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5 - 분홍빛 봄.(6)
에밀리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분명 죽을 생각으로 조절 따위 없이 마법을 썼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속을 가득 채우는 열기를 토해내며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콜록!!"
몽롱한 정신과 함께 보이는 천장에 순간 자신이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대체, 어떻게?
심장을 채우고 있던 마나는 이미 텅 빈 채였다.
아니, 텅 빈 것을 넘어서 심장 자체가 망가져 있었다.
"콜록, 흑, 흐으..."
죽을 각오로 내지른 불꽃이었기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제 다시는 마법을 쓸 수 없겠지.
짙은 탈력감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짓을 했는데도 살아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위력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으앙, 으앙, 으아아아앙..."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면, 마왕이 언제나 품에 안고 있던 아기가 제 옆에 눕혀져 있었다.
작고, 가느다란 존재.
이런 몸뚱이가 되었어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존재.
손을 뻗어서, 가볍게 그 목을 틀어쥐기만 해도 눈앞의 아기 쯤이야 쉽게 죽여낼 수 있을 터였다.
"...하."
손을 내뻗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보드라움에, 에밀리가 숨을 뱉어냈다.
얼핏 들으면 비웃음이라도 느껴질 법한 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갈등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선택해.
죽일 건지, 살릴 건지.
"으응, 흐으..."
제 손길이 닿자마자 천천히 울음을 그치는 아기에 천천히 눈을 감는다.
결국 죽이는 것보다는 살리는 것을 선택한 에밀리가 그대로 아기를 품에 안아들었다.
우습게도, 깊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바보 같네, 진짜."
"..."
"바보 같아..."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울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아기를 향한 이 마음은 대체 뭘까.
분명 갓 태어난 스승님을 바닥에 떨구던 짓을 해댔는데, 어째서.
"팔자도 좋으시네요."
"..."
목소리가 들려왔다
삐걱거리는 목을 억지로 움직여 상대를 바라봤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금색 머리카락과 서늘하게 물든 청색의 눈동자까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절대 잊을 리 없는 그런 얼굴.
"...엘리."
"팔자가 좋네요. 아리엘 씨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는."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아니었다.
눈 앞에 있는 존재를 찢어죽일 듯한 눈빛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죽을 거야.
엘리가, 나를 죽일거라고.
"두려우신가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상대가, 귓가에 속삭였다.
악마의 목소리처럼 달콤하게 울린 목소리 속에는 진한 살의가 잠들어 있었다.
저항 따위는 불가능.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몸뚱이로는 그저 숨을 내쉬는 것만이 한계였다.
"...흐앙, 흐으응."
"..."
살기를 느꼈는지, 품에 안긴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아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엘리가 쯧, 하고 혀를 차댔다.
아기만 아니었다면.
...아기만 아니었다면?
"운이 좋으시네요."
"..."
"저지른 짓에 비해 정말 좋은 운을 가지셨어요, 네."
절대 호의를 담겨있지 않은 손이 그대로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이곳을 박살내고 싶다는 듯한 느낌의 손길에 에밀리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경련했다.
"아리엘 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는 죽고 싶다고 빌 정도로 고통스럽게 만들어 드릴게요. 알겠죠?"
"...힉."
빙긋 웃는 얼굴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이건, 엘리가 아니야.
이런 여자가 엘리일 리 없어.
얼굴이 희게 질렸다.
스스로가 알고 있는 것과의 괴리감에 심장이 쾅쾅 울려댔다.
"뭔가 이상한가요?"
기이할 정도로 상냥한 손길이 뺨을 덮었다.
피부에 얽혀붙는 손가락이 마치 뱀처럼 꿈틀거렸다.
싫어.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흐끅, 흑, 흐끅!"
"쉬이이이... 조용히 하셔야죠. 아기가 깨려고 하잖아요."
물 흐르듯이 제 품에 안긴 아기를 빼앗아 간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아기를 안아든 엘리가 에밀리를 내려다 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이게 뭐하는 꼴이람.
그녀가 뿜어내는 화염을 자신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벌써 세 번째.
에밀리가 에리엘에게 해를 끼친 횟수였다.
"세 번까지가 한계에요."
엘리가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등을 에밀리는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 자그마한 울음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
"멍청하긴, 그러니까 죽였어야죠."
"..."
"여보세요~ 제 말 들리시는거 맞죠?"
기다란 손가락이 내 뺨을 콕콕 찔렀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예상하고 있던 걸까.
이 빌어먹을 면상을 보고 있는데도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귀염둥이 마왕님, 또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치셨네요."
"..."
"차라리 죽여버렸으면 그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진심으로 가엾다는 듯한 말과 행동이 역겨웠다.
최근에 본 적이 없어서 그나마 떨쳐낸 줄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사실을 상기시키려고 등장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 몸에 제 신성력을 가득 담아두시고는 뭘 잊고 계시는 건가요? 섭섭하게..."
"어차피 이렇게 나타나니, 나타나기 전에는 조금 잊고 있으면 안 되나?"
"뭐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또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요."
허공을 부유하듯이 한 바퀴를 돌아, 내 머리 위에 턱을 얹는다.
꿈속인데도 불구하고 정수리를 누르는 뾰족한 턱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왕도에서는 재미있는 일을 벌이셨네요. 덕분에 제 신도들이 엄청 고생하고 있다구요?"
뭐, 정확히 말하자면 용사님이 벌여주신 일이지만.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아 아까워라...
"너는, 국왕이 마족들을 소환한 사실을 알고 있던 건가? 그런 짓들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물론이죠. 제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이유가 있나요? 빌어쳐먹을 마족들을 어떤 녀석이 소환 했는지 정도는 진즉 알아봤을게 분명하잖아요?"
여신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분명 얼굴이 흐릿한데도 불구하고 그 분노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힘만 있었다면 진즉 쳐 죽였을 텐데, 쯧."
"...하나만 묻지."
궁금증이 일었다.
마족들을 소환한 것이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왜 이렇게 마족을 증오하는 걸까.
동시에, 나를 왜 이렇게나 괴롭히는 걸까.
"너는 왜 그렇게 마족을, 마왕인 나를 싫어하는 거지? 아니, 왜 혐오하는 거지?"
"미워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하던가요?"
흐려져 있던 얼굴에, 선명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짙은 증오외 분노를 담은 색.
황금색으로 빛나는 시선에 내 모습이 비쳐보였다.
"마신 때문인가?"
짧은 읊조림에 여신의 입꼬리가 비죽 솟아올랐다.
여러 의미를 담은 미소 속에서, 나는 진한 혐오의 색을 읽을 수 있었다.
마신. 마신이라면 여신을 상대할 수 있는 걸까.
인간들이 불러내려 했던 마신.
그 존재가 이 세계에 소환된다면 나는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이런, 시간이 다 됐네요."
"...오늘은 저번처럼 괴롭히지 않는구나."
"왜요, 괴롭혀주길 원해요?"
여신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괴로운 일 따위 사양이었다.
"그러면, 다음에 또 볼게요. 물론 그때는 제가 이 세계에 강림해 있을 때겠지만."
"...!!"
"부디, 많은 기대 해주시길."
그 말을 끝으로, 어둠으로 물들어 있던 정신이 저 너머로 이끌려 갔다.
***
"헉, 흐, 흐아... 흑..."
눈을 뜨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몸을 가득 채웠다.
아직까지도 마지막에 보았던 화염이 몸을 태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
지끈거리는 통증에 손을 짚으려고 했지만, 제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설마 팔이 타버린 걸까.
화들짝 놀라서 시선을 돌리니, 다행히 양 팔은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하아."
반지가 끼워져 있는 왼손을 꼭 쥐었다.
만약 이걸 이렇어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잔뜩 울음을 터뜨렸겠지.
"깨어나셨네요, 아리엘 씨."
"...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내 정신을 일깨운 건 최근에는 듣지 못했던ㅡ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엘리.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녀의 몸에 매달렸다.
"괜찮, 괜찮느냐?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멀쩡하니까 여기로 왔죠, 헤헤."
해맑은 웃음 소리가 정겨웠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라 그런지 심장이 쾅쾅 뛰었다.
깨어났구나.
다행이야, 정말. 정말, 다행이야...
"흑, 흐으, 깨어나서 다행이야..."
"아, 아리엘 씨?!"
눈물이 터져나왔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루 이틀한게 아니라서 더더욱 그랬다.
가족ㅡ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일지도 모르는 것이 바로 엘리였으니까.
"언제 이렇게 울보가 되어버리셨을까... 응."
상냥한 손길이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꿈은, 아니겠지?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겠지?"
"저 여기 있어요, 아리엘 씨."
"엘리. 엘리..."
피부에 닿는 온기가 이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 일러주고 있었다.
고마워. 깨어나줘서 고마워.
잔뜩 감사 인사를 하다가 결국에는 탈진하듯이 눈을 감았다.
엘리가 당황해 하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동안 나도 마음 고생을 했으니 똑같은게 아닐까.
"안녕히 주무세요, 아리엘 씨."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 음성을 자장가 삼이 눈을 감으니, 작게 웃음 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디 좋은 꿈 꾸시기를.
멀어져가는 의식을 붙잡지 않고 놓아주었다.
이날 만큼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