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4 - 사랑과 평화?(5)
검정색은 언제나 나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과거의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았던 것이 검정색이었으니까.
"흐, 아가... 아가..."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아이.
단지 그것 뿐인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왜 울고 있었더라.
그래, 아기를 낳아서 울고 있었지.
그건 당연한 일이잖아.
'...엄마.'
엄마가 남기고 간 마지막 흔적을 떠올렸다.
검은 머리카락의 아기.
소녀도, 유녀도 아닌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린 불쌍한 아기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닮지 않았는데.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대체.
"흑, 흐아, 으..."
"으, 흐앙, 흐앙, 흐아아아앙...!!"
나와 아기를 이어주는 탯줄에 감정 또한 연결되었는지, 아기가 앙앙 울기 시작했다.
울면 안 되는데.
내가 울면 아기도 우니까, 울면 안되는데...
품 안에 안긴 자그마한 온기를 그러쥐며 엉엉 울었다.
시끌벅적하던 주변이 조용해진게 조금 미안해 어떻게든 감정을 추슬렀다.
"내가 탯줄 잘라줄게!"
"...고마워."
해맑게 웃어보인 아이가 날카로운 송곳니로 나와 아기를 이어주던 탯줄을 잘라냈다.
내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 다른 하나의 생명이 된 아기에 다시 한 번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물론 울지는 않았지만.
"예쁜 아기구나."
"...응, 그렇네."
제 꼬리를 붕붕 흔든 미코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빙긋 웃어보였다.
그래, 예쁜 아기야.
나한테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예쁜 아기.
"이름은, 짓지 않는 게냐?"
"...이 아이도, 따로 이름이 있을 테니까."
이미 있는 이름을 내가 짓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내 아이지만, 내 아이가 아닌 것.
지금 이름을 짓는다고 해도 언젠가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오겠지.
그나마 머리카락 색이 같은 것을 위안으로 감는게 나을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이번에는 머리카락 색 정도는 같으니까."
"...흠."
미코가 콧소리를 내며 아기의 뺨을 콕 찔렀다.
어느새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든 아기의 곁으로 다른 아이들이 와르르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이 정도로 작은 아기를 보는 건 오랜만이니 그런 듯 싶었다.
"엄청 작아."
"그리고 귀여워."
"인간 아기도 수인 아기처럼 귀엽다냐..."
"우와, 손발이 엄청나게 작아요..."
주변에서 쏟아지는 관심에 깰 법도 했지만, 아기는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썼는지 곤히 잠든 채였다.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누구였을까.
괜히 그런 생각이 퐁퐁 떠올랐다.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마족에게 죽은 이가 마왕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이런 생각은 매일마다 하는 것이었다.
분명 지금까지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 그런 경우는 별로 없지만서도, 자그마한 불안까지는 떨쳐낼 수 없다는게 문제였다.
라일라의 경우도 그랬지.
아이에게 찔렸던 부위가 괜히 쓰라려왔다.
"네 바보 같은 얼굴을 보고도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느냐. 응?"
"...그런 말이라도 고마워, 미코."
톡, 하고 정수리 위에 손을 올리자 꾹 눌린 귀가 내 손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위로 치고는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 덕분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
아기가 빨리 자란다고 하지만, 역시 이건 조금 아니지 않을까.
침대 위에 앉아서 잔뜩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에 찔끔 식은땀을 흘렸다.
"아가, 혹시 배고프지 않ㅡ"
"저리 꺼져."
"ㅡ 흣."
심장을 찌르는 말에 입술을 깨문다.
설마 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까 심장이 아팠다.
너무하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지금까지 동족들이 저질러온 죄가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슬프구나.
"...아가."
"아가라고 부르지마, 기분 나쁘니까."
딱히 마족이라고 티가 나지는 않을 텐데, 왜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구는 걸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적대감에 괜히 울적해졌다.
미움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실제로 미움 받으니 상상 이상으로 슬펐다.
"할 말 없으면 방에서 나가."
"...응."
"방에 들어올 때는 허락 받고 들어오고."
잔뜩 시무룩해져서는 방을 나섰다.
분명 미코랑 비슷하거나 더 작은데, 하는 행동은 반항기의 아이들보다 한 술 더 떴다.
이대로라면 불량 청소년으로 자라나는게 아닐까?
담배를 핀다던가, 불장난을 한다던가 그런...
'안 돼.'
다시 태어나기 전에 무슨 짓을 했던지 나쁜 길로 들어서게 둘 수는 없었다.
괜한 참견일 수도 있었지만, 내가 낳은 아기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왜 다시 돌아왔어? 꺼져."
"...흑."
'같았다.'랄까, 반응이 너무하잖아.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것 같은 말투에 도망치듯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무렇지, 않아. 그럴 수도 있잖아. 미움 받는 것 따위, 익숙하잖아. 그렇지?"
차가운 공기가 나를 때려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서둘러 세계수의 싹이 피어있는 공간 안으로 몸을 던졌다.
아무도 없는 시간, 아무도 없는 공간, 그리고 그곳에 있는 나.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자, 따스한 바람이 내 몸을 감쌌다.
"...나를 위로해 주는 거니?"
살랑살랑 흔들리는 새싹에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분명 말 한 마디 못하는 식물이었지만, 뭔가 긍정의 답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아리엘!"
"...아서."
그렇게 한참을 자리에 앉아있으니, 저 멀리에서 사람 하나가 쏜살 같이 달려왔다.
엄청 빠르구나.
순식간에 내 앞까지 다가온 아서가 그대로 나를 제 품에 안았다.
"몸은 괜찮아? 아픈 곳은 없고? 힘이 빠진다거나, 우울해지는 것도 없고?"
"잠, 깐. 괜찮으니까 조금, 내려줘..."
어째 주책이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서이에 내가 아기를 나았으니 이 정도로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정작 부끄러워 하는 건 나였지만서도.
"아기는 무사히 잘 태어났어. 검은 머리카락에, 여자아이야. 지금은 조금 많이 자랐고."
"검은 머리카락에 여자아이면, 너를 닮았을까?"
"...딱히 나를 닮았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머리카락 뿐만 아니라 눈동자도 검정색이었지, 그 아이.
얼굴 형태도 나랑은 엄청 달랐고.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차마 아이가 나에게 심한 말을 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아서라면 분명 아이를 찾아가서 훈계라도 할 것 같았으니까.
아니, 아마 아서가 훈계한다고 하더라도 아이 쪽에서 역으로 심한 말을 마구 내뱉지 않을까.
그런 상황은 별로 바라지 않았기에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일단은, 내 옆에 있어줘."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면 타인의 온기가 필요한 법이었다.
내 옆에 자리를 잡은 아서의 팔을 꼭 껴안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단단하지만, 따뜻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마음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아서."
"응."
"앞으로도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평생 동안. 아니, 영원히."
지금껏 고생해서 감성적으로 변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우리도 지금처럼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분명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지금 이 순간이 그 무엇보다 소중해서 그런거겠지.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리엘. 그렇게 울상을 짓고 있으면 신경 안 쓰려고 해도 쓸 수밖에 없잖아, 응?"
"...티났어?"
분명 포커페이스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에서 티가 났는지 모르겠다.
혹시 표정을 읽는 기술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괜스레 뺨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걱정을 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아이가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대신 내가 널 좋아하잖아."
"...너, 요즘 진짜 능글맞아진거 알고 있어?"
닭살이 돋아오른 팔뚝을 슥슥 쓸어내렸다.
눈 밑에 다크서클을 매달고 다니던 무표정 분노조절장애는 어디로 가고 이런 스윗 판남이 눈앞에 있을까.
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흐렸던 눈동자가 지금은 그 속에 사랑을 꽉꽉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한테만 그런 거야."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ㅡ"
"사랑해, 아리엘."
"ㅡ 흐끅."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딸꾹질이 터져나왔다.
거의 매일 듣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튀어나오는 건 반칙 아니야?
갑작스러운 공격에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 분명 엄청나게 빨개져 있겠지.
"진짜아... 계속 그럴, 흑, 래?"
"계속 그럴 건데, 왜?"
"...바보야, 히끗, 진짜..."
그렇게 말로 하지 않아도 전부 알고 있는데.
사실은 내가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거나 해서 이러는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아니,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확실한 듯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고개 들지 말 걸.
놀림 당하는 기분이라 더 부끄러워졌다.
"그냥, 계속 알려주고 싶었어. 내가 너를 이 정도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건 고맙지만, 조금 부끄럽다고 해야 할지... 으응."
사랑 고백도 때에 따라서 용법과 용량을 지키면서 해줬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이 주는 사랑은 물론, 호의조차도 익숙치 않은 사람이 이 정도로 커다란 애정을 받아버리니 적응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과다 복용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무, 물론 싫다는 건 아니지만...'
싫지 않은 것과 부끄러운 건 별개의 이야기니까, 으응.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서는 그냥 웃고 있기만 했지만서도.
...조금은 자제해줬으면 하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