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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59화 (159/342)

Chapter 159 - 약속.(3)

아이가 하루만에 태어났다고 해서 세계수가 하루만에 자라나지는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느리다고 해야할지...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발 밑에 자라있는 엄청 자그마한 새싹을 바라보며 작게 숨을 토해냈다.

그 커다란 씨앗에서 이게 나왔다고?

이걸 보니 뭔가 갑자기 농촌으로 귀농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생 동안 꽃 하나 키워본 적 없는 내가 처음으로 키우는 식물이 세계수라니.

"너도 내가 같이 있어서 좋은 거니?"

조금 멀어지려고 하면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길래, 그런 셈 치기로 했다.

내가 멀리 떠나있다가 북부의 칼바람에 얼어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씨앗일 때는 몰랐지만 새싹이 되니 뭔가 애정이 샘솟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레이나가 있었더라면 더 도움이 됐을 텐데."

세계수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엘프가 세계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나 같은 반푼이 마왕보다는 차라리 레이나가 이 자리에 있는 편이 더 도움이 됐겠지.

"설마 세계수를 낳을 줄은 몰랐는데."

"에밀리."

"...지금은 좀 제대로 알아보네."

불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고도,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말투에 고개를 돌려보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에밀리가 표정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참 불만 많아보이는 얼굴이네.

어떻게든 내 손길에 닿지 않겠다는 듯 거리를 두고 있는게 꽤 우스웠다.

"거기 있으면 추울 거야. 이리로 오렴."

"...아직도 어린애 취급 하는 거야? 나를?"

와락 일그러진 표정으로 쏘아붙힌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떨고 있는 주제에.

이제는 마법도 사용하지 못해서 제 몸 간수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어린애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느냔 말인가.

도통 다가오려고 하지를 않길래 이쪽이 먼저 일어났다.

얼마 전까지는 저 가느다란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 춥잖니. 응?"

"놓으라니까?!"

"괜찮으니까, 어서."

부드럽게 그 손목을 쥐고, 천천히 끌어당긴다.

억척스럽게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완전히 뿌리치지 않는 모습을 보니 무의식으로는 나를 받아들이는 듯 싶었다.

"스승님도 제 손으로 죽여놓고는."

"..."

가슴에 대못을 박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그 사실에 괜히 심술이 나서 그대로 아이를 꽉 껴안았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신경질을 부리는게 우스워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응?"

제 손으로 소중한 것을 망가뜨린 죄인들끼리 싸운다는 것도 조금 모양새가 안 좋았다.

전부 잊으라는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품 안에 갇힌 온기를 어루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사이좋게 지내야지."

"너랑 사이좋게 지낼 생각 따위 없거든?!"

"...에밀리."

반항기의 아이가 이런 느낌일까.

가지고 있던 독기는 분명 전부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언제나 나를 적대하던 버릇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듯 싶었다.

슬프구나.

적대 밖에 하지 않아서, 나를 대할 때 공격적으로 밖에 대할 수 없다니.

"네가 미워해야 할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 쯤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

에밀리의 가족을 죽인 건 마족이었지만, 그것을 소환한 건 바로니스 국왕과 몇몇 인간들이었다.

동시에, 린을 죽인 걸 또한 마족이었지만 그것을 소환한 건 다른 인간들이었다.

마족을 증오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그 사실을 인지하고만 있어도 충분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틀어박힌 감정이 그리 쉽게 지워지지는 않을 테니까.

"..."

내 말에 에밀리는 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부정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 시간들이 약이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

한창 추워져야 할 북부가 따뜻하다는 건 이변을 뜻했다.

저택의 주변을 거닐다가 희미한 온기를 따라 마왕이 있는 곳까지 와버린 에반젤린 여왕이 흠, 하며 콧소리를 냈다.

"혹독한 북부의 땅에서 이런 부드러움이라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북부에서는 절대로 자라날 리 없는 자그마한 꽃을 내려다 본다.

이건 기적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이상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평생 차가움과 함께 살아온 그녀로써는 이런 변화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따뜻함이라는 건 적의 숨통을 도려냈을 때 느껴지는 피의 온기로 층분했으니까.

"저게 마왕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저 멀리 자리를 잡고 앉은 여인을 바라보며 혀를 쯧쯧 차댄다.

푸르게 자라난 풀밭 위에 앉아, 제 주변을 둘러싼 수인들을 쓰다듬으며 미소짓고 있는 마왕이라니.

머리 위에 뿔도 없으니 절대 마족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보도록 할까?"

척, 하고 뻗어지는 걸음에 발 밑의 풀이 부드럽게 즈려밟혔다.

갓 죽은 시체에서나 느낄 수 있던 생명력에 여왕의 표정이 살풋 찡그려졌다.

기분이 나쁘다거나 그런게 아니라, 평소의 북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반젤린 여왕, 님? 이라고 불러야 하나?"

"...됐다. 마왕에게 존칭을 들어서 무엇하겠다고."

과하게 유하다.

마왕이라는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모습에 쯧, 하고 혀를 차댔다.

이래서야 누가 마왕인지 모르겠구나.

만약 자그마한 들꽃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건 눈앞에 있는 마왕일 것이 분명했다.

"세계수를 심었다."

"...뭐?"

태연하게 튀어나오는 말에, 여왕이 되물었다.

방금 내가 무엇을 들었지?

분명 세계수라고 말한 것을 들은 것 같은데.

설마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건가 싶어 상대를 노려봤지만, 돌아오는 건 희미한 미소 뿐이었다.

'저 말투에 저 표정이라니, 지지리도 안 어울리는 조합이구나.'

마왕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으니 진실이라고 치자, 그러면 그 세계수의 씨앗을 어디서 구했는지가 의문이었다.

분명 세계수는 옛적에 불타 사라졌을 터.

만약 씨앗이 남아있었다면 엘프들이 그토록 절규하고, 절망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잠깐, 지금은 생각 중이니 달라붙지 말거라."

"냐아..."

"달라붙지 말래도 그러네?"

고양이 한 마리가 다리에 들러붙기에 슬슬 흔들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들러붙는다.

겁이 없는 건지 신경 자체를 쓰지 않는 건지.

언젠가 보있던 수인들은 하나 같이 본인에게서 피 냄새가 난다고 꺼려하던데 말이다.

"후흣."

마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작은 아이에게 쩔쩔 매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따뜻하고, 동시에 조금 민망하다.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에바도 우리랑 같이 있자."

"에바라고 부르지 말래도 계속 그러는구나."

"에바는 에바잖아?"

저를 올려다 보던 고양이 수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와 동시에 쫑긋거리는 귀가 아주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확 깨물고 싶을 정도로 자그맣구나.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부드럽고 말랑한 귀를 붙잡으니, 뭐가 그리도 좋은지 베시시 웃어댔다.

'이 요물 같으니.'

북부의 고양이는 고양이보다는 삵에 가까운 것들이 많았기에, 이런 귀여운 고양이는 보기가 꽤나 힘들었다.

그래서일까.

원래라면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에반젤린 여왕이 이 고양이 수인들을 보며 충격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귀여운 고양이라는 건 그녀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었으니.

"세계수니 뭐니 기르는 건 네 자유다. 북부에 해가 되지만 않는다면 상관 없어."

제 다리에 꼭 달라붙어 있는 고양이 하나의 뒷덜미를 붙잡아 올리고는 한숨을 픽 내뱉었다.

북부에 고양이 수인이라니.

북부에 따뜻한 바람이 불다니.

북부에 세계수가 자라고 있다니.

하나 같이 어처구니 없는 일들 뿐이었다.

"그쪽도 앉겠나? 이 근처는 따뜻해서, 다들 가끔씩 쉬었다 가곤 하거든."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더랬지.

차가운 북부에 봄의 정원이 생겼더라, 하는 이야기를.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오면 몸에 활력이 돌고 피로가 풀리고 어쩌구 저쩌구...

그렇지 않아도 최근 왕국의 버러지들 덕분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던 그녀였다.

"그래, 뭐... 나쁘지는 않구나."

"그렇지?"

엉덩이 밑에 깔린 생기 넘치는 풀들의 감촉이 이상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라고나 할까.

지금까지 척박한 북부에서만 살아왔다보니, 이런 푹신푹신한 느낌의 풀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정말이지, 마왕이 맞는 건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리도 너무 다른데 말이지."

"...맞기는 하다만."

서로 품 안에 고양이를 하나씩 안고는 대화를 나눈다.

묘한 친밀감과 함께 느껴지는 소박함이 그녀의 머릿속에 강한 괴리감을 불러일으켰다.

분명 마족들은 호전적이고 피를 갈구하는 이들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들의 우두머리인 마왕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니.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셈이지? 계속 이곳에서 지내고 싶다면 그래도 되지만, 원한다면 따로 거처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아니, 세계수를 돌봐야 하니 따로 거처를 마련하는 건 사양하지."

부드러운 눈빛이, 제 옆에 솟아난 새싹을 스쳐지나갔다.

저 자그마한 새싹이 자라나서는 세계수가 된다니.

그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토해냈다.

살다살다 세계수가 자라는 걸 보다니, 인생이란 참 기묘하구나.

그래도 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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