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2 - 진실에 대하여.(4)
복수 같은 건 필요 없어.
왜 굳이 가려고 하는 거야?
왜 굳이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고 해?
이제 마족들은 없어.
죽은 사람들도, 내가 전부 낳으면 되잖아.
그런데 왜 복수를 하려는 거야.
"복수 같은거, 안 해줘도 되니까... 떠나지 말아다오."
그의 여정에 내가 필요 없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로지 혼자만이 걷는 길이 되겠지.
물론 불만을 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용사의 옆에 내가 없다는 것을 상상하니ㅡ 아니, 내 옆에 용사가 없다는 것을 상상하니 참을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용사 따위는 정말 미울 텐데도, 절대 놓을 수가 없었다.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던 품이 떠올랐다.
내 손을 쓰다듬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아기를 건네줄 때의 표정과 내게 말을 걸 때의 말투 또한 떠올랐다.
"나랑 나랑 약속했잖아."
"..."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용사의 가슴팍을 두들겼다.
그깟 복수가 뭐라고.
그깟 복수가 대체 뭐라고 나를 떠나려고 하는 건데?
나는 포기했잖아.
너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접고, 암컷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도 버리고, 결국 너를 이렇게나 생각하게 되어버렸는데.
나를 이렇게 만들고는 떠나려 한다고?
'용납 못해.'
용사를 붙잡아야만 했다.
용사는 내 것이니까, 내 것이 되기로 했으니까 반드시 내 곁에 있어야만 했다.
나한테 미안하잖아.
그러면 내 곁에 있어야지, 응?
아니면, 부족해서 그래?
내가 너에게 주는 마음이 너무 모자라서 그래?
"읍..."
츄읍, 흡, 츄릅.
입술이 부딪히고, 혀가 섞인다.
한 번도 먼저 하지 않았던, 어쩌면 처음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입맞춤.
혹은, 탐식.
갑작스러운 입맞춤에도 불구하고 용사는 능숙하게 혀를 움직였다.
이빨을 쓸어내리고, 입천장을 두드리고, 제 혀로 내 혀를 끌어당겨 거칠게 빨아당겼다.
마치 입 안을 범하는 듯한 모양새에, 몸이 홧홧 달아올랐다.
"흐으, 하, 흐..."
"...아리엘."
"가지마. 뭐든, 뭐든 할테니까 제발 가지마..."
용사의 옷자락을 붙잡고는 애원했다.
과거였다면 하지 못했을 말을 감히 입에 담았다.
네가 없으면 안 돼.
나라는 인간은 이제 네가 있음으로써 완성되니까.
그러니까, 없으면 안 된다고.
'...어째서 이렇게 됐을까.'
용사가 없다면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에서 나오는 두려움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녀석에게 정이 들어버린 걸까.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용사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서."
"..."
입을 열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이야기가 목구멍 아래에서 일렁거렸다.
지금 이 말을 한다면 절대 돌이킬 수 없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말하지 말걸.
인간들이 마족을 소환했다는 사실 따위, 모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너를 사랑해. 네가 없으면 불안해 미칠 정도로 사랑해. 이게 진짜 내 마음인지, 만들어진 건지, 여신의 저주인지 축복 때문인지는 몰라도 너를 사랑해!"
"..."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줘..."
그의 눈동자 안에서 망설임이 읽혀졌다.
나는 그 자그마한 감정을 붙잡아 용사에게 매달렸다.
그래, 그거야.
그냥 포기해.
포기하고, 나와 함께 있는 거야.
"내가 너를 버릴 리가 없잖아."
"..."
용사가 나를 품에 안았다.
어찌나 세게 안았던지, 조금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그 아픔이 좋았다.
팔과 허리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고통은,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동시에, 용사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 또한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건 너를 위한 일이야, 아리엘."
복수.
그는 나를 위한 복수를 하길 원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핑계로 해서 제 복수를 하고 싶어했다.
제 딴에는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지만, 내 눈엔 보였다.
저 눈동자 속에서 불타는게 겨우 나를 위한 것 뿐이라고?
그럴 리가.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내 입은 포기를 내뱉었다.
어쩌면 지쳐버린 걸지도 모르고, 어쩌면 상관 없는 걸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타인을 핑계로 하는 거짓말은 결코 쉽게 무를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그것이 그토록 달콤한 말인지 몰랐지만, 나는 그 유혹을 떨쳐내야만 했다.
아리엘의 입에 담긴 사랑이 그저 자신을 붙잡으려고 내뱉은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과 집착.
비슷하지만 다른 감정.
그녀가 나에게 느끼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진한 집착이었지.
하지만 그런 집착이라도 나는 달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집착이라는 감정마저도 소중히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정말 가시는 건가요?"
"...그래."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이들이 전부 잠들었을 때 조용히 떠나려고 했건만, 결국은 이렇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차마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돌아보지 않았다.
저 아이의 앞에만 서면 스스로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으니까.
"어머니가 원하고 있는데도, 당신은 복수를 위해 떠나가는군요."
당신이 어머니 곁에서 사라져 줬으면 좋겠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 됐다.
용사라는 존재는 제 어머니에게 상처를 입은 채로 떠나가야 했지, 상처를 준 채로 떠나가서는 안 됐다.
복수, 복수라.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하지만, 그게 그렇게나 중요한 걸까.
상대의 속을 읽을 수 없으니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필요한 일이야."
나에게도, 아리엘에게도.
용사가 읊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복수 대신 그녀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한 것도 자신이었고, 상대를 향힌 증오를 포기한 것도 자신이었으니.
하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용사, 아스테리아라는 존재가 복수를 잊고 살 수 있을까?
'아니, 절대.'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잊고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꿉친구가, 가족이, 마을 사람들이, 스승이, 전우들이, 그리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들을 죽인 이들은 이미 처단한지 오래였지만, 그들을 불러들인 이들이 남아있었다.
언젠가는 또 같은 짓을 벌일지 모르지.
다시 한 번 자신 같은 경우가 생겨날지도 몰랐다.
"다녀올게."
이건 미련을 끊기 위한 여정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달려오게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종지부를 찍을 차례였다.
마족들을 따르던 인간들의 위치는 얼추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들을 뒤지다 보면 분명 단서가 나오겠지.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분명 마족들을 소환한 이들 또한 만나게 될 터였다.
용사, 아스테리아는 복수를 그만두지 못한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리엘을 잘 부탁해."
용사가 뒤를 돌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달빛이 아이의 눈동자를 비추었다.
싸늘하게 물든 분홍빛을 바라본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탐스러운 정수리를 몇 번 두드린 손길은 아이의 짜증 섞인 손길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용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몰래 떠났다고 생각한 걸까, 저 사람은.
제 몸을 끌어안은 손길에 머리를 기댔다.
"결국 떠났구나."
"..."
"결국 떠났어."
공허한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받아들인 목소리이기도 했다.
제 어머니의 손을 쓸어내린 린이 가느다란 허리를 꽉 껴안았다.
용사 따위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있으니까, 제가 있으니까 부디 슬퍼하지 말아주세요.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어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얼굴 정도는 보고 갈 수 있잖아.
작은 떨림이 심장을 파고 들었다.
당신을 상처 입힌 사람인데도, 그토록 그리워하고 계시네요.
그건 과연 여신의 저주 때문일까, 아니면 진심이 담긴 사랑일까.
'저주를 풀면 해결될 일이겠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과거의 역량이 돌아오고 있었기에,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여신의 저주를 풀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래, 그때가 되면 어머니도 마음을 바꾸시겠지.
제 손목에 걸린 팔찌를 내려다본다.
마족의 뿔에는 저주에 저항할 수 있는 효과가 있더랬다.
겨우 반쪽짜리 핏줄의 뿔이었지만, 충분히 도움이 될 터였다.
"자, 이제 들어가서 주무세요."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마."
희미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가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세요.
달빛 아래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누군가의 흐느낌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지만.
***
마신.
마신을 강림시키기 위힌 필요한 건 총 여덟이다.
어린 소년의 심장.
늙은 양의 피.
처녀의 파과혈.
장님의 손가락.
절름발이의 척추뼈.
날개 없는 새의 부리.
마족의 뿔.
세계수의 잿가루.
순서에 맞춰 재료들을 조합하고, 열 두개의 문장과 일곱 개의 도형으로 마법진을 그리면 마침내 완성이다.
마신이 온다.
마신이 온다.
우리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마신이 온다.
우리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마신이 온다.
마신이시여, 강림하소서.
마신이시여, 강림하소서.
. . .
실패다.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마신이 아닌 마족들이 소환되다니, 이건 잘못 됐어.
...틀렸군.
마족의 뿔이 아니었어.
마족의 뿔이 아니라, 마왕의 뿔이었구나.
다음에는,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