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5 - 떠나보내고, 받아들이다.(7)
왕도 밖으로 빠져나가, 한참을 달려댔다.
품 안에 안긴 온기가 빠져나갈 것만 같아서 불안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그녀를 잃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칼을 뽑아내면 어떻게 할 거지?
아리엘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아서."
"...응."
"......목이 너무 말라."
폐허 안에 들어서, 그 가느다란 몸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죽 주머니를 꺼내든 용사가 그 안에 담긴 물을 흘려보냈다.
마치 아기새가 먹이를 받아먹듯 물을 마신 아리엘이 그대로 깊은 숨을 토해냈다.
그 뜨거운 열기에 뇌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뽑을게."
"...그래."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계속 놓아뒀다가는 팔을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녀가 버텨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뽑지 않는다면 반드시 죽는다.
뽑는다면, 살 수도 있다.
"...!!! 으, 흐아아아악...?!!?!!?!"
"심호흡 해. 천천히, 천천히..."
검붉은 피가 눌어붙은 검을 내던지고는 그대로 어깨를 짓눌렀다.
손바닥 전체를 물들이는 핏자국에 현기증이 일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제발, 제발 버텨줘.
헐떡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리엘의 숨이 몇 번이고 넘어갔다.
곧 있으면 끊겨버릴 듯 희미해지는 숨소리에 아서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아리엘, 아리엘..."
"...흐으."
피가 완전히 멈춘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다.
창백하게 물든 얼굴로 저를 올려다 보는 상대에 이를 악물며 상처 부위를 천으로 감쌌다.
고비는 넘겼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대로 상처를 놓아둔다면 분명 팔이 썩어갈 것이 분명했으니까.
"의사가 필요해..."
하지만, 어디에서 찾지?
왕도로 다시 돌아간다는 선택지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아리엘, 조금만 버텨줘."
"..."
제 어깨에 둘러져 있던 망토를 덮어씌우고는 그대로, 그녀를 등에 업었다.
왕국의 눈길을 피할 수 있으면서도 아리엘을 보호할 수 있는 곳.
용사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북쪽을 향했다.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가 그곳이라니.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그곳만이 남았구나.'
용사가 헛웃음을 흘렸다.
운명이란 건, 왜 이렇게 얄궃은 건지 모르겠구나.
짧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아서."
"깼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눈을 뜨니 몰려오는 현기증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니까, 통로의 문을 여는 순간 습격 당했었지.
어깨가 깔끔하게 관통당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여기가, 어디지?"
"북부야."
공기가 차가웠다.
체온이 원래부터 낮아서 그런지 주변이 더더욱 차갑게만 느껴졌다.
망토가 아니었다면 분명 몸을 덜덜 떨고 있었겠지.
"용케도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구나."
깔끔하게 치워진 방과 깨끗한 의복까지.
손목에서 살랑거리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에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당분간 오른팔은 쓰기 힘들 거야."
"그렇구나."
힘을 주려고 하면 마치 불에 타오르는 듯 아파와서 결국 포기했다.
이 정도라면 당분간이 아니라 영원히 못 쓸 수도 있겠는걸.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리자, 초췌해진 얼굴이 시야 한 가득 들어왔다.
"걱정, 많이 했어?"
"...당연하지."
마치 한숨도 못 잔 사람 같은 몰골이었다.
분명 나를 살리겠답시고 하루 종일 달려서 이곳에 도착한거겠지.
기특하네.
웃기기도 하고.
"차라리 첫 만남 때, 네가 나를 죽였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
"..."
원망의 감정은 담지 않았다.
그런 검은색을 품에 안기에는 이미 너무 지쳐버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 차라리 그때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살고 싶어서는 발버둥이었을까.
"또 복수하러 갈 생각이야?"
"...아니."
"줏대 없기는."
푸스스,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는 복수를 하겠다며 영영 떠날듯이 굴더니, 이제는 아주 내 곁에 눌러앉을 것처럼 굴었다.
용사는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생각보다 더 우스워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바보 같아.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 마신전으로 가기에는 너무 일렀다.
무엇보다 마신전으로 향하려면 왕국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린이니까 잘 지내고 있겠지.
그 누구보다 어른스러운 아이니까 분명 잘 지내고 있을게 분명했다.
믿고 있어.
믿고 있으니까...
"미안, 아리엘."
"..."
그런 내 말에도, 용사는 그저 사과를 할 뿐이었다.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사과.
그리고ㅡ
"용사가 마왕에게 홀렸다는 소식이 돌던데,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구나."
별안간 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가장 앞에 서있던 여자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려댔다.
에반젤린 폰 트리슈라움.
북부의 여왕이자, 용사에게 구애하던 캐릭터였다.
"저 여자를 지하 감옥에 가둬라."
"예, 폐하."
나를 일으키는 손길에 부드러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른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지금 받는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를..."
"..."
"나를 살리려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구나."
씹어뱉듯이 말하니 여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왕인 내가 저를 보고 악마라고 부른게 참으로 우스운 듯 싶었다.
그래, 우습겠지.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만 기다려. 반드시 꺼내줄 테니까."
"...그래."
진실이 담겨 있기는 했지만, 그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인간 중 어느 누가 마왕을 지하 감옥에서 풀어줄 생각을 할까.
하물며 그것이 저 여왕이라면 특히 더.
방 밖으로 끌려가니 뭔가 웃음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최후를 지하 감옥에서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언젠가 지냈던 반지하보다 훨씬 더 음습하고 칙칙한 곳이었다.
입고 있는 옷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에 절로 실소가 나왔다.
어둡고, 습하고, 무엇보다 추웠다.
어쩌면 나를 얼어죽게 만드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깨어나셔서 다행이네요, 마왕님."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용사를 만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 같았는데, 이상과 현실은 역시 다른 법이었다.
"차라리 미쳐서 다행이야. 너와 이렇게 대화도 나눌 수 있으니."
"마왕님은 미치지 않으셨어요."
"아니, 나는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이미 죽은 사람과 대화를 한다고 착각할 리가 없지.
그 전으로 가보면, 용사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것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에게서 존엄을 죽여버린 존재에게 사랑을 속삭였다고?
미쳤구나, 미쳤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용사를 믿어보는 건 어떨까요? 거짓을 말하는 눈빛은 아니었으니까요."
"...믿음, 믿음이라."
그와 내 사이에 언제부터 믿음이 생겼었더라.
...
...사실 그런적 따위 없었잖아, 안 그래?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 번 발작이 일어났다.
텅 빈 지하 감옥이라서 다행이었다.
무언가 물건이라도 있었다면 분명 이곳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마왕님은, 지금 너무 아프셔서 그런거에요. 몸이 아니라 마음이."
할리벨의 손가락이 내 가슴께를 꾹 눌렀다.
평소에는 신경조차 안 쓰고 있던 심장 박동이, 오늘따라 더욱 요란하게 날뛰고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라...
응, 지금 생각하니 아픈 것 같네.
"할리벨, 왜 나를 두고 죽은 게냐. 너만은, 죽지 않기를 바랬는데... 왜."
잡히지 않는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연하게도, 내 손은 상대를 붙잡지 못했다.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볼거라면 차라리 손에라도 잡히지.
왜 그것 만큼은 허락하지 않아서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 건데.
"괜찮아요. 저는 여기에 있을 거니까, 마왕님 혼자 계시는게 아니에요."
앉아있는 것도 고통스러워, 차가운 감옥 바닥에 몸을 뉘였다.
뼈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한기에 심장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이대로 얼어버리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주 작은 열기에도 충분할 정도의 온기를 얻을 수 있게 될 테니까.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걸지도 몰라."
멍청히 중얼거렸다.
차라리 마신전에 있었다면.
린과 아이들로 만족해,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용사 같은 건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냥 그곳에서 그렇게 살았다면 차라리 더 낫지 않았을까?
"식사다."
감옥 안으로 음식이 들어왔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스프와 딱딱한 빵.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딱딱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간수의 눈에 한 줄기의 빛이 흘렀다.
"네가 먹거라."
척박한 북부에서 식사가 흔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것이 마족과 전쟁이 끝난 직후라면.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보며 차마 음식을 손에 댈 수가 없었다.
다시 감옥 밖으로 음식을 밀어내고는, 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오른팔이 떨어질 듯이 아파왔지만, 어떻게든 버틸만 했다.
"결국 이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될까..."
해피 엔딩이라고 적힌 글귀를 떠올렸다.
해피 엔딩.
주인공이 행복하게 지내는 이야기의 마지막.
죽인 만큼 낳는 마왕의 주인공은 과연 마왕일까, 혹은 용사일까.
엉덩이를 파고드는 한기가 서러워 킁, 하고 코를 울렸다.
겨울이 오려는 것 같았다.
아주 길고 긴 겨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