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6 - 그 이상으로.(3)
...일단은 뭐, 그래.
살아남았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닐까.
머릿속이 번쩍번쩍 빛나고, 시야가 헤롱거리는 와중에도 나는 아주 잘 살아있었다.
분명 죽을 것만 같았는데,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는게 신기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허리가."
뻐근한 걸 넘어서, 찢어질 듯... 빠질 듯... 뭐, 엄청나게 아팠다.
몸을 일으키려면 아려오는 것이, 아무래도 너무 무리한 것 같았다.
아니, 무리는 내가 아니라 아서가 한거겠지만서도.
멀쩡히 깨어난 모습을 보자니 나에게만 무리인 듯 싶었지만, 뭐어...
"...얼마나 한 거야, 대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 뒤가 기억나질 않았다.
으, 으응...
모르겠다.
일어나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그대로 드러누웠다.
둥글게 부풀어 오른 복부 때문에 완전히 몸을 펴내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몸을 편히 뉘일 수는 있었다.
"정말이지, 못 말리는 남자라니까."
그간 쌓인 성욕을 전부 풀어낼 기세로 허리를 흔들었으면서 나보다 훨씬 빨리 일어났었지.
이게 바로 용사의 체력이라는 걸까.
새삼스럽게 아서가 용사라는 사실을 체감하며 헛웃음을 토해냈다.
'그에 비해서 마왕인 나는 이런 꼴이지만서도...'
내장이 눌리는 것 같은 감각에 슬쩍 몸을 돌리자 가랑이 사이에서 끈적한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배를 꽉 채운게 과연 정액일까, 아니면 아기일까.
물론 둘 다 들어있겠지만, 아서에게서 나온 것이 더 많이 들어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확실히 더 많이 들어있겠지.
"아서어어어..."
늘어져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 이마에 입을 맞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말이지...
왜 갑자기 사라져 버린건데.
물론 영영 떠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 정도로 무책임한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음, 그렇겠지?
"...으응."
비대하게 커진 복부를 슬슬 쓸어내린다.
분명 온기를 가지고 있지만, 언젠가 느꼈던 특유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뱃속에서 잘못 되기라도 한 걸까.
작은 불안감이 점점 그 크기를 불렸다.
"그, 그러게 좀 적당히 하라니까..."
어쩌면, 입에 달고 다니던 농담처럼 정말 아서의 정액으로 아기가 익사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아니면 뱃속을 꽉 채운 정액에 심장 박동 소리가 묻혀버린 걸지도 몰랐고.
"...아가."
잘 있지?
작게 속삭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불안감을 쫒기 위란 물음이었던지라 기대는 하지 않았건만.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심장이 쾅쾅 뛰었다.
'정말 잘못됐으면 어떻게 하지?'
괜한 걱정.
쓸데 없는 걱정.
그냥,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걱정일 텐데.
"...으, 으으, 으으으으..."
기억이 점멸한다.
내 앞에 쓰러진 린의 형상 위로, 자그마한 아기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와 동시에 진한 죽음의 향기가 내 코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죽었으면 어떻게 할 건데.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나는ㅡ
"아리엘."
"흐, 흐아, 흐..."
지금까지 숨을 참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깨에 닿는 온기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호흡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아서... 대체, 대체 어디 갔던 거야..."
자연스럽게 원망의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얼마나 예민한지 알고 있으면서, 내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알고 있으면서 감히 내 곁을 떠나?
물론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사이에 내가 깨어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바보, 바보야, 진짜..."
"미안."
"미안하다면 다야?"
물론 미안하다는 한 마디에 전부 풀리기는 했지만서도...
나 화났어,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과 함께 눈썹을 치켜올리니 아서가 비식비식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웃는지 잘 모르겠네.
내가 화내는게 웃겨서 그런 건가?
"어디 가지마."
"응."
"내가 허락해도 가지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 있으란 말이야, 알겠어?"
떨림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용사를 향한 두려움은, 용사를 향한 사랑으로 지워진지 오래였으니까.
지금 남아있는 건 포근포근하고 따뜻한 심장 밖에 없었다.
...
아니, 한 가지.
여신을 향한 증오를 제외하고.
"...이번에 낳는 아기는 어떤 아기일까."
마족들이 죽여낸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기에, 추측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여자아이일까, 남자아이일까.
종족은 어떻게 될까?
...잘 모르겠네.
"이제 들어가도 돼?"
"하지만 용사님이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아니, 냄새가 좋으니까 들어가도 돼!"
"엄마?! 아빠?!"
문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고양이 세 마리ㅡ 아니, 고양이 수인 셋이 들이닥쳤다.
전부 다 하얀색에, 푹신푹신.
순식간에 내 주변을 차지하고는 그대로 턱이며 귀며 마구잡이로 비벼오기 시작한다.
"자, 잠깐... 읏, 그렇게 너무 달라붙지 마..."
"으응, 냄새가 좋아. 킁, 킁킁... 엄마 냄새가 나..."
내 품에 코를 파묻고는 킁킁 냄새를 맡아댄다.
어제 그렇게나 해대서 별로 좋은 냄새가 나지는 않을 텐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양이들을 바라보니, 하나 같이 헤실헤실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 물론 벨은 빼고.
벨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들이미는 한 녀석을 떼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덩치는 둘에 비해서 커다랗지만, 힘이 더 약하구나.
역시 부모 이기는 자식 없다더니.
...이게 아닌가?
"정말이지, 이 녀석들 또 제멋대로 뛰어다니기나 하고..."
"미코."
"오랜만이구나. 분명 북부에 도착한 건 한참이나 되었는데, 이제서야 만나게 되다니."
꼬리 하나 달린 구미호, 미코가 나를 보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꼬리가 흔들리는 걸 보니, 걱정하고 있던 모양이구나.
아니면 나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거나.
"자, 이리 와."
"...뭐냐, 나를 저 고양이들이랑 똑같은 종자 취급하는 건가?"
"어서."
미코는 내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니었지만, 몸집이 다른 아이들처럼 자그마해서 그런지 뭔가 보호욕구가 마구 솟아올랐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엄청나게 컸는데 말이지.
꼬리도 아홉 개나 달렸었고.
심지어 나를 마구 괴롭히기까지ㅡ
응, 역시 이건 더 이상 떠올리지 말자.
"응, 거기.... 으응, 거기를 더, 응, 쓰다듬어, 다오..."
정수리에 손을 얹어 슬슬 쓰다듬으니 잔뜩 녹아내린다.
헤실헤실 풀어진 표정을 보거 있자니 괜스레 내 마음도 녹아내려서, 비식비식 웃음이 나왔다.
괜히 애니멀테라피를 하라는게 아니었구나.
...반쯤은 사람이기는 했지만서도.
"...그나저나, 엘리는?"
고개를 돌린다.
내가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장 먼저 찾아올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왜일까.
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걸까.
혹시, 내 손으로 린을 죽인 것 때문일까?
"...엘리를. 엘리를 만나러 가야겠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무거워진 몸뚱이는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뱃속에 있는 아기가 허리의 신경을 짓누르고 있어서인지,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자."
"...고마워."
고양이들과 여우 틈 사이에서 나를 빼낸 아서가 그대로 내 몸을 품에 안았다.
한 아름에 안기는 몸뚱이 사이로 툭 튀어나온 배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남자와 여자.
부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기.
느린 움직임으로 슬슬 배를 쓰다듬으니,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이제는 정말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구나.'
이 뱃속에 품은 것들을 전부 사랑하게 되는 저주에 걸린 것만 같았다.
아니,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저주가 아닌 축복이겠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저주일 리가 없으니까.
"엘리."
복도를 빠져나가, 저택 밖으로 나가서 언젠가 보았던 장소로 향한다.
자그마한 언덕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엘리에,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리.
여기 있었구나.
"...아리엘 씨. 그리고, 용사님."
뒤를 돌아본 엘리의 손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들려있었다.
북부의 가혹한 환경에서도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
분홍색의 잎을 가진 자그마한 꽃송이가 그대로 린의 무덤 위에 놓여졌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까지 없으면 이 아이는 언제까지고 혼자 있어야만 할 테니까,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엘리."
레이나가 죽었을 때도 그랬었지.
언제나 그녀의 무덤가를 지키고, 꽃을 놓아두고, 주변을 청소랬더랬다.
이번 또한 마찬가지로, 땅에 묻혀있는 린을 가만히 놓아두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제가 무섭지 않으신 건가요?"
"...미안."
"미안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 일은 분명, 제가 잘못한 일이었으니까요."
한창 신성수에 물들어 있던 때의 과오.
지금 와서는 그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그녀에게 폐가 되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엘리는 미소지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녀가 겪었던 일까지 생각하면, 이렇게 무너지지 않은 모습이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린을 스스로의 손으로 죽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겪었을까.
감히 자신 따위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절망이었겠지.
"마음 같아서는 무언가 축복이라도 드리고 싶지만, 이제 성녀가 아니니 그럴 수도 없네요."
"...엘리."
바람이 불어왔다.
분명 차가울 터인 흐름이, 엘리의 뺨을 따스하게 스쳐지나갔다.
"나는, 성녀의 축복이 아니라 네 축복이 필요한 거야."
정확히는, 네가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아리엘 씨."
그래.
어쩌면, 그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