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0 - 분홍빛 봄.(1)
"마왕님, 섹스가 태교에 좋다는 사실을 아세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였는데, 돌연 할리벨이 그런 말을 해왔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데.
뭔가 험한 말이 나갈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으니 뭔가 해명하듯이 허둥지둥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임산부가 섹스를 하면서 느끼는 행복의 감정이 뱃속의 아기에게도 전달되어서 여러모로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구요!"
"...거짓말."
"제가 언제 마왕님께 거짓말 했던 적 있나요? 진짜에요. 한 번 믿어 보세요!"
진짜?
진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성검을 손질하고 있는 아서의 모습을 슬쩍 바라봤다.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크치 않은 것 같은데 말이지...
'커졌을 때는 진짜...'
자지로 사람을 패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무지막지한 크기가 내 안에 전부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이것도 분명 픽션의 영역이겠지만.
"아서."
"응, 아리엘."
눈을 맞추니 괜히 또 달아올랐다.
어제 있었던 섹스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이 몸뚱이가 이미 아서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잔뜩 상기시키는 것 같달까.
완전히, 하나의 암컷이나 다름 없었다.
"...이리로, 잠시만."
할리벨의 말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섹스를 하면서도 아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그것 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데 말이지.
'저걸 넣었다가는, 분명 뱃속의 아기가 망가질 거야.'
그런 꼴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나 좀 도와다오."
기분 좋아지는게 아기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섹스가 아니더라도 방법이 있었다.
나에게 다가온 아서의 팔을 꼭 붙잡고는 슬며시 뜰어당겼다.
커다란 흉부가 아서의 팔뚝에 뭉개져 그 형상을 잃었다.
"아, 아리엘? 갑자기 무슨ㅡ"
"내가 기분 좋으면, 아기에게도 좋데."
자그맣게 속삭이니, 아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 하는구나.
이미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인데 말이지.
"그러니까, 응. 알겠지?"
그 뒤에는 뭐, 아서의 손가락이 쭈글쭈글 해질 때까지 엄청나게 즐겼다.
***
출산의 고통이란게 익숙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지 않을까.
있는 힘껏 아서의 손을 붙잡고는 표정을 찡그렸다.
울고 싶어.
길 가다가 넘어진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어.
"...어디 가지 마."
"널 두고 갈 리가 없잖아."
말은 잘해, 진짜. 듣기는 더럽게 안 들었으면서.
그래도 뭐랄까, 옆에 있어주니까 나쁘지는 않네.
점점 커져가는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니, 아서가 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주었다.
"윽, 흐아아아..."
나온다.
반사적으로 알 수 있었다.
뱃속에 잠들어 있는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괜찮다고 말해줘."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괜찮아, 아리엘."
"...믿을게."
그 말을 끝으로 복부에 힘을 꾹 주었다.
제발 쉽게 나와주려무나.
아기를 낳는다는 단순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처음과 같이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내장이 뒤틀려 버릴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힛, 힉, 흐으... 흣, 흐으..."
출산의 순간을 직접 눈 앞에서 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심각해진 표정의 아서에 긴장이 픽픽 풀렸다.
아픈 건 그대로였지만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지는 않달까.
괜히 웃음이 나서 실실 웃으니 아서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괜찮아."
잠시 소강 상태였다가, 다시 한 번 아기를 밀어낸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힘을 주니, 골반이 열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아이의 머리가 툭 튀어나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줘."
"흣, 으... 흐아아아아..."
이거 정말, 백만 명을 전부 낳을 수 있는게 맞는 걸까.
뱃속의 장기 하나가 쑥 뽑혀져 나오는 듯한 감각과 함께 아기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
"으앙, 으앙, 으아아아아앙!!!!"
아기는 서럽게 울었다.
분명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음에도 뭔가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나를 두려워 하는게 맞겠지.
"아리엘."
"괜찮아. 정말, 괜찮아."
분홍에 가까운 붉은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그와 같은 색의 눈동자까지.
성별 또한 여자아이였으니, 분명 나와 아서가 떠올리고 있는 그 사람이 맞을 터였다.
에밀리 디체페이글.
나를 죽도록 괴롭히고, 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해 폐륜을 저지른ㅡ 나와 아서의 손에 죽은 존재.
"아가."
"흐으, 흐아아아아아아앙!!!!"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아기는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격하게 반응하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미 기억을 가지고 있구나.'
차라리 잘 된 일일까.
아니면, 이것 또한 내게 찾아온 무수히 많은 불행 중 하나인 걸까.
뺨을 쓸어내리랴고 손을 뻗자, 마치 간질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마구 경련해댄다.
분명 내가 복수해야 할 대상인 건 맞았지만, 차마 아기에게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다.
"아서."
"...알겠어."
말 없이 성검의 손잡이를 쥔 아서를 제지했다.
품에 안긴 에밀리를 슬픈 눈으로 내려다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품에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들기에는 조금 버거웠지만, 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붙들었다.
"내가 무섭니?"
"..."
자리를 비켜주는 아서의 뒷모습을 흘긋거리다가,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어느새 동그랗게 떠진 분홍빛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로지 공포로만 이루어진 감정.
뱃속에서 나온 아기가 자신을 이런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으니, 뭐랄까...
"슬프구나."
잊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에밀리라는 존재가 나에게 한 짓은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는 짓이었으니.
아프고, 무섭고, 증오스러웠다.
내 손으로 죽일 당시에는 다시 태어나는 순간 죽이고, 또 죽이겠다고 맹세했었지.
아니,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마왕님, 죽이는게 가장 큰 복수가 되는 건 아니에요."
할리벨의 꼬리가 아기의 뺨을 콕콕 찔렀다.
마왕님이 이 망할 인간을 죽이게 된다면, 마왕님을 모체로 삼아서 다시 태어나게 되겠죠.
그렇게 된다면 마왕님은 또 출산의 고통을 느끼시게 될 테고요.
"죽이지 않는게 가장 큰 복수에요. 린, 그 꼬맹이도 있으니까."
"...알고 있다."
얌전해진 아기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기는 잠이 많다더니, 잔뜩 긴장한 와중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이 내가 알던 그 찢어죽일 년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하긴, 어떤 생물이던지 새끼일 때는 귀엽다고 하니까.
"복수에 대한 건,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하자꾸나."
울듯한 표정이 된 아기를 바라보며 빙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에밀리 디체페이글.
마왕의 몸을 빌어 다시 태어난 그녀는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갔다.
언제 죽일지 몰라.
어쩌면, 내가 스승님께 했던 짓을 똑같이 할지도 모르지.
조금만 높아지면 울음을 터뜨렸고, 마왕과 눈이 마주치면 비명을 질렀다.
싫어.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마.
증오와 분노, 그리고 사랑이라는 모순된 감정들이 들어찬 그 눈동자가 무서웠다.
"에밀리."
"...왜 부르는데."
"...에밀리."
"왜 부르냐니까?!"
걷고, 말을 하기 시작할 즈음에는 언제나 이름을 불러댄다.
마치 본인이 나의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공포에 떨며, 반사적으로 신경질을 내도 마왕이 하는 말은 바뀌지 않았다.
"에밀리."
단 세 글자.
자신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를 뿐이었지.
처음에는 저게 무슨 미친짓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 답을 깨닫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네."
"그리고?"
"...엄마."
"잘했어."
정수리에 손길이 느껴진다.
언제나 스승님의 손길만이 닿던 그곳에, 마왕의 손길이 닿고 있었다.
짜증나. 싫어. 쳐내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두 눈동자에 담긴 진득한 감정에 겁을 집어먹어, 결국에는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버리는 것이었다.
"내 엄마 행세라도 하겠다는 거야?"
"에밀리."
"...요."
"요를 붙인다고 다 존댓말이 되는 건 아니란다."
작은 힘과 함께 볼이 주욱 늘려졌다.
분명 나를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던 존재가 이토록 친절하게 대해주는 이유가 뭘까.
안심하고 있을 때 더 큰 절망을 주기 위해서?
아니면, 나 따위는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휘둘릴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차라리, 차라리 아서한테 죽이라고 해."
이딴 식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스승님께 저지른 죄와 그토록 증오하고 증오 받던 존재에게 받는 애정.
마음 같아서는 다시 한 번 자살을 택하고 싶었지만, 마왕이 계속 옆에 붙어있는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절대 그러지 않을 거란다, 아가."
"..."
"이게, 내가 너한테 하는 최고의 복수니까."
그토록 혐오하던 마왕의 아이가 되어, 그 마왕을 어머니라고 칭한다.
꼬박꼬박 존대를 쓰고, 한 침대에서 자고, 같은 음식을 먹고, 사랑을 받는다.
죽음을 바라는 자에게 죽음은 당사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이런 형태의 복수를 택한 것이겠지.
"그래, 그렇지. 계약을 하자꾸나, 아가."
마왕의 목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한 눈빛에, 에밀리는 마른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완벽한 외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