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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51화 (151/342)

Chapter 151 - 무너지다.(5)

할리벨을 내 손으로 죽였다면, 린을 죽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됐다면 분명 후회하게 됐겠지.

다시는 린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완전히 미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터였다.

"...린."

방 밖으로 나온 건 참 오랜만이었다.

싸늘한 공기를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내 아이, 내 딸, 가여운 린.

차가운 한기가 서린 대지가 발바닥을 찔러댔다.

마치 칼날을 들이미는 듯한 한기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겨우 이 정도로 아파하는구나, 나는."

너는 더 아팠겠지.

나보다 더 먼저 떠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나에게 찔렸를 때의 배신감.

내 눈물을 보는 순간 느꼈덩 슬픔.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내가 나빠서 일어난 일이니까, 내가 해결할게."

아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내 옷을 잔뜩 적셨다.

흰색을 기조로 짜여진 천은 이미 붉게 물든지 오래였다.

"절대 용서하지마. 부탁이니까, 절대 나를 용서하지마."

이미 죽어버린 아이를 품에 안고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용서하지마.

절대 용서하지마.

나를, 여신을 그 누구라도.

절대.

"..."

북부의 대지는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단단해졌고, 겨울에 가장 가까워진 지금은 얼마 전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었다.

그런 대지 앞에 서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까드득.

"..."

땅을 파냈다.

작은 흠집만을 남기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손톱이 들리다 못해 떨어져 나가고, 자갈과 모래에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아이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어서, 어서 빨리 묻어야 해."

그래야 린이 쉴 수 있어.

내 옆에 있다가는 죽어서도 고통 받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어서.

"흐, 흐으... 하..."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뽑히고, 양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대지를 적셨다.

얼어붙은 땅은 나의 붉은색으로 물들어 녹아내린지 오래.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아이를 안아들자, 일순간 아이의 몸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미안, 내가 미안해... 땅에 묻어서, 미안해."

그래도 다시 낳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낳고 말 테니까, 제발.

제발, 린.

조금만 쉬고 있어줘.

"으, 으으으......"

아이 하나가 들어갈 구덩이를 파는 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들어갈 자리도 미리 파놓고 싶었건만, 피를 잔뜩 흘린 내 몸뚱이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흙먼지와 핏덩이가 섞인 구덩이 안에 린의 자그마한 몸체가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님, 신님... 당신이 그 하늘에 계신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걸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절망을 주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셨겠죠.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이딴 짓을 벌이셨겠죠.

"...조금만 기다리시길."

곧 그 신성한 몸체를 이 더러운 대지 아래로 끌어내려, 천천히 찢어죽여줄 테니까.

당신을 찢어죽이고, 린을 되찾은 뒤에는 분명 나 또한 찢겨 죽을 테지만.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그런 맹세였다.

"..."

옆에 쌓인 흙을 한 줌 집어들어, 그대로 구덩이 안르로 흩뿌렸다.

냉기를 잔뜩 담은 바람이 내 몸을 유린했지만, 나는 그저 멍하니 구덩이 속의 사랑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안녕, 린.

또 보자.

파삭, 파스스.

흙이 흩뿌려지고, 아이의 모습 한 조각이 그와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흙을 흩날리는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아이의 손이, 발이, 다리가, 팔이, 가슴이, 목이, 마지막으로 얼굴이.

"흐, 흐악... 흐아아아아아아악......"

못하겠어.

못하겠어.

어떻게, 어떻게 내가 내 손으로 린의 얼굴에 흙을 뿌리겠어.

내가 어떻게, 감히 내가 어떻게!!

"미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조금만, 조금만 참아줘, 린..."

입술을 꾹 깨물자, 비릿한 철내음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마침내 아이의 얼굴이 흙 속에 파묻힌 순산, 난 소리 없이 오열할 수 밖에 없었다.

끝이야.

린이 죽었어.

하지만 이대로 무너져 있을 수는 없었다.

린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저 하늘에 있는 빌어먹을 년을 없애버려야만 했다.

"반드시......"

***

이유 없는 불안감이란, 거의 미신에 가까웠지만 생각보다 잘 들어맞는 법이었다.

그건 마법적 능력을 전부 잃어버린 에밀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기에, 그녀는 이유 모를 불안감이 몸둘 바를 몰랐다.

'이, 이건, 이건 달라...'

지금까지와는 궤를 달리했다.

마족에게 습격 당하기 직전에도, 사천왕 중 하나가 대규모 살상 마법을 준비할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뭐야.

대체 뭔데.

뭐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드는 건데?!

"헉, 허억... 흐악..."

숨이 막혔다.

이유 모를 답답함이, 그저 답답함으로 끝맺혀지지 않고 제 목을 졸라대고 있었다.

살의가 형상화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죽음을 목전에 둔 것 같은 감각에 전신이 비명을 질러댔다.

"스승, 스승님... 스승님, 도와ㅡ"

찍찍.

"흑, 흐엑, 프하..."

작은 울음 소리와 함께 숨이 터져나왔다.

꽉 막혀있던 목구멍이 트이자, 날것 그대로의 기침이 쉴 새 없이 터져나왔다.

방금 그건, 뭐였지?

몸이 아닌 영혼을 향해 외치는 듯한 분노와 증오.

그런 짓을 평범한 존재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승님."

스승님을 찾아야 했다.

파문을 당했다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대화라도ㅡ

"윽, 큭..."

불가능해.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부정에 자리를 박찼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머리가 아닌, 본능이 그녀가 가야할 길을 일러주었다.

"...스승님!!"

"..."

"...헉, 흐으, 흐..."

거친 숨소리에 침묵이 섞여들어간다.

지독할 정도로 우중충한 공기가 식은땀이 눌어붙은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눈에 보이는 건 무릎을 꿇고 있는 마왕과, 기분 나쁠 정도로 볼록 튀어나와 있는 자그마한 언덕 뿐.

"스승님..."

처음에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저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이 스승님이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절대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이 감각.

절대 떨쳐낼 수 없는 무력감과 슬픔, 절망과 죽음의 향기까지.

"스승, 님."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언젠가 마주했던 순간과 똑 닮은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거짓이라고 치부한 채로 넘어갈 수 있겠느냔 말이야.

"아, 아아..."

"..."

"아아아아아아아아..."

지켜내지 못했어.

또, 지켜내지 못했어.

천천히 손을 뻗어, 봉긋 솟아오른 언덕 위에 손을 올렸다.

끈적하게 들러붙어오는 핏덩이와 함께, 희미한 온기가 손끝에 얽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

"..."

"손, 대지마!!!!!!!"

강렬한 힘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내려꽂힌다.

순식간에 숨통을 조여오는 손길은 진한 살의를 담고 있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황금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목뼈가 상대의 힘을 버티기 위해 삐걱거리는 와중에도, 에밀리의 머리는 단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엄마,"

"..."

"살려, 줘..."

본능적인 외침ㅡ 아니, 속삭임이었다.

더 이상은 죽기 싫다는 것에서 나오는 하찮은 발버둥이었다.

아니, 아니지.

죽기 싫다는 것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마왕이 본인을 죽이게 두고 싶지 않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마음이었다.

"린... 린, 린... 내, 린... 으..."

목을 그러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피투성이의 손을 들어올린 마왕이 그대로 제 얼굴을 빈틈 없이 감쌌다.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진한 슬픔이 주변이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흐아아아아앙..."

지독할 정도로 짙은 슬픔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괴한 소리를 냈던 목에서는, 거짓말 같이 순수한 울음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애처로운 울음.

마치 갓난아이가 우는 듯한 소리에 심장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린, 린, 리이이인..."

"..."

하염없이 제 스승을 부르짖는 마왕과, 그 앞에 주저앉은 자신.

마법조차 사용할 수 없는 몸뚱이었지만, 그런 자신이라도 쉽게 때려눕힐 수 있을 만큼 무방비한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한 걸음 다가간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차마 팔을 뻗을 수기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 정도로 울고 있는 사람에게 손 댈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

"...린?"

초점 풀린 눈동자가 에밀리를 향했다.

분명 다른 얼굴이었지만, 분홍색의 머리카락과 본홍색의 눈동자에 착각한 듯 싶었다.

스승님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스승님을 대신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마왕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저 여기에 있어요."

"린..."

"저 여기에 있어요, 어머니."

자신을 속이고, 상대를 속인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껴안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째서 이러는 걸까, 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자신이 마왕을 실망시키지 않고 않다는 마음이었다.

'내가 왜...'

이 녀석을 실망시키면 안 되는 건데?

차가움에 몸을 맡기며 눈물을 삼켰다.

스승님, 이 선택이 과연 맞을까요.

제가 당신을 사칭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린..."

자그마한 속삭임이 귓가에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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