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6 - 진실에 대하여.(8)
신이란 것은 언제나 똑같았다.
빌어도, 또 빌어도 응하지 않다가 정작 필요하지 않을 때만 나타났다.
처음에는 아버지, 그 다음에는 어머니.
그리고 지금.
"오랜만에 보네요, 내 귀여운 마왕님."
"...결국은 이렇게 됐구나."
체념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라리 아이의 검에 찔리지 않는 편이 나았으려나.
이미 늦어버렸지만, 후회가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편해지고 싶다는 이기심이 더 큰 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그것도 가장 최악의 형태로.
"아아, 살아있는 육체라는 건 정말 너무나도 황홀하네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
양 팔을 펼치고, 마치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돈다.
엘리의 모습과 목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물은 여신의 것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버티면 될까.
한 시간? 하루? 일주일? 그것도 아니라면, 평생?
"당신 덕분이랍니다, 귀여운 인간 꼬마님. 당신이 마왕을 찔러준 덕분에, 가여운 성녀가 제게 기도를 올렸다구요. 후, 후후..."
"아, 아으..."
아이는 넋을 놓은지 오래였다.
신의 힘에 정신이 눌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은 여신이 아이를 괴롭히지 못하게 막는 것 뿐이었으니까.
...나를 찌른 아이임에도, 말이지.
"어머?"
여신의 손길에 닿은 아이를 붙잡아, 그대로 내 등 뒤에 숨겼다.
그에 상대의 눈동자가 이채를 담으며 동그렇게 떠졌다.
신기한 것을 보고 있다는 듯한, 혹은 의외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이는 괴롭히지 말아다오. 당한다면, 나 혼자만 괴롭혀 줘."
"흐으으응? 정말 재미있는 소리를 하시네요."
뜨거운 손길이 뺨에 닿았다.
차가운 파부와 대비되어 기묘한 열기를 담은 손바닥이 내 얼굴을 슬슬 쓸어내렸다.
귀여운 장난감을 보는 것 같기도, 가여운 어린양을 보는 것 같기도 한 표정.
눈앞에 있는 건 신과 악마의 얼굴을 동시에 가진 존재였다.
"아이를 괴롭히는게 아니에요. 당신을 괴롭히는 거지."
여신의 입꼬리가 주욱 찢어졌다.
내 마음속에 있는 모성애.
그것을 유린하기 위해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체, 대체 내게 왜 그러는 것이냐. 대체, 왜..."
"이유가 뭘까요. 당신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 라면 조금 부족하려나요?"
이마와 이마가 맞닿는다.
푸른색 눈동자가 내 시선을 가득 빼앗았다.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였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광기 만큼은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니, 그녀는 어째서 이 정도의 광기를 가지게 된 걸까.
"아니면 이건 어떨까요? 그래. 당신의 그 얼굴이 너무 귀엽고 귀여워서ㅡ 아주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여서 그랬다면요?"
"...흣."
증오에 감싸인 눈.
마왕 뿐만 아니라, 마족 전체를 향한 흑색의 감정.
마족이라는 종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혐오하는 자의 눈빛이었다.
"아아, 하지만 걱정 마세요. 아직은 당신을 죽일 생각도, 해칠 생각도 없으니까."
상냥한 중얼거림에 내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피와 같은 색만 아니었다면 끔뻑 속아넘어갈 정도의 친절함이었다.
"용사님이 없다는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뭐. 당신의 처지를 깨닫게 하는데는 문제 없겠죠."
"무슨 소리를ㅡ 흣?!"
손가락 끝에 닿은 피부가 홧홧 달아올랐다.
이 느낌, 느껴본 적 있어.
불에 타오르듯 뜨거우면서도 간지럽히는 것처럼 애태우는 감각.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짜릿함에 무릎이 덜컥거렸다.
"아, 아, 아으, 아, 흐, 아?"
"망가진 모습도 귀엽네요, 후흐."
하반신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모자라,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바닥이 가득 적신 투명한 액체를 보며 여신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 이건, 이상, 이상해...'
온몸이 덜덜 떨렸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쾌락이 어서 자신을 붙잡으라며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ㅡ
"아학, 힉?!"
"아아, 그거에요. 당신이 쾌락에 젖어 망가지는 모습을 어찌나 보고 싶었던지..."
손길이 닿자마자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뭐야.
이게, 대체 뭐야.
갔다? 아니, 그것보다 더 엄청났는데.
"어때요. 정신은 멀쩡한데 마구 가버리는 감각은?"
"시, 시러... 히야아아아악?!?!"
애태우듯이 쓰다듬고, 톡톡 두드리고, 손가락을 튕긴다.
여신의 손길에 닿은 공알이 마구 경련하며 내 정신을 저 멀리 날려보냈다.
"가, 가버려써♥ 가버려쓰니까♥"
저절로 허리가 들렸다.
온몸의 수분을 전부 빼낼 듯할 기세로 조수가 뿜어져 나왔다.
어라, 방금 뭐하고 있었더라.
고갤 까딱이니 방긋 웃고 있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엘, 리... 사려, 줘♥"
"흐응, 이름을 부른다고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ㅡ 윽?!"
별안간, 상대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희미해졌던 정신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헉, 흐하, 학..."
다시 한 번 겪으면 미쳐버릴 거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렀다.
움직여.
움직여.
뭘 해야할지 알고 있잖아.
어서!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이번 걸로 완벽하게 지배를ㅡ 아아, 정말이지! 설마 저 녀석을 사랑이라도 하는 건가요, 당신?!"
머리를 부여잡고는 방 안을 부산스럽게 움직여댄다.
지배하고 있는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꽤나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 여신의 모습을 보며 구석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집어들었다.
"엘리, 미안. 정말, 정말 미안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날 때까지 몇 번이고 헛발질을 했다.
부딪히고, 넘어져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지만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기회를 붙잡아.
처음이자, 마지막의 기회를.
"윽, 설마 저를ㅡ 성녀를 죽일 생각인가요? 진짜로? 당신이?"
여신은 엘리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미안해. 하지만, 이 방법 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용서해줘.
"다시는 보지 말자."
단검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피가 튀었다.
비명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남은 건 오직 작게 흐느끼는 소리 뿐이었다.
***
"...날을 너무 강하게 쥐셨어요."
"그 정도로 쥐지 않으면, 놓칠 것만 같았어."
손에 둘러져 있는 붕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단검의 날을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뼈가 보일 정도였다.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대신 엘리를 지켜낼 수 있었으니 상관 없었다.
"정말, 괜찮겠느냐?"
"괜찮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엘리가 쓰게 웃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신성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온 엘리에게 남은 건, 파괴된 처녀와 세 방울의 혈흔 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를 구했지만, 그녀의 몸에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혔으니까.
"처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잃는 편이 낫지 않나."
물론 내 것은 처참한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졌지만, 내가 그랬다고 그녀 또한 그리 되라는 법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엘리의 처녀를 지키려고 한 걸지도 몰랐다.
...지금은 이미 늦어 버렸지만.
"뭐어, 그게 문제였다면 별로 상관 없을 것 같은데요."
"...뭐?"
하지만 엘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걸까.
순간 이해가 가지를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가까워졌다.
순식간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리엘 씨라고 말하는 거에요."
"..."
쪽, 하고 맞닿은 입술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마치 새가 입맞춤 하듯이 다녀가는구나.
괜히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리니 그것마저도 좋다며 후후 웃어댔다.
"그렇지만 나는ㅡ"
"알고 있어요. 아리엘 씨와 용사님의 관계에 대한 건. 그래도 말이죠, 지금은 용사님이 안 계시잖아요."
물론 손을 댈 생각은 없지만 말이에요.
마치 유혹하듯 눈을 깜빡거린 엘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했으니까, 저도 쟁취하면 되는거 아닐까요?"
그 말이 부담스러워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물론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정도가 과했다.
일단은 정리부터 하자.
할리벨과 나란히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에 한숨을 내뱉었다.
"...너까지 속을 썩이면 어떻게 하느냐."
여신의 신성력을 정면으로 받아서 그런지, 아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고 한다면 안색이 나쁘지 않다는 것 정도일까.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니 아이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
어쩌면...
아니, 그만 생각하자.
"다른 아이들이 휘말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린도, 그리고 쌍둥이 아이들도.
그 아이들까지 휘말렸다면 분명 버티지 못했을 터였다.
"흐, 하아......"
긴장이 풀리니까 온몸에서 힘이 쭉쭉 빠졌다.
오늘 하루 동안 움직일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해서 움직인 듯한 감각이었다.
그나저나,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도 이렇게나 안심하게 되는구나.
아니, 이제 엘리의 몸에 여신이 깃들지 않을 테니 달라지기는 한 걸까.
"...얼마나 지나야 끝이 찾아올까."
차라리 내가 용사의 손에 죽었다면 다른 이들이 행복했을까.
레이나도, 엘리도, 용사도, 하물며 그 빌어먹을 마법사까지.
괜히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