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0 - 떠나보내고, 받아들이다.(2)
"용사가 어디로 갔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마 왕도로 가지 않았을까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다니.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울감이 극에 달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유쾌할 정도였으니까.
"왕도, 왕도라..."
길을 모르니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얼마나 걸릴까.
하루? 이틀? 일주일?
떠올리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몸이 덜덜 떨려왔다.
"용사, 용사, 용사, 아서..."
입술을 짓이긴다.
겨우 너 하나가 사라졌다고, 이렇게 초조해지다니.
처음이었다면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이야기였을 텐데.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마왕님. 집착이지."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사랑이면 어떻고 집착이면 또 어떨까.
내가 용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만큼은 바뀌지 않는데 말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내 손으로 죽여낸 레이나를 되살릴 수 있다는, 그런 확신.
만약 그녀가 되살아 난다면, 나는 할리벨을 죽이지 않은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될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건, 그래.
'자해, 인가...'
그녀를 죽게 놓아둔 것에 대한 죄.
그녀를 죽게 만든 빌미를 준 것에 대한 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스스로가 만들어낸 죄.
이 모든 것은 그 모든 죗값을 치르기 위한 자기파멸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마왕님이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나도 아픈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아픈 것만큼 확실한 속죄가 무엇인지 모르겠어.
시체를 땅에 묻는 것 정도야 아무런 상관 없는 타인도 가능했다.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도,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도 큰 의미를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죽은 이를 가슴에 묻고, 그 무덤 위에 피어오른 피안화에게 상처를 입고 괴로워 하는 건 오직 죽은 이를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게 마왕님의 선택이라면 존중할게요."
"..."
"대신, 기억 해주세요. 제가 한 말들을."
대답은 하지 않았다.
거절의 뜻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처음으로 구한 생명을 감히 어떻게 잊을까.
"그래도 마왕님과 단 둘이 데이트인 건 좋네요~♪"
"...나쁘지 않구나."
눈앞에 있는게 진짜 할리벨인지 아니면 내 망상이 만들어낸 환상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쁘지만은 않았다.
적적했을 여행길에 생기가 맴도는 것 같달까.
이미 죽은 사람의 흔적으로 생기가 돈다는 표현이 맞는 건가 싶기는 하지만서도.
"자, 그러면 마왕님을 버리고 떠난 빌어먹을 용사의 엉덩이를 차주러 떠나자구요!"
할리벨이 상큼하게 외쳤다.
아무래도 그녀는 용사를 용서할 생각이 없는 듯 싶었다.
***
마족과의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새겨놓았다.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증오.
지금까지는 마족이란 공동의 적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마족이 없는 세계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슬픔을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분노를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증오를 버리는 건, 거의 불가능 했다.
상실의 고통이 너무 커, 상대를 이해하는 것 또한 불가능 했다.
분명 마족들은 사라졌건만, 세상은 더더욱 지옥이 되었다.
공동의 적이 사라졌기에,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적이 되었다.
"레인 씨, 오늘도 마족을 구매하신 겁니까?"
"...그래. 이번에도 실한 녀석으로 골랐지."
질투가 담긴 이웃의 인사를 허허로이 웃으며 받아넘긴다.
저 시선에 담긴 살의.
당장에라도 제 손에 쥐여진 마족을 찢어 죽이고 싶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안 되지. 이 녀석은 내 물건이라서 말이야.'
양보는 없었다.
마족을 죽이고 싶은 자들은 많았고, 괴롭히다 죽이고 싶은 자들은 더더욱 많았다.
하지만 마족의 수가 극단적으로 부족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은 손도 대지 못할 마족이었기에 불평을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제 필요한 건 돈과 최소한의 자존심 뿐이었다.
"자아, 이리로 오려무나."
찰강거리는 소리와 함께 공구 상자에서 대못과 망치가 빠져나왔다.
레인은 저번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족을 구한 의문의 괴한.
웃기지도 않는 녀석이었다.
마족을 보며 찢어 죽이고 싶다는 듯한 눈빛을 한 주제에 마족을 구하다니.
무슨 정의의 용사도 아니고 말이지.
"읍, 으읍, 읍?!?!!"
"자아 자아, 가만히 있어야지? 그러다기 머리에 못이 박히면 많이 아플 거란다."
쉬이, 쉬이이이...
검지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려둔 레인이 짐짓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마족이 덜덜 떠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분명 마족을 보며 두려움에 떨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눈물이 나올 정도로 유쾌했다.
악마인 줄로만 알았는데, 네 녀석들도 눈물이 있었구나.
"어디, 한 번 목소리를 들어볼까."
"자, 잘못했어요..."
"무엇을?"
레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했다니, 뭘?
마족이 인간을 죽이는게 죄가 되었던가?
그들은 그저 인간의 모습을 한 천재지변이나 다름 없었다.
태풍이 건물을 날려보내고, 홍수가 대지를 집어삼키고, 지진이 사람들을 무너뜨려도 다들 그것을 원망하던가?
아니, 아니지.
그저 재수 옴 붙었다며 한껏 욕을 하거나, 허공에 있을 이름 모를 신을 향해 마음껏 드잡이질을 할 뿐이었다.
"내가 하려는 건 그저, 재앙의 편린을 맛보려는 것이니까."
죄라는 건 지성체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지성체를 괴롭힐 때 한참이고 자비로워지는 생명체였다.
레인은 그런 자비를 때어내기 위해, 마족들을 지성체로 보지 않았다.
그저 천재지변이 지성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저번의 아이는 못을 열네 개나 박았는데도 정신을 붙잡고 있더구나. 차라리 정신을 놓아버렸다면 편해질 수 있었을 텐데도."
끌끌거리는 웃음 소리에 마족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자, 이제 이 녀석이 몇 명이나 죽였는지 들어볼까?
"너는 몇 명이나 죽였니? 나에게만 살짝 말해주렴."
"싫, 꺄으으으윽?!?!!"
창백한 전류가 마족의 몸뚱이를 지져댔다.
망할 노예상 녀석들, 또 개목걸이에 이상한 짓을 해놨구먼.
거품을 물고는 오줌을 질질 흘려대는 마족에 혀를 쯧쯧 찼다.
주기적으로 마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가끔 장난이 심할 때가 있어서 문제였다.
"일어나렴."
"아, 아?!"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흰자만 보이던 눈동자가 둥그렇게 변했다.
마치 강철을 내려친 듯한 반발력에 레인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번에는 뿔이 단단한 녀석이로구나.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더욱 좋았지.
"그만, 그만, 그만!!"
"엄살도 심하구나. 아직 하나도 채 박지 않았는데."
움푹 들어간 틈을 보며 그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부드럽구나.
내 손녀의 머리카락도 이것처럼 부드러웠었지.
쾅! 쾅! 쾅! 쾅! 쾅!!!
"...에, 에흐, 에, 에......"
"후우..."
기다란 대못이 뿔을 뚫어,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혀를 죽 내밀고 널브러진 마족이 잘게 경련했다.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역시 저번의 녀석처럼 못을 최대한 박아넣는 편이 좋을까?
'고민 되는구나...'
레인에게 있어서 마족을 고문하는 건 오늘 저녁 메뉴를 고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뿔을 잘라낼지, 도려낼지, 조각낼지, 뚫어낼지.
사람과 같은 몸뚱이는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기에 나오는 저열한 집착.
깊게 숨을 토해내고는 구석에 놓여진 줄톱을 향해 손을 뻗어낸다.
"저번에 실패했던 녀석으로 다시하는게 제일 났겠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이번에는 분명 성공할 터였다.
뿔의 가장 위쪽부터 차근차근 잘라낸다.
인간과 가장 닮은 무언가에게서 인간과 가장 닮지 않은 부분을 깎아내는 것.
그건 분명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달콤하겠지.
"챠, 챠라리 주, 주겨줘... 제발, 흑..."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니? 네가 죽는 건 기본 전제인데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공포를 느끼는구나.
마치 사람처럼.
손에 들린 줄톱이 희미한 조명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을 냈다.
좋아. 아주 좋아.
오늘은 정말, 느낌이 좋구나.
끼긱.
"아, 아..."
끼기... 긱. 끼긱...
"아아, 아아아아아?!?!?!!!"
끼긱끼기긱끽긱끼긱끽기기긱끽끼기끽끼긱끼기긱끼긱끼기기기긱끼기기끽끼긱
"...정말이지, 인내심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구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전부 쏟아내는 마족에 혀를 쯧쯧 찼다.
저번의 그 녀석이라면 분명 이 정도도 버텨냈을 텐데.
품 안에 있던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낸다.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먼지 묻은 옷을 털어내, 깔끔하게 정리해 입은 레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와 같이 평범하지만 깔끔한 옷차림이 되어 내일을 기약한다.
"...응?"
그러다가 문득, 달빛 아래에 비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예쁜 황금색이로구나.
마치 보석과도 같은 색체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이 세상에, 아직까지 아름다움이 남아있었다니.
그대로 껄껄거리며 웃다가, 사레가 들려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이런."
제 손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본 레인이 짧게 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끝이 다가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