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2 - 떠나보내고, 받아들이다.(4)
무언가를 지키면서 싸운다는 건,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상대가 여럿이라면 그 정도는 더더욱 커지겠지.
마음 같아서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감히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대체, 어디로?
"빨리, 도망치세요!"
마족 아이가 외쳤다.
창백한 피부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지금까지는 잘 버티고 있었지만, 앞으로라면 어떨까.
"차라리 마왕님이 도망치시는 편이 저 마족에게는 더 좋을거에요."
"..."
할리벨의 속삭임에 입술을 깨물었다.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천천히 한 두 걸음 물러서다가, 이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겨우, 도망치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구나.'
스스로의 한심함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존재 자체가 방해라니, 이토록 비참한 상황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마수의 울음 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마왕님."
이름을 들어두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환멸감이 들었다.
뭐가 다행이야.
대체 뭐가 다행인데.
저 아이를 사지에 몰아넣고는 이름을 듣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 역겹구나.
"그래도, 거의 다 도착했어요."
할리벨이 손을 뻗었다.
저 멀리 보이는 화려한 불빛들에 절로 시선이 빼앗겼다.
거대한 도시의 풍경을 보는 건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이었다.
드디어 도착이구나.
저곳에 용사가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서 가세요. 용사의 엉덩이를 차주러 가야죠!"
"...그래. 그래야지."
잠시 숨을 고르고는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네가 너무도 간절해서, 이렇게 찾으러 왔어.
그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과연 무슨 말이 튀어나갈까.
아까의 그 남자가 쫒아올세라 서둘러 왕도를 향해 다리를 놀렸다.
***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대부분의 이들이 쉬쉬 하고 있기는 했지만, 최근 왕궁을 습격한 이에 대한 소문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대부분의 기사가 부상을 입거나 사망.
심지어 국왕 폐하까지 시해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은 왕도에 있던 이들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마족의 소행인게 분명해."
"하지만 마족들이 여기까지 침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경비병 녀석들이 돈만 주면 전부 통과시켜 준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불안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분노를 낳았다.
마침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존재들도 있었기에, 사람들의 증오는 왕도의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에게 향했다.
돈만 주면 누구에게든 문을 여는 더러운 녀석들.
마족들을 왕도 안으로 들인 역겨운 배신자들.
죽어 마땅한 놈들.
"그런 녀석들에게 우리들의 안전을 맡길 수 있겠소!"
가뜩이나 증오가 쌓이기 쉬운 시대였다.
자그마한 돌멩이는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기폭제가 되어주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번 일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증오란 상처를 숨기기에 가장 알맞는 도구였으니까.
"대체 귀족 녀석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마족들이 침공할 때도 제 목숨만 살겠다고 숨어있던 녀석들인데ㅡ"
"마족보다 더 악랄한 새끼들."
평소라면 조용히 있었을 사람들 또한 들고 일어났다.
마치 누군가가 선동이라도 하듯, 치명적인 극독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요."
"...그렇구나."
멀리서 볼 때는 분명 화려하기만 한 도시였는데, 정작 안으로 들어오니 상상 이상으로 어수선했다.
어두운 그늘 아래에 모여 쑥덕거리는 시민들.
골목길 안에서 무언가를 먼지작거리는 부랑자들.
그리고 지속적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는 경비병들까지.
"혹시 용사가 사고라도 친 걸까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언젠가 봤던 용사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집착으로 용사의 복수심을 억누를 수 있을 리가 없었는데.
그 정도로 짙고 어두운 감정이 쉽게 사라진다면 오히려 이상한게 아닐까.
"정말이지, 무엇 하나 나아지는게 없구나."
목표 따위 없는 삶을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것도 이미 반쯤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그런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몰리고 몰린 끝에 남은 선택지가 결국 용사라니.
"이럴 때일수록 더 조심하셔야 해요, 마왕님."
"그래."
지금은 여러모로 눈에 띄지 않는 편이 나았다.
광기에 물든 인간들의 눈에 띄었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으니까.
***
"그래서, 물건은 가지고 왔나? 마왕의 죽음을 증명하기 위한 뿔,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했을 텐데."
"..."
"아무래도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없는 것 같구나, 용사여."
인간의 악의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고, 동시에 아무런 이유 없이 발현되는 법이었다.
왕좌가 있는 홀.
그 주변에 걸려 있는 기괴한 그림이 담긴 액자들까지.
평소에는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을 것들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역시, 네 놈 짓이었구나."
"무엇이 말이지?"
용사의 말에 국왕ㅡ 바로니스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마신을 소환하려고 한 것 말이냐? 그것도 아니라면, 마족들을 소환한 것? 인간을 마족들로 만든 것? 마족들에 대한 여론을 조작한 것? 그것도 아니라면ㅡ"
내가 악마숭배자라는 것?
그 말을 끝으로, 기둥 뒤에서 검을 뽑아든 마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저들도 원래는 인간이었겠지.
눈이 먼 자들의 몰락한 모습에 용사가 자세를 잡았다.
"솔직히 이 정도로 빨리 도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왕좌의 손잡이를 두드리던 바로니스가 씨익, 하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토록 유쾌할 때가 또 있을까.
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지만 상대는 선택을 잘못했다.
설마 복수심에 눈이 멀어 호랑이의 입 안까지 제발로 걸어들어올 줄이야.
"지금이라도 기회를 주마. 마왕의 뿔을 가지고 있나?"
마족들의 힘만으로도 이토록 매력적인데, 마신이라면 또 어떨까.
어쩌면 그간 이루고 싶어했던 염원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확실하게 이룰 수 있겠지.
"만약 마왕의 뿔을 내게 준다면 네 소꿉친구를 되살려주마."
"...배신자 따위가 입은 잘 놀리는구나."
성검이 휘둘러져, 눈앞의 기사를 베어냈다.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하고 절명한 기사의 모습에 바로니스가 감탄사를 흘렸다.
과연 용사는 용사로구나.
하지만 기껏해야 하나.
용사 일행이 전부 왔다면 몰랐겠지만, 용사 하나라면야 우습지도 않았다.
"복수심에 눈이 멀었구나. 눈이 멀어도, 아주 한참 멀었어."
과연 마족화 한 인간 뿐일까.
품 안의 마석을 만지작거린 바로니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용사를 마족으로 만든다면 분명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지.
상상만 해도 즐겁기 그지 없었다.
***
용사님이 미쳤다는데?
용사님이 대륙을 배신하고 마왕의 편에 붙었데.
하지만 그 용사님이 설마 그런 짓을 하실까?
그런데, 얼마 전에 왕궁에 침입했던 마족 말이야.
그래, 그 이야기는 들었지.
그 마족이 용사님이라는 소문이 있더구만.
뭐? 그러면 용사님이 마족이라는 소리인가?
또 모르지, 국왕 폐하를 시해하기 위해서 지금껏 정체를 감추고 있었을지 말이야.
"용사가 한 짓이 맞았구나."
골목길 바깥을 훑어내며 한숨을 내뱉었다.
사고란 사고는 전부 치고 다니는구나.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잡히거나 죽지 않고 도망쳤다는 것 정도일까.
"용사가 왕궁을 습격했다면, 범인이 왕궁에 있다는 뜻일까요?"
"아마 그러겠지."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지만.
누가 마족을 소환했는지 따위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제일 궁금한 것은 용사의 행방이었으니까.
경비가 삼엄해진 이상, 왕도를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곳 어딘가에 분명 있다는 뜻일 텐데...
"용사님이 그럴 일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건."
"배신을 했다면 바로니스 국왕이 했겠지요! 지금까지 세계를 위해 마족들을 처단한 영웅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용사를 의심하는 자들 앞에 선 여인이 가슴팍 앞에 두 손을 그러모으고는 고함을 질렀다.
머리에는 흑색의 베일을 두르고 눈에는 안대를 쓴 수녀.
그녀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확실히, 용사다운 일들을 상당히 했나보구나."
"저에게 있어서는 마족 학살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요. 무엇보다, 마왕님을 이런 꼴로 만들기도 했고."
할리벨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용사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감정이 한가득 실려있다고나 할까.
저 멀리서 몰려오는 경비병들에 검은 베일의 수녀가 주춤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 잡힌다면 과연 무슨 꼴을 당하게 될까.
어떻게든 용사를 배신자로 만드려는 여론에 맞선 존재이니 분명 험한 꼴을 당하게 되겠지.
"역시 친절하시네요, 마왕님."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골목길을 스쳐 지나가려는 수녀를 향해 손을 뻗어, 그대로 골목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곳을 더듬던 상대가 돌연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왕님."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