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3 - 무너지다.(7)
용사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라일라의 존재였다.
아리엘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전장으로 떠나려던 그의 앞에 나타난 여자아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볼 수 있었다.
"...스승님."
"용사님."
라일라가 쓰게 웃었다.
원래라면 모습을 드러낼 생각 따위는 없었으니까.
이미 죽어버린 자신이 제자의 속을 뒤흔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정말 이대로 떠날 생각이세요?"
언젠가 했던 딱딱한 말투였지만,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어린아이의 몸뚱이는 제 속에서 몰아치는 감정을 억누를 정도로 단단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승님."
"그녀에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마족들을 토벌하고, 끝 없는 전투를 계속해서 이어온 이유는 바로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 용사가 하려는 건 소중한 이를 지키려는 것이 아닌 소중한 이를 놓아두고 떠나려는 것이었다.
"소중한 이는, 자신의 손으로 지켜야 하는 법이니까요."
"..."
소중한 것을 잃어본 존재에게 다시금 소중한 존재가 생겨난다면,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제 손이 닿는 곳에 두게 되는 순간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감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결국에는 그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닌, 소중한 것을 망가뜨릴지도 모르는 것들을 배제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최선이었기에.
"그녀의 곁에 있어주세요."
라일라가 말했다.
이건 권유이자 부탁이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던 용사에게 말하는 조언이었다.
동시에, 상처 입은 마왕을 위한 걱정이기도 했고.
"일단, 이야기는 해보겠습니다."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다시 돌아가도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다시 만난다고 해도 거부 당할 텐데.
나라는 존재는 이미 아리엘에게 있어서 공포스러운 무언가에 그치지 않을 텐데.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지가 끼워진 왼손에서 작은 이물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전장을 헤쳐온 당신이니까,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감을 가지시길, 용사님."
"...스승님."
한참이나 작아진 제 스승님 이었지만, 마지막까지 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 만큼은 똑같았다.
당시에는 그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감사합니다, 언제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자그마한 얼굴에 맺혀있는 미소를 보니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한 번으로 포기한다면 용사라고 불리지도 못했겠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품에 안고,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아니, 걸음을 돌리려고 한 찰나였다.
"용사님, 아니, 아서."
"..."
"다시 보니, 좋네요."
"저도, 다시 뵙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라일라."
환한 미소와 함께 떠나가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용사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잃어버렸던 존재.
다시는 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스승과의 만남은 그의 마음속에 기묘한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아리엘.'
나는, 너 또한 돌려받을 수 있을까.
반지는 여전히 그의 왼손 약지를 감싸고 있었다.
***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어두운 방 안에서 깨어나,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품에 꼭 껴안고 있던 온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
차가운 몸을 덜덜 떨며 웅크리니 어둠 사이로 희미한 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멍하니 그 빛줄기에 이끌려 몸을 일으킨다.
한 걸음 한 걸음.
불을 처음 보는 원시인과 같은 걸음으로 창 앞에 서서는 그대로 커튼을 걷어냈다.
"아..."
어두컴컴한 방 안과 다르게, 바깥의 세상은 밝디 밝았다.
나 따위가 감히 손에 대지도 못할 정도로.
쓴 웃음을 지으며 다시 커튼을 치려는 찰나,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눈동자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
증오스러울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용사."
아서. 아서, 아서, 아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공포가 아니었다면,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눈에 담기만 해도 덜덜 떨려오는 몸뚱이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엘리를 만나러? 아니면 여왕?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이 점점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뭐야, 생각하고 보니까 전부 여자들 뿐이잖아.
뭔가 스스로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그래, 이런 망가진 여자보다는 다른 여자를 만나는 편이 그에게 더 좋을지도 모르지.
"너와 나는 이어지지 못할 운명이니까."
차라리 여신의 저주를 풀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는 의미가 없었다.
린이 만든 포션을 마신 건 나였고, 아서를 거부한 것도 다름 아닌 나였다.
"린, 린..."
품 안에서 사라진 온기가 간절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바닥에 주저앉자, 차가운 한기가 하반신을 타고 올라 내 심장을 옭아매었다.
어디 간거야, 린.
대체 어디에ㅡ
"엄마."
"...린?"
문이 열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이건 린의 목소리가 아닌데?
그런데 머리카락 색깔이 같아.
눈동자의 색깔도.
천천히 다가오는 아이의 모습을 보려고 눈에 힘을 줘봤지만, 엉망으로 어그러진 형상은 아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마치 절대 눈치채지 못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 맞아요, 엄마."
"린, 린... 네가 없어서, 무서웠어."
내 세계는 이 자그마한 공간과 린만으로 충분했다.
언제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죽을 때까지 이곳에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앞으로, 영원히 나랑 같이 있는 거야. 알겠지?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꼭 붙어서, 응?"
"...네."
그 대답만으로 충분했다.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확신.
그것만 있다면 이 어둡고 좁은 세상 속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아리엘."
"히약?!?!"
쿵, 한 소리와 함께 몸뚱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단지 목소리가 울렸을 뿐인데도 힘이 풀려버린 다리가, 엉망으로 경련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싫어, 오지마. 저리 가. 오지마. 오지, 마!!'
목구멍 속에서 맴도는 말들이, 목소리로서 튀어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다가오지마. 다가오지 말아주세요, 제발...
"아리엘."
"흑, 흐으, 흐..."
"너를 해치려는게 아니야."
거짓말.
날 죽일 셈이잖아.
그 좆으로, 나를 범할 생각이잖아.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왜 내가 그만두라고 했을 때는 그만두지 않았던 거야?
어째서? 대체, 왜?
"아서, 내가 분명 돌아가라고 말 했을 텐ㅡ"
"너는 잠시 빠져, 에밀리."
"...에밀리?"
에밀리. 에밀리. 에밀리.
린이 아니잖아.
린은 에밀리가 아니야.
린은, 그냥 린이지.
"나를, 날 속였어. 나를, 속였어?"
"..."
환상이 깨져나간다.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던 형상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분홍색 머리카락과 분홍색의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
그건 린이 아니라 에밀리였다.
나를 괴롭히고, 나를 죽이려고 했던 악마의 이름.
"...바보 같네."
그래, 린은 내 손으로 죽여버렸지.
아이가 죽어가는 꼴을 보기 싫어서, 내 손으로 죽여버렸었지.
하, 하하...
마른 웃음이 터져나왔다.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죽인 만큼 낳아도, 그렇게 낳은 아이를 다시 죽인다면 대체 낳는 이유가 뭔데?
"전부 내 잘못이었는데."
이상하리만큼 몸에 힘이 돌았다.
덜덜 떨리던 다리로 우뚝 서서는, 커튼이 걷혀진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밝은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었기에 어둠을 선택했건만, 어째서 세상은 나를 이토록 잔인한 빛 너머로 내던지는 걸까.
그래, 어쩌면 이것 또한 운명일지도 모르지.
나 같은 존재가 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아리엘?"
창문이 열리지 않도록 하는 잠금장치는 걸쇠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었기에 손쉽게 열 수 있었다.
남은 건 내 몸을 저 화사한 빛무리 너머로 내던지는 것 뿐.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부 포기하고 있던 목숨이었으니, 망설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안녕, 아서."
"...아리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분명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몸뚱이었을 텐데, 창틀을 즈려밟고,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만큼은 재빨랐다.
여기서 떨어진다고 해서 과연 죽을 수 있을까.
꽤 높이가 있기는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머리부터 떨어지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수는 있을지도...'
그런 태연한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땅을 마주보기 무섭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리고 고통도.
"...아."
하지만 내가 고통을 느끼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몸을 끌어당기는 중력에도 불구하고 나를 붙잡고 있는 손길이 있었다.
더 이상 떨어져 내리지 않는 스스로에 천천히 눈을 떴다가, 녹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쳐 버렸다.
"...아리엘."
"...아서."
또 나를 살리는구나.
또.
분명 나를 죽이려고 했었을 텐데, 정작 내가 죽을 무렵에는 하나 같이 날 살려냈더랬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
뭔가 커다란 이유가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꾸로 바라보는 세계는 빌어먹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죽고 싶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