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1 - 분홍빛 봄.(2)
'절대 죽지 않겠다고 계약해. 그렇게 한다면, 린을 만나게 해줄 테니까.'
그런 말을 했었지.
표정이 희게 변해서는 절대 싫다고 말하던 에밀리였지만, 린은 너를 싫어하지 않을거라는 말에 우물쭈물 계약을 나눴더랬다.
얼마 뒤에는 후회하는 듯한 표정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에밀리, 이리로 오렴."
"...내가 계약한 건 죽지 않겠다는 것 뿐이었지, 네 행동들을 받아주겠다는 뜻이 아니ㅡ"
"에밀리."
"......네."
상황이 역전되니 웃길 노릇이었다.
나를 괴롭히던 녀석이 내 눈치를 보고, 내가 보내는 애정을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결국에는 받아들인다.
그래, 에밀리.
너도 사랑에 굶주려 있던거잖아.
네가 그토록 혐오하던 마족ㅡ 마왕이 주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말이야.
"머리 쓰다듬지마."
"존댓말."
"...요."
입술을 비죽 내밀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이 같아서 그런지 린과 상당히 닮아보이기도 했고.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에 직접 낳았다는 것을 제외해도 그런 이유 또한 있을 것이 분명했다.
"린을 닮았구나."
"..."
부끄러움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내가 린과 닮았다고 말하면 에밀리는 언제나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다.
제 스승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다녀왔어."
"왔구나."
쪽, 하고 입술이 붙었다 떨어진다.
에밀리는 그런 우리 둘을 보며 표정을 와락 구겨대고 있었다.
확실히, 죽었다 살아났는데 마왕과 용사가 부부가 되어있다면 충분히 저런 반응을 보일 법도 했다.
"오늘은 뭐 하고 왔어?"
"여왕과 대화를 좀..."
에반젤린 여왕을 모시게 되었다고는 해도, 아서가 딱히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여왕과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
물론 나는 그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만남마저도 하나의 의무였기에 말릴 수가 없었다.
"고생했어, 오늘도."
그런 말을 하며 품 안에 얌전히 안긴 에밀리를 토닥였다.
에밀리와 아서는 언제나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살의를 가진 쪽과 살해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쪽이 서로를 최대한 배려한 것에 대한 결과였다.
"어째 마왕님보다 용사가 그 인간을 더 싫어하는 것 같네요."
그런 아서가 신기하다는 듯 할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실히 두 사람은 마왕 처단을 위해 함께했던 동료 사이였었으니까.
설마 이런 관계가 되어버릴 줄은 몰랐겠지.
이제 에밀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린 하나 뿐이었다.
그마저도 지금 당장은 만날 수 없었지만서도.
'린, 잘 지내고 있니?'
믿음직한 아이이니 분명 잘 지내고 있을 테지만, 불안감을 전부 감출 수는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가지고 있고, 어른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다고는 하지만 아직 신체적으로는 어린아이였으니까.
심지어 뿔과 꼬리, 날개까지 잘려진 상태였기에 신체적으로도 여러모로 불편할 터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딜 가도 잘 지낼 꼬맹이니까요."
할리벨이 말헸다.
부디 그러면 좋을 텐데.
***
"괜찮니?"
"...네."
쑥 커져버린 고양이 수인을 올려다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어른의 모습이 됐건만, 그 크기는 벨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확실히 고양이 수인이라서 그런지 성인이 되어도 크기가 작구나.
대충 그런 생각을 했다.
"다른 아이들이 많이 걱정하고 있단다. 요즘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다리 근처에 덮여져 있는 이불을 들어올려, 그대로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다.
주변을 채운 한기가 머리를 쿡쿡 찔러대니 뇌가 아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추워서 그러는 거라면, 자."
평범한 인간보다 차가운 체온에, 평범한 인간보다 따뜻한 체온이 들러붙는다.
수인은 따뜻하구나.
제 품에 안긴ㅡ 정확히는 자신을 품에 안은 고양의 수인의 온기를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
"엄마, 또 여기에 있는 거야? 그냥 쉬게 두래도!"
"그치만, 애가 추워하잖니."
방에 들어온 벨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올려다 본다.
차마 그 눈에 대고 무어라 할 수 없었던 벨은 결국 그녀를 떼어내기 보다는 함께 있는 편을 선택했다.
제 어머니가 린을 귀찮게 하지 않도록 감시하겠다는게 이유였다.
"따뜻하네요."
"그렇지?"
"...사실 더워요."
하나라면 모를까, 둘이 되어버리니 도톰한 이불을 여러겹 두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열이 올라도 너무 오른다는게 문제였다.
"이러면 어때?"
"...조금 나아진 것 같네요."
조금 틈을 벌리자 그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피부에 몸을 잘게 떨면서도, 더운 것을 버티는 것보다는 추운 걸 버티는게 낫다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나저나, 역시 고양이 수인은 유연하구나.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하지 못할 자세를 하며 올려다 보는게 꽤나 신기했다.
"뭔가 고양이 같네요. 고양이가 맞지만..."
"응, 으응... 거기 조금 더 쓰다듬어 주렴."
턱 밑을 슥슥 쓰다듬으니 얼굴과 귀를 마구 비벼온다.
옆에 있는 벨은 그런 제 어미를 보며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었다.
"그, 그런 짓 좀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에, 우리 딸. 우리 딸한테는 안 해줬다고 삐진 거야? 이리 오렴."
"엄마? 엄마?! 엄마?!?!!"
킁킁 하고 코를 울리니 방 안이 고양이 냄새가 잔뜩 맡아졌다.
작은 고양이들이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며 투닥이는 꼴이 꽤 볼만했다.
이렇게 봐서야 누가 어미고 누가 자식인지 알 수 없을 정도구나.
뭐, 신체 나이는 비슷하니 어떻게 보면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고양이를 사역마로 삼는게 좋았으려나..."
사역마는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고 말했던 스승님의 말씀을 따라서 쥐를 택했던게 실수였다.
확실히, 고양이었더라면 추울 때 안고 자기에도 안성맞춤이었겠지.
"그런데, 은인님은 언제 만나러 간다니? 더 추워지기 전에 출발해야 할 텐데..."
"...그건."
벨의 시선이 린에게로 향했다.
엘리까지 자리를 비운 이상, 그들의 움직임에 대한 선택권은 그녀에게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리엘을 만나러 가고 싶다면 가고,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 했다면 기다린다.
'아직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할지도...'
린이 심장을 둘러싼 마나와 함께, 머릿속을 채운 지식들을 가늠했다.
오랜 시간을 살아와서 그런지 기억을 되찾는 시간이 느렸다.
특히 마법에 관련된 걸들이라면 더더욱.
"출발하죠."
몸이 망가진 것과는 별개로, 최대한 빨리 그녀의 곁로 돌아가고 싶다는게 지금 린의 심정이었다.
어머니. 나의 가여운 어머니.
그런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미코 씨에게 말하고 올게!"
"어, 엄마!"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한숨을 픽픽 내쉬는 벨의 모습에 빙긋 미소지었다.
평범한 가족이란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이구나.
"린?"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자신 또한 그런 것을 원했던 걸지도 몰랐다.
평범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평범하게 사랑을 받고,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런 현실을 원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이토록 매달리고 있는 것이겠지.
어떻게 보자면 집착이자 자기만족이었지만, 린은 그 끝에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과연 깨달으실 수 있을까요."
집착이란, 사랑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아니, 어쩌면 차라리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용사라는 것 이외에 어떠한 장점도 없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분명 끝이 좋지만은 않을 테니까.
안타까운 이야기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차라리 서로를 증오하는 관계인 채가 훨씬 나을 터였다.
"...응?"
생각에 빠져있던 도중, 근처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소리에 린이 고개를 돌렸다.
벽 근처에 놓여져 있는 탁자를 슬쩍 치워내니 그 너머로 자그마한 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리?"
그 뒤에 나타나는 건 다름 아닌 쥐.
평범한 쥐가 아닌, 마법사의 사역마로써 존재하는 쥐였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이 아이는 내가 에밀리에게 직접 선물한 사역마였으니까.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온 거니?"
손을 뻗으니 쪼르르 달음박질해 어깨 위에 앉는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제 마나의 파편에 입꼬리를 비식 틀어올렸다.
응, 그래.
응.
...에밀리를 찾으러 갔었다고?
찍찍.
"...그렇구나."
손가락을 뻗어, 자그마한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었다.
찍찍거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게, 어지간히도 사람의 손길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이고 제리를 쓰다듬던 린이 벽에 난 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에밀리, 그 아이가 다시 태어났구나."
어머니의 몸을 빌어서, 다시.
입 안이 씁쓸했다.
그 아이라면 분명 어머니에게 날을 잔뜩 세우고 있겠지.
어머니는 에밀리가 쏟아내는 악담들에 상처 입으실테고.
그런 짓을 저질렀음에도 여전히 에밀리를 사랑하고 있는 린이었지만, 아리엘이 관련되어 있다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최대한 빨리 가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어.'
에밀리가 어머니에게 더 상처를 주기 전에 서둘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