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8 - 무너지다.(2)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어.
나 같은 건 그냥 없어져야 해.
행복이란 건 대체 뭘까.
손에 쥘 수 없는 것?
손에 쥐어도 사라지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언제나 상처를 주는 것?
"그, 그러려고 한게 아니야. 그러려고 한게 아닌데, 갑자기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ㅡ"
그런 거야.
그런 거니까, 제발.
제발 가지마.
여기에 있어.
아서.
아서.
아서!
"으, 으으으으으......"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몸이 경련했다.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심장이 굳었다.
안 돼.
이렇게 되어서는 안 돼.
내가 무엇을 포기하고 그를 선택했는데.
자그마치 모든 것이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내가 유일하게 손에 쥐고 있던 것.
이 세계에 와서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
용사를 향한 증오와 분노.
"다, 다 버렸단 말이야. 행복하려고, 이제는, 편해지려고... 다, 다 버렸다고..."
그런데, 대체 왜.
어째서.
나에게 저주 해주의 물약을 건넨 엘리에게도, 저주 해주의 물약을 만든 린에게도 생각이 미쳤다.
아니야. 그 애들의 잘못이 아니잖아.
잘못한 건 나야.
그냥 내가 마시시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테니까.
"남 탓 하지마. 다 네 잘못이잖아."
그래, 이게 전부 네가 살아있어서 생긴 일이잖아.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이런 일도 안 생겼겠지.
그것조차 무서워서 못했으면, 최소한 정을 주지는 말았어야지.
정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 또한 같이 무너지게 되는 그런 관계.
내가 무너짐으로, 다른 이들 또한 같이 무너지게 되겠지.
똑똑
"히약..."
"아리엘 씨, 들어가도 될까요?"
"...으, 으응."
근 이틀 동안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조금은 나아진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나아진 것 같은게 아니라 익숙해졌다고 보는게 맞겠지만.
"아직도 제가 무서우신가요?"
"..."
무섭다기보다는, 싫어.
엘리를 볼 때마다 억지로 가버리던 때의 기억이 마구 떠올랐다.
내가 암컷으로 떨어지기 않기 위해 노력하던 때, 그것을 무너뜨린 사람에 바로 그녀였으니까.
"...미안."
하지만 동시에 떠오르는 기억들은 그녀를 마냥 싫어하지만도 못하게 만들었다.
싫은데 좋고, 좋은데 싫은 기묘한 감정 때문에 머릿속이 쿡쿡 쑤셔왔다.
"아리엘 씨."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네 걸음.
그녀가 내게 다가올 수 있는 한계 거리였다.
보이지 않는 선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엘리의 눈꼬리에 작은 눈물이 맺혔다.
내가 이런 꼴이 되어서 슬퍼?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울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기에 내뱉은 웃음이었다.
"너를 용서했다는 건, 아무래도 거짓말이었던 것 같아."
"..."
"...미안."
분명 엘리를 용서했었는데, 지금은 하염 없이 미웠다.
보기 싫어.
저리가.
다시는 내 곁으로 오지마.
끊이지 않고 치솟는 검은 감정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 다음에 또 올게요."
"..."
다시는 오지마.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어떻게든 집어삼켰다.
말로써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것에서 나온 인내심이었다.
물론 그것도 엘리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가 한계인 듯 싶었지만.
"으, 으으으으으으으..."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머리를 박는다.
무서워. 싫어. 혐오스러워. 죽여버리고 싶어.
아니, 죽어버리고 싶어...
내 몸을 통과한 것의 감촉이 소름끼치도록 증오스러웠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으으으으으으..."
아무리 닦아내도 더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끈적거리면서 달라붙고, 내장을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듯한 역겨운 감각.
그렇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아이들이 태어났잖아.
그 더러움으로 인해, 아이들이.
"린, 린, 리이이인!!!!! 어디 있어? 린!!! 린!!!!"
"..."
"헉, 흐으, 하, 흐윽......"
정신 차려, 아리엘.
아니, 그대로 놓아버려.
어차피 네 이름은 아리엘도 아니잖아.
그냥 게임 속에서나 나오는 캐릭터 중 하나일 뿐이야.
너도, 린도, 다른 모두도.
"린, 리이이인..."
제발.
제발.
대리석 바닥을 긁어내리고, 또 긁어내렸다.
린이 필요해.
린이라면, 나에게 안식을 줄 수 있을 거야.
그 아이라면.
유일하게 나를 떠나지 않은 그 아이라면 분명ㅡ
끼익ㅡ
"...린?"
문이 열리고, 작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광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분홍색 머리카락을 지녔다는 것 정도는 손쉽게 알 수 있었다.
린이야.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건 린 밖에 없어.
"린, 린, 내 아이... 내, 아이..."
"..."
가까이 다가온 아이를 품에 안는다.
내 체온보다 따뜻한, 어쩌면 더 뜨거울지도 모를 온도에 안도감이 들었다.
...안도감이, 들었, 다?
"린이 아니잖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시야가 붉은색으로 물들자 그제서야 내가 품에 안고 있던 이가 누구인지 눈에 들어왔다.
린이 아니잖아.
같은 분홍색이었지만 린의 것보다 훨씬 더 역겨웠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도, 린의 것이 아니야.
누구야.
누구야!
감히 린을 따라해? 누가 감히ㅡ
"아."
너구나.
너였어.
나를 괴롭히고, 괴롭히고, 괴롭히고, 또 괴롭히던.
빌어먹을 년.
쓰레기 같은 년.
너 같은 건 죽어버려야 해.
죽어버려.
"아, 아아, 윽..."
"죽어, 죽어, 죽어, 죽어버려!!!"
잔뜩 망가진 몸으로, 아이의 목을 움켜쥔다.
아니, 아이가 아니야.
아이가 아니라 원수라고.
이미 죽어버린 주제에 내 몸를 빌어서 다시 태어난 빌어먹을 정도의 원수.
무슨 생각으로 이 녀석을 내 손으로 죽였더라?
'다시 낳은 다음, 다시 죽여버리려고.'
아아 그랬지. 그랬었어.
제정신이 아니던 때의 나는 이 녀석에게 모성애를 가져서 죽이지를 못했더랬지.
그런데, 지금은 멀쩡해.
눈앞에 있는 녀석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멀쩡하다고, 알아?
"죽어, 죽어, 죽어, 죽어버려... 죽어버리란, 말이야!!!"
"켁, 케헥, 켁..."
하지만 아무리 목을 졸라도 악마는 죽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고, 팔다리를 마구 버둥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살아남았다.
왜, 대체 왜 죽일 수가 없는 거야.
있는 힘껏 목을 졸랐잖아. 그 정도면 죽어야 정상 아니야?
그래, 분명 그래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흑, 으, 흐아아아아..."
안 죽어. 어때서? 왜? 대체 왜?
죽일 수가 없지?
왜 내가 이 녀석을 죽일 수가 없지? 어째서?!
"오, 오지마... 오지, 마!!"
악마를 붙잡은 손을 놓아, 그대로 벽에 달라붙었다.
싫어.
싫어.
다가오지마.
나를 바라보지마.
때리지마.
내 안에, 지팡이를 집어넣지마.
"사, 살려... 살려주세요. 제,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흐아아아아으......"
죽일 수 없는 괴물이, 과연 내 말을 들어줄까?
하지만 자존심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런 것 따위는 쓰레기에 불과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면 머리를 쳐박고 용서를 구하란 말이야.
그래, 그렇게. 머리를 숙여.
린을 닮은 괴물에게 살려달라고 빌어야 해.
그게 바로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싷이니까.
"...흑, 케흑..."
괴물이 내뱉는 기침 소리가 마치 으르릉거리는 것처럼만 들려왔다.
나를 집어삼키고,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 같은 소름끼치는 음성이었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죽어.
죽어버릴 거야.
기억이 뒤집힌다.
아니, 머릿속이 엉망으로 일그러진다.
"으, 으아아아아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지만, 괴물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목에는 푸르고 붉은 멍자국을 달고 다가온 괴물이 그대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린과 같은 분홍색 눈동자.
그 광경에 나는 눈을 꾹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를 낚아채려는 유혹에 불과했으니까.
그런 하찮은 거짓말에 속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응, 차라리 죽어버리자.
"미안, 해."
"..."
"내가, 잘못, 했으니까..."
"..."
"이제, 그만 하란 말이야..."
기괴한 목소리와 함께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튀어나왔다.
거짓말.
네가 나한테 사과를 할 리가 없잖아.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용사도 그렇고 너도, 왜 나한테 사과를 하는 건데?
"거짓말, 하지마. 거짓말 하지마!! 그냥 하던대로 괴롭히란 말이야. 나를 증오했잖아. 나를 원망했잖아. 나를 죽일 듯이 괴롭혔잖아!!!"
"..."
악인은 그냥 악인으로 존재하지, 어째서 선인이 되려고 하는 거야.
어째서 죄를 뉘우치고 용서 받으려고 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무엇이 바뀐다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사과라는 건 그저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내뱉어지는 것일 뿐이니까.
그 사실을 떠올리니 덜컹이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여전히 두려움은 남아있었지만, 정신 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뚜렷했다.
"너를 용서하지 않아, 절대로."
내가 죽던, 상대가 죽던 이 입에서 용서한다는 말이 튀어나갈 일 따위는 절대 없을 터였다.
그 뒤에는 다시 정신을 놓아버리고 엉엉 울었다.
분노를 통한 용기를 가진 것도 잠시 뿐, 어디까지나 나는 겁쟁이에 불과한 인간이었으니까.
"나가, 흑, 나가!! 당장, 나가란 말이야..."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괴물에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대로 꺼져버려.
꺼져버린 다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마.
마침내 문이 완전히 닫히고, 방 안이 완전히 어둠에 물들었다.
빛 한 점 없는 공간이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안심할 수 있었다.
성녀도, 마법사도, 용사도 없는 나만의 공간.
숨을 헐떡이며 침을 삼키니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뒤에는 뭐, 어둠으로 채워진 방 안에서 한참이고 오열했다.
눈물의 향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한 색체를 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