겠어..."
근처의 나무에 몸을 기대고는 한숨을 내뱉는다.
아마 이 정도까지 거리를 벌렸다면 당분간은 안전하겠지.
저 앞에 보이는 희미한 윤곽에 시선을 주다가도, 점점 뜨거워지는 마왕님의 신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 마왕님..."
"하아, 흐..."
이대로면 마왕님이 위험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대체 이런 상태가 되실 때까지 용사는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거야?
이를 득득 갈면서도,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안전한 곳으로 간 다음 생각하는 거야.
"엄청나게 낡았네요."
"...설마 사람이 살지는 않겠죠?"
린이 이끼가 잔뜩 낀 벽면을 훑어내렸다.
아마 사람이 살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는 긍정을 답해야 할 듯 싶었다.
이끼가 끼었지만 과하지 않고 나무덩쿨이나 풀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누군가가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듯 싶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기를 잠시.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조금만 더 늦었다면 위험할 뻔 했습니다."
초췌한 인상의 여자가 말했다.
마왕님을 바닥에 눕혀두고는 천천히 그 입에 투명한 약물을 흘려넣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믿어보는 수 밖에 없겠지.
꼬맹이가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이상한 것이 들은 것 같지도 않고.
"그나저나, 여기는 뭐하는 곳일까요?"
주변의 풍경을 둘러본 엘리가 어깨를 움츠렸다.
폐허 특유의 음산함은 그렇다고 치지만, 몸을 짓누르는 감각이 여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곳은, 마신전입니다."
"...마신전?"
할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신전이라고 한다면, 마신을 모시는 신전.
마신이란 곧 마족들의 신.
그런 장소가 어째서 이 세계에 있는 것인가.
물론 마신이라는 것에 절대적인 믿음을 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마신전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지.
"무언가, 알고 계시는게 있으세요?"
"나도 정확히는 몰라. 애초에 마계에서도 마신전 같은 건 본 적 없고."
애초에 마족이라는 존재들이 신을 믿을 리가 없었다.
오로지 힘만을 숭상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숭배하고 헌신할 리가 없으니까.
어쩌면 마수와 같이 이름만 같은 다른 존재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높다고 생각했었다.
"몸의 그릇이 상당히 깨져있는 상태입니다. 마족을 치유하는데 있어서 가장 확실한 건, 바로 이것이겠죠."
초췌한 여자가 품 안에서 보라색으로 빛나는 조각을 꺼내들었다.
조각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할리벨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은, 그리고 이곳에서 모시고 있는 신은 마족들의 신인 마족이 맞다는 것을.
"마석이, 왜 여기에..."
마계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보라색빛의 보석.
고위 마족들만 가지고 다닌다는, 마족들의 힘을 증폭 시켜주는 물건이었다.
놀란 만큼 확신이 들었다.
저것이라면, 확실하게 마왕님을 치료할 수 있다고.
홀린 듯이 손을 뻗은 할리벨에게, 초췌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마석을 다룰 수 있는 건 마족 뿐이겠지만...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마왕님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니, 설령 그것이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기꺼이 그리 할 터였다.
그리고, 마족의 힘을 증폭시켜주는 물건인데 내가 다루지 못할 이유도 없잖아?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할리벨에게 초췌한 여자가 마석을 건넸다.
"...헉, 흑?!"
타오른다.
심장 깊숙한 곳에 머무르고 있는 생명의 힘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힘, 이 힘이라면...
가쁘게 숨을 토해내면서도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금방이라도 휩쓸려 이성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마왕님."
힘을 쏟아넣자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그릇의 크기가 너무도 커, 힘을 담아도 담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망가진 그릇을 복구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더 많은 생명력이 필요한 걸까.
할리벨이 이를 악물었다.
사랑하는 마왕님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셔야 할 이유가 뭘까.
'그저 마왕이기 때문에?'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모든 죄는 마족들 스스로가 저지른 것이었고, 그에 따른 벌 또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되갚았다.
만약 사후의 세계가 있다면 영원히 지옥 속에서 불타고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하나의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수 많은 마족들 사이에 남은 유일한 양심임과 동시에 피해자인 존재가 다름 아닌 마왕님이었으니까.
"...할리벨?"
"마왕님."
귓가에 들려오는 마왕님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어나셨어.
내가, 해냈다고.
"아, 아아아아아아아?!?!?!!!"
"할리벨!"
힘이 폭주한다.
넘쳐나는 생명력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제멋대로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방으로 불꽃이 튀고, 바람이 불었다.
벽이 폭발하며 텨져나온 파편에 다른 이들이 황급히 몸을 숙였다.
"나는, 나는, 아, 아아아아아!!!!"
증폭되는 건 힘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마음 깊숙한 곳이 숨겨왔던 상처와 부정적인 감정들 또한 폭발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인간들의 잦은 고문으로 인한 고통.
그 고통을 벗어던지기 위한ㅡ 아니, 잊어내기 위한 고뇌.
고뇌 끝에 펼쳐진 절망.
절망과 함께 몰려오는 슬픔과 포기.
그리고 약물로 인한 강제적인 쾌락과 그것으로 인한 공포까지.
"진정, 진정하거라!!"
"마왕, 마왕님, 아, 아아아!!!"
멈춰야해.
마왕님의 몸에 상처가 새겨지고 있잖아.
내가 이 망할 힘을 다루지 못하고 있어서, 마왕님이 아파하고 계시잖아!
저절로 비명을 내지르는 입을 어떻게든 악무려고 했지만, 쉽게 참아낼 수가 없었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란, 이 정도로 버거운 것이었구나.
"뿌, 뿔을, 자, 잘라, 잘라야..."
조금 엇나간 이야기였지만, 마족의 힘은 곧 뿔에서 나왔다.
만약 뿔이 없다면, 어떻게든 진정할 수 있지 않을까.
점점 뜨거워지는 머리속에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그, 그럴 수는ㅡ"
"제발요."
제가, 더 이상 마왕님을 상처입히지 않게 해주세요.
할리벨이 애원했다.
이제 조금, 아주 조금만 있으면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이 끊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뿔을 잘라내야만 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미안, 미안해, 미안..."
"괜찮, 아요."
눈물을 뚝뚝 흘리는 마왕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겼다.
***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파공성과 함께 공중에 떠있던 할리벨의 신체가 바닥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몸을 받아내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해서 그런지 한대 얽혀 바닥에 쓰러졌다.
"하아, 하아, 하아..."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했었더라.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단검자루의 감촉에 입술을 꾹 짓눌렀다.
그 옆에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뿔조각이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할리벨, 괜찮느냐? 할리벨!"
"..."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언젠가 느꼈던 공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아니, 아니야. 카운트가 올라가지는 않았어.'
할리벨이 죽었다면, 낳아야 할 아이의 숫자도 같이 늘어났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숫자는 그대로.
떨리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코 밑에 가져다대자, 희미하게 숨결이 느껴졌다.
"...다행이구나."
정말, 정말 다행이야.
안도감 때문인지 눈물이 흘러나왔다.
다행이야,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힘 없이 쓰러져 있는 할리벨의 몸을 껴안고는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깔끔하지 않게 잘려진 뿔의 절단면이 그녀의 상태를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리엘 씨, 괜찮으세요?!"
"...응, 나는 괜찮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뿔조각들을 천천히 집어들었다.
울퉁불퉁하게 잘려있는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품 안에 꼭 껴안았다.
뿔을 자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으니까.
"부디, 큰 이상이 없어야 할 텐데..."
쓰러진 할리벨을 계속 보고 있다가는 울 것만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