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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20화 (120/342)

Chapter 120 - 진실에 대하여.(2)

"...왜 이렇게 늦지."

설마 길이 엇갈렸나?

아니면, 수인들에게 당했나?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용사는 용사니까, 겨우 그런 녀석들에게 당했을 리가 없어.

"용사, 용사..."

손가락을 꾹 깨물었다.

할리벨의 뿔을 자른 뒤로부터, 불안이 멈추지 않았다.

엘리와 아이들이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제발, 빨리 와줘..."

무서우니까, 제발.

무릎을 끌어모아서는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생각해보면 레이나가 죽을 때도, 내가 그 빌어먹을 마법사를 죽일 때도 같이 있었더랬다.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해줬었지.

그리고 마법사를 죽일 때는 손을 빌려주기도 했었고.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할리벨의 뿔을 잘라버린 나에게 필요한 건, 그때와 같은 위로였으니까.

"아얏?! 그, 그만 깨물거라! 앗?!"

아기 둘에게 여기저기 깨물리는 미코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꼬리가 아홉개일 때는 별로였는데, 저렇게 작아지니 그나마 나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고 했고.

"어머니, 이거라도 드세요."

"...고맙구나."

근처의 숲에서 구해왔는지 린이 작은 과일들을 내밀어 왔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일단 아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를 안 먹은지도 조금 된 것 같네.

한 입 베어 물자 입 안에 새콤달콤한 맛이 퍼져나갔다.

입맛을 돋구는 맛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를 먹어치우는 것이 겨우였다.

"용사라면 분명히 무사할거에요."

"...그 녀석을 걱정하고 있는게 아니다."

반쯤 거짓말이기는 했지만, 일단 제일 걱정되는 건 할리벨이었다.

내가 뿔을 잘랐을 때는 피를 토하고 난리였는데, 오히려 죽은 듯이 누워있는 그녀의 상태가 훨씬 더 불안한 건 왜일까.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힘을 주니 손등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마 내 얼굴도 똑같은 색이겠지.

'그러고 보니, 마신전이라고 했었지?'

마신전, 마신전, 마신전...

그 생소한 단어를 입 안에서 되뇌었지만, 떠오르는 건 딱히 없었다.

게임 속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장소와 설정.

애초에 마족들이란 극악무도한 종족이라는 것만 묘사되었기에 그 외의 것들은 전부 모르는 것들 투성이었다.

"무언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시군요."

"...너는."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리니, 초췌한 인상의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밑에 깔린 다크 서클과 검은색 눈동자가 그녀를 한층 더 초췌해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할리벨에게 마석이란 물건을 건네준게 이 사람이라고 했었지.

"마석을 사용한 건 그녀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죄책감을 가지지 마시길."

"..."

"그것보다는 당신에게 알려드리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알려주고 싶은게 있다니, 뭘?

더 이상은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있는 것만 해도 고통스러운데, 뭘 더 알아야 하는 건데?

내 옆에 나란히 앉는 여자의 모습에 슬쩍 거리를 벌렸다.

"힘드신 건 알겠지만, 그래도 들어야 합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지금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할리벨에 대한 것 밖에 없다."

그녀가 눈을 뜰 수 있을지 없을지, 몸에 큰 이상이 생겼는지 생기지 않았는지.

오직 그것만이 중요한 일이었다.

다른 일들 따위는, 나중에 들어도 되니까.

"마족에 대한 진실입니다만,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족에 대한 진실이라니, 어떤 진실?

초췌한 인상의 여자가 나에게 보라색의 보석을 내밀었다.

분명 처음 보는 물건인데도 불구하고 한 눈에 알아차릴 수 밖에 없었다.

마석.

나를 치료하고, 할리벨을 폭주하게 만든 물건이었다.

"별 것 없는 재주입니다만, 저는 마석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보일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초췌한 여자가 마석을 쥐니, 눈앞이 번뜩이더니 하나의 장면을 보여주었다.

피, 살육, 비명을 지르는 인간들, 그리고 웃음 소리.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야가 다시 초췌한 여자를 비추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이건, 대체..."

"마석에 깃든 기억입니다. 단편적인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하죠."

마석에 깃든 기억.

그것은 마족들이 인간들을 학살하던 장면을 비춰주었다.

단 몇 초간의 회상 동안 대체 몇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더라.

구역질 나는 광경을 굳이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이딴 짓을 한 녀석들인데, 진실이고 뭐고 상관 없는게 아닐까.'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 있더라도, 그들이 벌인 짓을 덮어낼 수는 없을 터였다.

심지어 이쪽에서 그렇게나 말렸는데도 그런 짓을 한 녀석들인데.

무수하게 떠오르는 선택지들에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노력했는데, 결국은 이런 꼴이 되어버렸지.

"마족들이 한 짓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지요."

예를 들자면 마족들이 어떤 식으로 이 세계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초췌한 여자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실히..."

여러가지 추측이 있었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마족들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했었고, 새로운 차원을 정복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었지.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진 적 없은 설정이었기에 순간 혹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서도.

"그러면, 직접 보고 판단해주시길."

치직거리며 시야에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마치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구식 텔레비전처럼 일그러진 풍경이 이내 하나의 장면을 그려냈다.

어두운 홀, 그 중앙에 놓여있는 커다란 옥좌까지.

기시감이 있었다.

그야, 내가 처음 마왕의 몸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 있던 곳이었으니까.

"마왕성이잖아..."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마족이 아니었다.

오로지 인간들.

주변에 가득 채워진 기괴한 그림들과 함께 선혈이 비산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그것들의 피로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내고 있었다.

설마.

여기까지 온다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전개였다.

마족들을 소환한 건, 다름 아닌 인간들.

피로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이 붉게 빛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런 걸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내게 복수라도 하라는 것이냐? 아니면, 인간들의 자업자득이라 말하고 싶었던 건가?"

인간들이 마족들을 소환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인간들의 죄가 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마족들이 죄를 저질렀지만 지금 회차의 마왕 만큼은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처럼.

겨우 그런 이유 따위로 모든 것들을 정당화 시킬 수는 없었다.

"그냥, 알고 계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뭐냐, 그게."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보다는 영원히 당신의 곁에 있을 사람에게 더 중요한 이야기였으니까요. 당사자가 없으니 당신께 말씀드리기는 했습니다만."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단 하나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악연으로 얽혀진 끝에 만들어진 관계.

다름 아닌, 용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설마, 용사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릴 생각인 건가?"

"저는 이미 알렸습니다. 그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건 당신의 몫이지요. 물론, 알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용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가정에 눈을 감았다.

분명 복수를 위해 칼을 뽑아들겠지.

마족들을 소환한 인간들을 처단하고야 말겠다며 분노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었다.

인간이 마족을 처단하는 것과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같은 선상에 놓여질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대체, 대체 네 목적이 뭐지?"

"..."

상대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입꼬리를 끌어올려, 둥그런 미소를 내게 보여줄 뿐이었다.

사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것이 아닐까.

그저 진실을 알려주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속이 찜찜했다.

'...나보고, 대체 뭘 어떻게 하라고.'

진실을 알랐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삶은 여신에게 붙잡혀 있었고,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낳아내야만 했다.

불편한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무언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 본 것이 화면 너머의 세계였다면 무언가가 변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만큼은 현실이었다.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녹록치 않은 만큼 쉽게 변하지 않았다.

"용사, 내가 너에게 진실을 알려준다고 한다면 너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멍하니 중얼거렸다.

게임에서는 마왕이 죽인 만큼 낳는 것으로 끝났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시작으로 변해버렸다.

대체 얼마나 지나야 끝을 볼 수 있을까.

십 년? 그것도 아니라면 백 년?

용사가 복수를 택한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용사는 주인공이었으니까.

하지만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잘 짜여진 판 위에 올라가 억지로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님이 오셨군요."

초췌한 여자가 말했다.

마치 지나가듯 중얼거려진 목소리에도 나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여자가 말하는 손님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용사."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냈다.

용사.

그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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