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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27화 (127/342)

Chapter 127 - 진실에 대하여.(9)

변한 것은 없었다.

엘리는 린과 함께 쌍둥이를 돌봤고, 할리벨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으며, 나를 찌른 아이는 내 눈치를 봤다.

괜찮다고. 용서한다고 말해도 아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죄송해요."

"괜찮데도."

그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서, 반쯤 억지로 그 자그마한 몸을 품 안으로 끌어들였더랬다.

연신 죄송하다며 말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뺨에 입술을 맞추고, 품에 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마족을 향한 복수심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네 잘못이 아니야.

"라일라."

"...네."

아이의 이름은 라일라였다.

어느날 갑자기 나에게 찾아와서 제 이름을 말해줬었지.

어렴풋이 떠오른 기억 속에서 용사를 가르쳤던 스승의 이름이 라일라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조금 놀라기도 했었다.

"네가 나를 피해다니는게 더 슬프니, 부디 그러지 말아다오."

"...알겠습니다."

그녀는 한창 마족들이 날뛰던 시기에 죽었다.

전쟁이 일상이고, 세상 천지에 마족들이 들끓던 시기의 인간.

그래서 그런지 엘리에게 현재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대륙의 마족들을 싸그리 다 처단한 상태라는 건가요?"

"네, 지금의 대륙은 평화롭답니다. 물론, 전부 끝났다는 소식을 전하지는 못했지만요."

내가 이 몸뚱이에 깃들었을 무렵에도 대륙은 어느 정도 평화를 되찾은 상태였다고 했다.

마왕을 처단하려는 이유는 악의 씨앗을 없애려는 것도 있었지만, 여신의 힘을 빌어서 죽은 사람들을 되살리려는 의도가 더 컸다고도 이야기했다.

물론 전부 의미 없는 일이 되었지만.

"다시 보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라일라 님."

"저도 마찬가지에요. 성녀, 아니 엘리 님."

두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딱딱한 성격의 라일라와 조금 엉뚱한 성격의 엘리가 과연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괜한 걱정인 모양이었다.

전장에서 이리저리 같이 굴러다닌 경험은 그 둘을 끈끈하게 이어주고 있었다.

심지어 죽은 사람과 다시 만났으니 더욱 그랬겠지.

"그나저나, 라일라 님은 어렸을 때 엄청 귀여우셨네요."

"...그런 말을 들어도 딱히 체감은 없습니다만."

확실히 지금의 라일라에서 언젠가 보았던 라일라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전부 커다랗던 성인 시절의 라일라와 전부 자그마한 지금의 라일라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아이에 슥슥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상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는게 귀여웠다.

"용사님은 잘 지내고 계실까요..."

엘리가 중얼거렸다.

벌써 용사가 떠난지 한참이 지났다.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지만, 그 때가 언제가 될지 몰라 그저 그리움만 커져갔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던데.

심장을 쿡쿡 찔러대는 기묘한 감촉에 괜히 울적해졌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렇게 한참이고 멍하니 있으니, 초췌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손님이라니.

나를 바라보며 말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내 손님인 것 같았다.

설마 용사일까.

확실히 그 말고는 나를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팔자도 좋다냥. 여기에서 숨어 지내고 있던 거냥?"

"랴뇨리?"

냥냥하고 울어대는 고양이 수인.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랴뇨리에 눈을 끔뻑였다.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아니, 애초에 잘도 여기를 찾아냈구나 싶었다.

"사실 너를 찾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냐~ 이 녀석, 고집이 조금 심해서 말이지냥~"

"...안녕하세요, 아리엘 씨."

랴뇨리가 제 등 뒤로 손을 뻗더니, 사람 하나를 내 앞으로 밀어냈다.

귀 하나가 없는 새하얀 고양이 수인, 벨이었다.

살아있었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목이 매이고 눈물이 솟았다.

다행이다.

진짜로 다행이야.

"살아있어줘서, 고맙구나. 정말, 정말 고마워..."

"고양이의 목숨은 9개니까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농담을 하는 벨에 울면서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꼬리가 뽑힌다는 랴뇨리의 말에 나는 꼬리가 없다고 대꾸해줬다.

우울하던 와중에 좋은 소식이 생겨서 다행이었다.

***

그 뒤로부터 열여덟의 마족을 만났고, 그 중에서 아홉을 죽였다.

귀족 저택의 지하.

마을 어귀의 골목길.

그리고 악마숭배자들이 사용하는 동굴까지.

찾아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악마숭배자란 녀석들은 마족들이 나타나기 전부터도 있었습죠, 나으리."

"자세히 설명해."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래! 악마를 소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등이 굽은 노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위대한 영웅들의 뒤에 숨겨진 어두운 이야기들을.

미래를 보는 눈으로 나라를 이끈 군주.

전쟁에서 적들을 나뭇잎처럼 쓰러뜨리던 용맹한 전사.

두 개의 마탑을 세운 천재적인 마법사까지.

"옛날 이야기를 보면 천재들이 악마와 계약을 해서 그 재능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 꽤나 많았습죠."

"..."

"그 악마가 마족이라면 어떻겠습니까."

현재의 악마 소환술은 이래저래 소실된 것이 많이 불완전한 것입니다.

무작위하게 악마ㅡ 마족을 소환하는 건 아무런 쓸모도 없죠.

"소환자는 자신과 같은 이름의 악마를 소환하여, 계약한다. 그리고 계약을 통해 악마의 재능을 얻게 된다."

악마가 인간이 되는지, 인간이 악마가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그 재능을 쟁취하는 것이었지.

등굽은 노인의 이야기를 듣던 용사가 표정을 찌푸렸다.

"이름이 같은 마족과 인간이 만나면 어떻게 되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둘이 하나로 합쳐질지, 서로 죽이게 될지, 친해지게 될지, 혹은 계약을 나누어 재능을 가지게 될지."

아무도 모르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얼마 전에 만났던 엘리라는 이름의 마족을 떠올랐다.

그 마족을 과연 그녀가 있는 곳에 보낸게 옳은 일이었을까.

한숨을 내뱉고는 성검을 들어올렸다.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악마숭배자."

"저도, 용사님을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었습죠. 아, 기왕 죽이실거면 한 번에 죽여주시길. 저는 아픈게 싫어서 말입니다."

검이 휘둘러지고, 노인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동굴 안을 가득 채운 피웅덩이를 바라본 용사가 제 코 안을 가득 채웠던 피비린내를 토해냈다.

언제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구나.

"그러면 다음은, 왕도인가."

저 멀리 보이는 불빛들에 칼자루를 만지작거린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저곳에 모든 것의 진실이 있다고.

지금까지 죽여온 악마숭배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저들의 귀에도 들어갔을게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딱히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게 아니야."

연신 허리를 숙여대는 인간의 모습에 고개를 돌린다.

감사 인사를 받는 것도, 인간의 목숨을 구해주는 것도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목걸이만 없었더라면 이딴 짓거리를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신경질적으로 제 목을 두르고 있은 초커를 잡아당겼지만, 그것이 풀리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길래 가보라고 하는 거지."

지도상으로 봤을 때는 그냥 평범한 숲이었다.

그 숲 한가운데에 무엇이 있길래 자신을 굳이 그쪽으로 보낸단 말인가.

설마 인간들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어.

"일단은 가볼까."

명령이 내려진 이상 수행해야만 했다.

하기 싫다는 생각을 품기만 해도 충격이 전해졌기에 어쩔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인간 자식들.

"...이런 곳에 건물이 있다니."

지도에 표시된 곳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강인한 마족의 육체는 평범한 인간의 것을 뛰어넘기에, 하루도 채 들이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낡은 신전.

누가 봐도 수상쩍은 건물을 눈앞에 두고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또 손님이로군요."

"누구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초췌한 인상의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친근감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설마 마족인가, 이 여자.

따라오라는 듯이 등을 돌리는 행동에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몸도 안 좋으면서 무리하려고 하지 말라냥!"

"그렇지만 음식은 내가 하는 편이ㅡ"

"벨도 나도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냥!"

킁킁, 하고 코를 울린다.

언젠가 맡아본 적 있는 수인의 냄새에 어깨의 솜털이 팟, 하고 솟아올랐다.

전투의 향기가 나.

그리고 저 꼬리에 매달린 건, 아무리 봐도 동족의 뿔로 만든 물건이었다.

"그보다, 너는 누구냥? 처음 보는 녀석인 것 같은데냐~"

"..."

하지만 상대의 얼굴에는 적대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마족을 보면 공격부터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경계했던 자신이 바보처럼만 느껴졌다.

"아무리 봐도 마족인 것 같은데. 마왕, 네 손님 아니냥?"

"나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만..."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저 수인이 뭐라고 말했지?

마왕. 분명 마왕이라고 말했었지.

하지만 눈앞의 여자에게 뿔은ㅡ

"아, 아아, 아아아아아..."

"괘, 괜찮느냐?"

몸이 무너져 내렸다.

뿔이 있었던 자리에 보이는 자그마한 파편.

그것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마왕, 마왕님. 어쩌다 그렇게 되셨습니까.

어째서,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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