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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37화 (137/342)

Chapter 137 - 겨울의 끝은...(2)

"마음은 정했나?"

"...그렇습니다."

에반젤린이 용사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부군이 될 것.

그 이유라고 한다면 상대가 마음에 든 것도 있었지만, 강한 남성의 씨앗을 가지고 싶다는게 가장 컸다.

북부를 통일한 자신과 마족들을 도륙내던 역전의 용사 사이에서는 어떤 아이가 태어날까.

기대감을 참을 수 없어서 한참이고 키득거렸더랬지.

"벌써 1년 동안이나 기다렸다. 네가 내 옆에 서기를 어찌나 바라왔던지..."

"...그렇습니까."

"너와 내가 함께한다면, 동시에 너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함께한다면 혼란에 빠진 대륙을 하나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대륙 통일. 이 어찌나 아름다운 울림이던가.

모든 선조들이 해내지 못했던 일을 자신의 대에서 끝마칠 수 있는 기회라니.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존재가 바로 마족과 마왕이라는 존재였지만, 지금만큼은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장 큰 적이던 왕국에서 내분이 일어난 지금이 바로 적기였으니까.

"자, 트리슈라움이 될 준비는 되었나?"

북부의 한기를 담은 손길이 용사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는 어떠한 유혹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그 어떤 여인의 것보다 관능적인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세상을 가질 수 있어.

내가, 그리고 네가ㅡ 아니,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어.

"이미 내 구애를 거절한 이에게 또 구애를 하는 건 모양새가 살지 않지만, 그 정도로 내가 너를 원하고 있다는 거다."

북부의 사랑은 약탈의 사랑이었다.

원한다면 것이 있다면 힘으로 빼앗는다.

하지만 용사는 에반젤린이 힘으로 빼앗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닿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은 점점 커져만 갔다.

분명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는데, 그녀의 경우에는 반대였다.

지금껏 이어져 내려온 정복자의 핏줄이 멀어진 것에 대한 갈망을 더더욱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북부의 통일.

그 다음에는 대륙의 통일을 위한 야망.

그 뒤에는 용사까지.

"어서 빨리 내 것이 되다오, 아스테리아."

내 것이 되어, 세계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꾸나.

새빻갛게 물든 입술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이제, 물러설 곳은 없었다.

***

"마족도 배신감을 느끼나?"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간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신감이라면 모든 지성체가 느낄 수 있는 감정 아닐까.

꽤나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 한 두번은 아니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용사님과 긴밀한 사이라고 전해들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내가 용사와 긴밀하다고?

확실히, 긴밀하기는 하지.

칼에 찔린 마왕을 업고 막무가내로 북부의 문을 두드릴 정도인데, 당연히 긴밀하고 말고.

"용사님과 여왕님이 혼인을 하신다고 하더군."

"...그런가."

예상, 했나?

머리가 아려와서 이마를 꾹꾹 짓눌렀다.

가능성 중 하나로 남겨두고는 있었다.

북부의 여왕, 에반젤린 폰 트리슈라움이란 여자는 그런 여자였으니까.

어쩌면 나를 풀어주는 것에 대한 대가로 여왕이 권한 혼인을 수락했을지도 모르지.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둘이 혼인을 한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달라진다고 한다면 이 얼어붙은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가는 것 정도겠지.

...응, 단지 그 정도야.

"..."

그 정도일 뿐일 텐데, 왜.

"마왕님..."

"바보 같구나. 분명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아야 정상이거늘. 분명,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아야 정상이거늘, 왜. 어쩌서, 대체..."

집착일 뿐이었잖아.

사랑이 아니었잖아.

너를 망가뜨린 사람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일종의 정신병일 뿐이었잖아.

그런데, 그런데 대체 왜.

"...아서."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 말조차 거짓말이었던 거야?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아니야.

이건 배신감 때문에 웃는게 아니야.

그냥 기뻐서 웃는 거라고.

드디어 그 바보 같은 녀석을 떨어뜨려 놓을 수 있게 됐네.

세상의 반이 남자라고, 아이를 만드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까.

그래도. 그래도!

"아서, 아서, 아서... 왜?"

너라면 얼마든지 그 여자를 뿌리칠 수 있잖아.

뿌리치고, 이 어둡고 차가운 곳에 갇힌 나를 꺼내줄 수 있었잖아.

그런데 왜 그런 선택을 했어?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오른팔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절반만 겨우 가리고는, 오른쪽으로는 엉엉 울었다.

"용사가 나빴네요. 역시 처음 봤을 때 그 볼기짝을 마구 때려줬어야 했는데."

할리벨이 내 등을 쓰다듬었다.

정말 당연하게도, 그 어떠한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감옥 안을 울음 소리로 가득 채웠지만 간수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배려하는 걸까, 아니면 무시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더 이상은 아무래도 좋았다.

"린..."

아이가 보고 싶었다.

아이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결국 내 곁에 남아줄 수 있는 건, 오직 그 아이 뿐이었는데 왜 이런 바보 같은 착각을 했던 걸까.

몸에 서린 한기가 따가웠다.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차가운 숨결에 세포 하나하나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까.'

언제나 그랬지.

자고 일어나면 다 꿈일 거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다 헛된 망상에 불과했지만, 멍청한 나는 또 다시 그 희미한 가능성에 손을 뻗어냈다.

내일이 오면,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

얼마나 잤을까.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휘적이려 했지만, 역시나 말을 듣지 않았다.

어째서 깬 걸까.

분명 한기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아."

몸 위에 덮여져 있는 망토에서 그의 향이 났다.

뺨을 간질이는 털뭉치 너머로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바보구나, 정말.

"아리엘."

"...응."

내가 보고 있는 건 진짜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차라리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대체 난 어디까지 비참해져야 하는 걸까.

"여왕과 혼인을 올린다고 들었어."

형편없이 갈라지고,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였지만 뜻만큼은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나를 향해 뻗어지는 손길에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지금 내뱉는 말들이 단순한 투정에 불과하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꺼내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데, 나는 더 많은 것을 바랬다.

"나는, 이제 사랑하지 않는 거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린아이의 투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데 상대는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는, 그런 유치한 질투.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기를 원했다면 너는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지 말았어야만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넘어갈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일단 나가자."

"싫다."

힘 없이 용사의 손을 뿌리쳤다.

본인의 힘에 비하면 새발의 피조차 되지 않는 미약한 저항이었지만, 그는 순순히 내 팔을 놓아주었다.

이제 나를 포기하겠다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나를 배려해준 걸까.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 앞에 있는 용사라는 존재 자체가 미워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내가 죽게 두지 그랬느냐. 그 여자랑 혼인해서 잘 먹고 잘 살면 되잖느냐?!"

"..."

"그럴 거면 차라리 나랑 같이 죽었어야지. 아니, 나라도 죽였어야지!"

꼴이 아주 우스웠다.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은 몸에, 순식간에 무너져내릴 정신까지.

무엇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ㅡ 대체 어디까지 망가져야 이 빌어먹을 삶이 끝나게 될까.

"억지로라도 데려갈 거야."

"네가 무슨 권리로ㅡ 흣?!"

억지로 안아올려졌다.

어깨를 두들겨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오른팔이 움직이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발버둥을 아무리 열침히 쳐봐도 용사의 품 안에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용사에게 붙들린 채 감옥을 빠져나갔다.

지하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가니 아래보다는 따뜻한 공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봐, 손발이 꽁꽁 얼었잖아."

희미안 온기가 맴도는 방 안에서, 용사가 읊조렸다.

퍼렇게 올라온 피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있었다.

"신경쓰지, 말거라."

손가락을 까딱이니 마치 사포에라도 쓸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얼어붙은 신경이 주변의 온기에 녹아내리니 마비되어 있던 감각들이 고통이 되어 나를 찾아왔다.

아픈 건 싫은데.

손발 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어깨를 덜덜 떨었다.

'차라리 얼어있을 때가 더 나았어.'

움직이지 않는 발가락을 노려보며 눈물을 찔끔거리니, 용사가 내 손을 제 앞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제 앞으로 내 손을 가져가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손등.

그 다음에는 팔.

그 뒤에는 목.

쇄골.

허리.

무릎.

정강이.

발목.

"그, 그만, 그만하거라..."

용사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 불에 데인 듯 달아올랐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신체가 용사가 내뿜는 온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발등과 발바닥에 입을 맞추니 꽝꽝 얼어있던 발가락이 꼼질거리게 되었다.

미친놈.

진짜 미친놈이야.

숨을 몰아쉬며 외치려다가, 문득 완전히 녹지 않은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팔을 뻗어, 아서의 옷깃을 쥐고는, 그대로 끌어당긴다.

한 순간에 가까워진 녹색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고는ㅡ

"..."

"..."

ㅡ입술이 맞아, 숨결이 섞여들었다.

심장이 녹아내리는 감각을 느끼며 그대로 눈꼬리를 휘었다.

아무래도, 나는 미친게 맞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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