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4 - 분홍빛 봄.(5)
"..."
증오스러운 마왕이 사랑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그 꼴을 뾰족한 눈매로 노려보던 에밀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아기를 또 낳은 거야?
미친 년.
"...어이가 없어서, 정말."
젖을 모두 먹은 아기의 등을 툭툴 두드리니 작게 트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 모습을 하나도 닮지 않은 아기를 품에 안고는 저렇게나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니.
어지간한 광인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어째서 너랑 있어야 하는 건데."
"..."
"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게 눈에 보였다.
옆에서 노려봐도, 가만히 있어도, 움직이고 있어도, 심지어 본인을 불러도 상대는 눈 하나도 깜빡이지 않았다.
겨우 마왕 따위에게 무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나 소리를 질러봤지만, 돌아오는 건 깜짝 놀란 아기의 울음 소리 뿐이었다.
"흐앙, 흐앙, 흐아아아앙!!!"
"쉬이, 뚝 그치자. 별거 아니니까, 알겠지?"
별거 아니라고? 내가?
헛웃음을 토해냈다.
비록 몸뚱이는 이런 꼴이었지만, 눈앞의 마왕 따위를 죽이는 것 정도는 손쉽게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뭐? 별 것도 아니야?
"계속 그렇게 무시하다가는 큰코 다ㅊ..."
"방해하지마."
"...뭐?"
"방해하지 말라고."
차가운 눈동자에, 더 이상 에밀리를 향한 사랑 따위는 담겨있지 않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싸늘한 경멸과 증오 뿐.
그마저나 꾹 억누르고 있다는게 느껴질 정도로 진하고, 동시에 어두웠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있지 않느냐. 너를 애 취급 하지도, 네 어미 노릇도 안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적당히 좀 하거라, 적당히 좀!"
"..."
확실히, 여왕이 에밀리를 방 안에 붙들어 놓지 않았다면 그녀는 하루 종일 정원이나 바라보고 있었을 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같은 방에만 있다는 것 빼고는 그녀를 완전히 놓아두고 있는 중이었다.
에밀리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시선조차 주지 않았겠지.
"이제 너 따위에게 줄 애정 같은 건 없으니까."
"..."
싸늘하게 내뱉어지는 말에 순간 열이 솟았다.
왜 화가 나지?
절대 느껴질 리 없는 분노가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마왕의 사랑이라니, 그런 것 따위 그저 혐오스러운 것에 불과할 텐데.
열기를 참아낼 수가 없어서 거칠게 숨을 내쉰다.
입에서 튀어나간 날숨이 그대로 주변의 공기를 덥혀냈다.
"그래, 착하지... 응, 무서웠구나..."
마왕이 천천히 아기의 등을 두드리며 울음을 잠재웠다.
아기를 달래는데 익숙한 듯한 모습에 에밀리가 와락 표정을 구겼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가 인간 아기를 안아들고 있는 장면 뿐이었다.
하지만,
'뭔데, 이 기분은...'
속에서 꿈틀거리는 감정.
분노나 증오와는 다른, 끈적하고도 질척한 무언가.
그것이 무슨 느낌인지 천천히 되새긴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짓말."
내가, 질투하고 있다고?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열이 바짝 오른 머리를 식혀내며 한숨을 내뱉었다.
질투를 하고 있냐 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누구를 질투하고 있느냐였지.
"..."
마왕의 모습을 바라본다.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유일하게 드는 거라고는 심장을 쿡쿡 찔러대는 듯한 통증 뿐.
그 다음에는 마왕의 품에 안긴 아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
웃기지도 않아서.
속을 가득 채우는 질투심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내가 지금 저 아기를 질투하고 있다고?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예쁘구나, 예뻐.'
"......그럴 리가 없잖아."
에밀리가 천천히 걸음을 뒤로 물렸다.
공포에 가득 찬 얼굴로 마왕과 마왕의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던 그녀가 움직임을 멈춘 건, 벽이 등을 가로막은 그 순간이었다.
차가운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 싸늘한 감각에 에밀리는 반사적으로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자신은 잡아먹혔노라고.
애정이라는 거미줄에 빠져, 다시는 벗어날 수 없게 되었노라고.
"짜증나..."
욕지거리라도 토해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우울했다.
벽을 타고 주욱 흘러내린 몸뚱이가 그대로 바닥에 닿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에밀리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안타까울 정도였지만, 마왕은 그녀에게 단 한 줌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완벽한 무시였다.
마치 너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나 치근거리던 주제에...'
분명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됐는데,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당장 저 면상에 마법이라도 끼얹고 싶은 불쾌함이었다.
"야."
"..."
"진짜 무시해?"
이대로 처량하게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 저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침대 위에 앉아있는 마왕에게 다다갔지만, 역시나 고갤 돌려보지도 않았다.
그이 원래의 것보다 한참이나 작은 손을 쭉 뻗어 소매를 잡아당기니,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댔다.
"...왜, 나는 이제 필요 없어? 네가 다시 낳아놓고는, 이렇게 내버려 둔다고?"
"..."
마왕은 제 말에 답하지 않았다.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 볼 뿐.
그 무기절적인 눈동자에 에밀리가 잘게 몸을 떨었다.
어린아이의 몸뚱이는 어른의 것보다 연약해, 저런 시선을 받고도 멀쩡할 만큼 강인하지 않았다.
"...됐어."
에밀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상대의 차가움에 정신이 겨우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방금 전의 것은 그저 몸뚱이에 이끌려 한 행동일 뿐, 정신 만큼은 마왕을 혐오하다 못해 증오하고 있었으니까.
"...아."
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듯 정수리에 손길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언젠가 느껴본 듯한 감각이었다.
엄마.
어린 시절 잃어버린, 절대 돌려받을 수 없는 존재.
어미와 자식간의 관계는 피보다 진하다고, 아무리 타인이라도 한들 저 뱃속에서 나온 이상 쉽사리 이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래, 이렇게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데도 저항하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했다.
"...인정 못해. 인정, 못한다고... 씨이... 진짜, 왜 이러는 거야..."
"..."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지만, 소용 없었다.
눈을 깜빡이자 후드득 떨어지는 물방울에 속이 먹먹해졌다.
내가 왜 울어야 하는 건데.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울고 있는 거지?
심장이 답답했다.
분명 숨을 쉬고 있음에도 숨이 막혔다.
"벌을 받아야지, 에밀리."
"..."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무엇보다 상냥하지만, 그 누구보다 두려워하던 벌.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마족ㅡ 그 우두머리인 마왕을 어머니라고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그녀에게 내려진 가장 큰 벌이었다.
아아, 정말. 정말이지ㅡ
'빌어먹을 정도로 역겨운 삶이구나.'
에밀리가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
언제나 차가움을 유지하는 북부가 따뜻해지는 때는 단 두 경우 밖에 없었다.
첫째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둘째는 화재가 일어났을 때.
"불이다!"
때 아닌 화제에 저택 안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건조한 기후 탓에 불이 자주 나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번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서둘러 물을 퍼붓는 와중에서 불길은 빠른 속도로 저택을 집어삼켜갔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사할까.
누군가가 읊조린 말에 주변에 있는 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정도의 불길이라면 분명 순식간에 불탔겠지.
"이봐, 저기..."
"어이! 빨리 이리로 와봐!"
하지만 그 사이에서 보이는 하나의 형상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불길을 뚫고 튀어나온 그림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바닥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군데군데 검게 탄 검댕과 꿈틀거리는 두 생명.
아기 하나와 아이 하나를 품은 여인의 곁으로 여러 개의 발자국이 찍혀나갔다.
"이봐, 괜찮나?! 이봐!!"
"아, 이... 아이들을..."
붉게 달아오른 팔이 제 품에 안겨있던 생명들을 앞으로 밀어냈다.
그 자그마한 것들을 눈에 담은 이들이 서둘러 그들을 받아들었다.
"일단 의사를 찾아! 아기는 괜찮지만, 아이랑 여자쪽이 크게 다쳤어!"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달려나갔다.
바닥에 쓰러져 바르작거리는 여인을 옮기기 시작한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괜찮나? 아이들은 무사하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다행, 이구나."
여인이 눈을 감았다.
마치 죽은 것 깉은 모양새에 맥을 짚은 사람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박동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살아있어.
그리고,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되는 법.
"비켜, 당장 비켜! 여기 환자가 있다고!"
여인을 안고는 마구잡이로 뛰었다.
아이들을 먼저 보내기는 했지만, 제 손에 붙들린 여인 또한 크게 다친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희미함에 심장이 쾅쾅 뛰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음에도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건물 앞에 도착하기 직전ㅡ
"...아리엘 씨?"
사람과 마주쳤다.
아니, 사람이지만 사람 같이 않은 사람이었다.
금색의 머리카락에 청색의 눈동자를 가진, 복장은 모험가의 복장을 했지만 머리에는 수녀의 면사포를 두른 기묘한 여자.
제 품에서 여인을 건네 받는 그 모습을 보며 반사적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아리엘 씨, 어쩌다가 이렇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남자가 흠칫 놀라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달이 하늘 높이 뜬 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