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9 - 겨울의 끝은...(4)
오랜 겨울의 끝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평범하게 끝났다.
이름 모를 신전에서 면사포를 뒤집어 쓰고,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하객은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할리벨과, 불만 가득한 표정의 여왕 뿐이었다.
차가운 겨울과도 같은 왕국에서 봄이 피어난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니 아서가 내 뺨에 손을 올렸다.
"주례조차 없는 결혼식이라니, 마왕과 용사의 결혼식 치고는 상당히 소박하구나."
"그래서, 싫어?"
"...아니."
오히려 소박한게 좋았다.
언젠가 결혼식을 올린다면 두 사람만 모여서, 주례도 없이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물론 내쪽이 신부가 될 줄은 몰랐지만서도.
"정말, 나랑 결혼식을 올려도 되겠어?"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물었다.
아무리 같은 이름의 사람이라고 한들 절대 동일 인물은 아니었다.
아리엘이지만, 아리엘이 아니야.
너와 함께 아이를 만들다 보면 분명 언젠가는 네 소꿉친구인 아리엘 또한 태어나게 되겠지.
그때가 되어서, 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할까?
아니면 네 소꿉친구인 아리엘을 사랑하게 될까.
"내가 선택한 건 너야, 아리엘."
"...읏."
아서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건 소꿉친구인 아리엘이 아니라, 마왕인 아리엘이었다.
그래.
응, 그렇구나.
그런 거네.
"...좋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결국 참지 못했는지 시야가 뿌옇게 물들었지만, 결혼식에서까지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웃자. 그냥 웃는 거야.
활짝 웃으니 상대 또한 미소로 화답해줬다.
다행히,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사랑의 키스라던가 그런 건 안 하나?"
싸늘하지만, 동시에 능글맞은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광광 울렸다.
갑자기 깨져나간 진지한 분위기에 고개를 돌리니, 여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왕국 출신들은 결혼식을 할 때 사랑의 키스를 나눈다고 들어서 말이지."
"...북부는 다른가 보지?"
겁도 없이 째려보니 피식 웃어보인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저 여자.
"북부에서는 결혼식을 올릴 때 상대의 입술을 물어뜯고 서로의 피를 마시지."
"야만적이로군."
"입술은 입을 의미하고, 입은 진실을 의미하지. 그곳에서 나온 피를 나눈다는 건, 진실로 서로를 사랑한다는 걸 영혼에 새기겠다는 뜻이다."
뭔가 지어낸 이야기 같았지만, 여왕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거짓도 섞여있지 않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윽?!"
"어때, 좋지 않느냐? 북부에 있으니 북부 식으로 인연을 맺는 건."
아서의 입술을 콱 깨물고는, 그 사이에서 터져나온 핏방울을 슬쩍 빨아냈다.
멍하니 그런 나를 바라보는 아서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자, 이제 네 차례야.
"아픈 건 싫지만, 지금 만큼은 봐주마."
"...그래."
천천히 다가온 얼굴과 동시에 입술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진한 쓰라림과 함께 아서의 혀가 상처 부위를 핥아내렸다.
서로의 피를 나눴으니 이제부터는 하나로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러면 결혼식은 끝. 이제 다음 주제로 넘어가지."
여왕이 짝짝, 하고 박수를 쳐댔다.
행복의 여운을 즐길 틈도 없이 이어지는 상황에 표정을 찌푸리니, 날카로운 눈매가 나를 향했다.
쓸모 없는 골칫덩이를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왕국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왕도 내부의 반란이 아직 진정되지 않았을 텐데, 용사의 배신 하나를 빌미로 군대를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대체 마왕이 뭐라고.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못살게 구는 걸까.
어이가 없으려니 괜히 화가 났다.
"뭐, 곧바로 침략을 해오지는 않겠지. 북부의 겨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군을 일으켰다고 한들, 그것이 곧바로 북부로 향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쩌면 혼란해진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보여주기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감이, 분명 그들이 북부와 전쟁을 할 것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여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내 복부 쪽을 향했다.
둥글게 부풀어 올라, 안쪽이 무언가가 있다고 알리는 듯한 그곳으로.
"...마족은 원래 아이를 하루 하침에 가지는 건가?"
충격을 받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평소에는 언제나 무표정에 사나운 눈매를 가진 사람이 저런 얼굴을 하니 꽤 볼만했다.
확실히, 하룻밤만에 만삭이 되어버리는 건 이상하긴 하지.
"내가 이상한거다. 너무 신경쓰지 말도록."
"...이상한게 아니라, 특별한 거야."
정말 그럴까.
부드럽게 말해오는 목소리는 정말이지 더 없을 정도로 달콤했지만, 나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여신의 축복ㅡ 혹은 저주를 받아서 이렇게 된 건데, 과연 특별하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 정도 속도라면 부국강병은 꿈도 아니겠군."
"...에반젤린 여왕,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런 말은ㅡ"
"너무 흥분하지 말지. 그냥 농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능글맞게 넘어간다.
분명 기분 나쁠 정도였는데, 특유의 당당한 태도나 표정 때문에 미운털이 박히지 않는 것이 신기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에게서 이 녀석을 빼앗으려 했다는 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지만서도.
"그리고, 이제는 자네가 모시게 될 주군인데 그런 태도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조금 상처 받아."
여왕의 손이 아서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서가 나를 위해 손해를 감수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보.
이제는 내가 죽게 내버려 두라고 외칠 수도 없는 입장이 되어서 그런가 겨우 그 정도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아무튼, 조만간 또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지는 여왕의 모습에 아서가 혀를 찼다.
마지막까지 제멋대로인 사람이구나.
북부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형상화 된다면 딱 저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 저번에 못했던 것의 끝을 보자꾸나."
"..."
"왜 그러느냐?"
"말투, 원래대로 돌아왔다 싶어서."
그런가?
기억을 되새긴다.
그러니까, 어제 관계를 나누면서...
'가아♥ 가아버려♥ 그, 만...♥'
'여,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흣...♥'
'키스, 키스 해줘, 키스...♥'
...
"..."
뭐야, 이 기억.
몸이 반사적으로 잊고 있던 것들이 쓰나미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안고, 물고, 빨고, 들리고.
온갖 체위로 정을 나눈 끝에 기절하고 일어나니 결혼식 이야기가 나왔지.
보통이라면 생각을 해봤겠지만 그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승낙했고, 결국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잊어줘..."
"노력할게."
"노력하지 말고, 잊어!!"
아서의 어깨를 탁탁 내려치자 부드러운 손길로 붙잡아 온다.
왼손 약지에 천천히 끼워져 오는 반지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무드 없는 자식.
내가 무드를 찾는 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나였다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반지를 끼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뭐..."
황금색의 보석.
내 눈동자의 색과, 그리고 아서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의 보석.
아서의 왼손에도 끼워진 반지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까치발을 짚어,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했다.
오른팔을 쓸 수가 없어서 잠시 휘청이기는 했지만, 아서가 붙잡아 준 덕분에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결혼 반지는 구속을 뜻하는거 알고 있어?"
"너에게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야."
부끄러운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야겜 주인공이었지.
입에 버터가 발린 듯한 말을 잘도 해댄다.
원래라면 소꿉친구인 아리엘에게나 했을 터였을 텐데.
"행복해 보이시니 다행이네요, 마왕님."
"...할리벨."
내 등 뒤에 매달린 할리벨이 빙긋 미소지었다.
무슨 반응을 보여줘야 할까.
아서를 그렇게나 싫어히던 녀석이었는데, 정작 내가 아서와 결혼을 하니 축하 인사를 던져댔다.
여기서는 순수하게 기뻐하는게 낫겠지.
언제나 내 행복을 기원하던 할리벨이니, 분명 괜찮을 터였다.
"아리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서한테는 안 보이겠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물론이고.
씁쓸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할리벨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내 스스로가 미쳤다고 자학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자, 방으로 가자. 이제는 움직이는 것도 불편하구나."
"...그래."
기분이 가라앉으니 원래의 말투가 튀어나왔다.
원래, 원래라.
원래라고 한다면 이 구닥다리 같은 말투일까, 아니면 평범하게 말할 때의 말투일까.
"꺄아?!"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나를 안아드는 아서에 비명을 질렀다.
예, 예고도 없이 들어올리고 말이야!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를슬슬 쓰다듬으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기가 놀랐으면 어쩌려고 그런 건데?
"이번에는 남자아이가 태어날까, 아니면 여자아이가 태어날까."
"너를 닮은 여자아이였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나나 아서,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아이가 태어나겠지.
그럼에도 내 배에서 태어나는 건 다름 없으니 전력으로 사랑할 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