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3 - 분홍빛 봄.(4)
"최근 어리광이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말 없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아서에 한숨을 픽 내쉬었다.
분명 에밀리를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를 했던 차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 들어와서는 계속 이러고 있었다.
"설마 죽였느냐?"
"아니."
"그건 참 다행이구나."
죽이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아무리 원수라고는 하지만 내 배로 낳은 아기이니 죽으면 슬플 것이 분명했으니까.
아니, 그보다...
"큼큼..."
"..."
"...너는 눈치란게 없는 게냐?"
고개를 돌리니, 길게 이어진 머리카락이 두 갈래로 나눠져 양 옆으로 달랑거리고 있었다.
트윈 테일이라니 뭐야, 이게.
한숨을 픽 내쉬며 머리카락을 풀어내리자, 아서가 아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정수리를 톡톡 두들겼다.
"잘 어울렸는데, 아쉽네."
"잘 어울리는 것보다, 어째서 그렇게 머리를 잘 묶는 거지? 몇 번 해본 것 같은 솜씨였다만..."
잔털이 삐져나오지 않도록 깔끔하게 묶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사실을 어디서 알았냐고 한다면 에밀리의 머리카락을 묶을 때 알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아서의 머리 묶기 실력은 내 이상의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어째서 그렇게 능숙한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자주 묶어줬었구나. 맞지?"
"...응."
여전히 나를 그녀의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
어쩌면 당시에 만들어진 버릇이 내 이름과 한데 어우러져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이지, 겨우 이런 단순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이렇게까지 얽매여야 하는 걸까.
"자."
"..."
"이제 네가 머리를 묶어주는 사람은 소꿉친구인 아리엘이 아니라, 나야."
풀어내린 머리끈을 아서의 손에 쥐여줬다.
그가 과거에 소꿉친구와 했던 일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면, 그 모든 기억들을 나로 덮어씌우면 될 뿐이었다.
인간인 아리엘이 아닌, 마족인 아리엘만을 봐.
이제부터 네가 가지고 있는 행복한 기억은 오로지 나로써 이루어질 테니까.
"고마워."
"별말씀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상당히 부드러웠다.
결을 따라 천천히 쓸어내리고, 하나로 뭉쳐 조심스럽게 묶어낸다.
분명 머리카락이 당겨지고 있음에도 아프지 않다는 점이 상당히 놀라웠다.
"어때?"
"예쁘구나... 뭔가 단명할 것 같은 모양새기는 하다만."
낮게 묶은 머리카락을 어깨 앞으로 늘어뜨리니 꽤나 인자한 인상이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피부가 창백하고, 눈밑이 검게 물들어 있어서 절대 건강해 보이지 않다는 점일까.
곧 있으면 불치병으로 단명할 것 같은 외모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 머리 모양, 나한테 너무 과하게 어울리잖아.
"아서?"
"..."
"뭐야, 단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러는 건가?"
신속한 움직임으로 내 머리카락을 풀어내리는 아서에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단명 할 것 같은 머리 모양이라고 굳이 풀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물론 그의 행동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서의 주변 인물들은 전부 다 단명했으니, 내 말을 듣고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인간이 마족의 죽음을 걱정하다니, 정말 웃기는구나."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엔딩 중 가장 이질적인 끝일지도 몰랐다.
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라는 제목값은 하면서도, 그 어떤 스토리들보다 더 복잡하고 난해한...
그래서 나는 이 엔딩에 이름을 주기로 했다.
삶이라는 이름을.
"자, 아서ㅡ"
때가 왔어.
손을 뻗어 아서의 어깨를 밀쳤다.
언젠가의 그때처럼 힘 없이 침대로 무너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푸스스 웃었다.
아직도 낳아야 할 아이는 한참이나 남았으니까.
"시작하자."
***
"으으음..."
에반젤린.
북부의 여왕 에반젤린 폰 트리슈라움이 신음을 흘리며 표정을 찌푸렸다.
왕국에서의 선전포고가 떨어진 것도 벌써 며칠, 경계를 강화하고 병력들을 전선으로 보냈건만 아직까지 별 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수상해... 너무도 수상해...'
내부의 반란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면 굳이 북부에게 전쟁을 선포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급하게 전쟁을 걸어왔다.
...여유를 잃은 건가.
무엇 때문에?
"용사와 마왕... 그리고 왕국 내부의 반란 세력... 마지막으로 전쟁의 선포까지..."
널브러진 조각들을 하나로 짜올린다.
왕국은ㅡ 바로니스는 대체 무얼 원하고 있는 거지?
언젠가 보았던 그 민둥민둥한 대머리를 떠올리며 혀를 쯧쯧 찼다.
좋게 볼래야 좋게 볼 수 없는 녀석이었지.
짧은 회상을 마치고는 펜을 들어올렸다.
'국경의 경계를 더욱 강화할 것.'
검을 들고 전사들을 호령하던 자신이, 이제는 펜을 들고 전사들을 수족으로 부린다.
무거운 철덩이에 비하면 깃털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그 힘 만큼은 이전의 것에 비해 훨씬 강해져 있는 상태였다.
본신의 무력에, 권력을 더한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여왕의 힘을 더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그래.
"컥?! 어, 어떻게?!"
"그렇게 살기를 풀풀 푸르고 있는데, 틀키지 않을 리가 없지."
단순히 펜을 휘둘렀을 뿐인데도, 상대의 심장을 꿰뚫기에는 충분했다.
그림자 속에 숨어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두 눈동자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꿰뚫려도 바로 죽지 않다니, 흥미롭군.'
그 의문도 잠시, 살가죽을 벗기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모습이 역변했다.
머리 위로 솟아오른 뿔과 거대한 날개.
엉망으로 부풀어 오른 몸뚱이에서는 파괴적인 힘이 넘쳐나고 있었다.
"...마족?"
아니,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었거늘 어떻게...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는 마족 따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로잡아 캐묻고 싶다만, 마족을 살려두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지..."
마족이 뿜어내는 살기에도, 여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때가 되었다는 듯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있는 검을 향해 걸음을 옮길 뿐.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에 괴물이 포효를 내질렀다.
죽여버리겠다.
살기가 형상화 되어, 여왕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어리석어, 너무도 어리석어."
"?!"
길게 뻗어진 팔이 반으로 잘려나갔다.
고통을 느낄 순간도 없이 휘둘러진 칼날에, 마족의 머리통이 하늘을 날았다.
핏방울 하나 묻지 않은 칼을 어깨 위에 올린 여왕이 무너져 내리는 거체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흘렸다.
"여의 주변에 호위가 없는 건, 방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강하기 때문이다."
"..."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다, 버러지야."
기괴하게 비틀린 대가리를 꾹 즈려밟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터져나간다.
청소를 하려면 고생깨나 하겠군.
그 잠시 사이에 난장판이 된 집무실을 보며 여왕이 혀를 쯧쯧 차댔다.
"인간도, 마족도 아닌 녀석이 어째서 나를 습격 했을까. 정말이지..."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군.
여왕의 입꼬리가 치솟았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나 짓는 표정이었다.
***
"아마 그건, 바로니스 국왕이 만들어낸 마족일 겁니다."
여왕이 마족에게 습격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향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있는 채였다.
늦었다며 투덜거리는 그녀와 대화를 나눈 끝에, 아서는 습격을 사주한 이가 바로니스 국왕이라 단정지었다.
애초에 그 자가 아니라면 이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진실이 드러날 위험이 있음에도 직접 살수를 보낸 것을 보면, 아무래도 상당히 몰려있는 모양이었다.
"확신하는 듯한 말투로군. 증거는 있나?"
"제가 직접 봤습니다."
"...흐응, 그렇군."
마지막의 순간에 보였던 그 힘.
영혼을 쥐어짜낸 듯한 그것을 쉬이 사용했을 리가 없었다.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어서 찾고 있는 것이겠지.
나와 아리엘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뿔을.
"그나저나, 이상하구나. 아무리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마족이라고 한들 국경을 쉽게 넘어오지는 못할 텐데 말이다..."
길게 뻗어진 손가락이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확실히, 국경이 돌파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는 않았더랬지.
북부의 전사들이 부족하고 싶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여왕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존심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남은 경우의 수는 단 하나 뿐이라는게 문제였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군."
그 문제를, 여왕은 손 쉽게 입에 올렸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튀어나온 말이 아서의 귓가에 맴돌았다.
배신자, 배신자라.
"물론, 자네와 그ㅡ"
"아리엘 입니다."
"아리엘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대들은 뭐, 하루 종일 방에서 교합이나 나누지 않았느냐?"
여왕의 말에 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상대를 바라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여댄다.
"다 들린다. 그러게 적당히 하지 그랬나? 밤이고 낮이고 하루 종일... 쯧쯧."
"...죄송합니다."
"뭐, 여와도 밤을 보내준다면 용서하마."
농담을 하는 눈동자가 아니라는게 저 사람의 무서운 점이었다.
아서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너털웃음을 터뜨린 여왕이 이왕 나가보라며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아내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전해주고."
"...예."
그 말을 끝으로 여왕이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