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5 - 사랑과 평화?(6)
"꺼져."
이건 매일마다 듣는 말.
"죽어버려."
이것도, 매일마다 듣는 말.
"대체 왜 내 옆에 계속 달라붙어 있는 거야? 너 싫다니까? 왜, 날 낳으면 뭔가 나아질 줄 알았어?"
이건 처음 듣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 같이 전부 내 마음 속에 틀어박혔다.
들을 수 있지.
들을 수 있는 말들인데, 계속 듣기에는 내 정신이 너무 연약했다.
그렇다고 아이의 곁에서 떨어지기에는 그 온기를 버려낼 수가 없었고.
"아가."
"아가라도 부르지 마, 마왕 따위가."
"..."
어디까지나 이것도 최대한 순화된 말이었다.
내 멋대로 뇌내 필터링을 거쳐 듣고 있는 거니까.
실제로는 이미 부모님이 몇번이고 돌아가셨을 정도로 험악한 말을 쏟아냈더랬지.
"입 다물고 있을 거면 그냥 죽어버리지 그래? 기왕 죽을 거면 나가서 죽던지."
"..."
"나가."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하고 꾹 참았었는데.
아이들의 앞에서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굳게 먹은 마음이 산산이 깨져나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한계이기도 했다.
내 몸ㅡ 정확히는 영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이전 세계의 파편이 점점 그 고개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얘가, 보자보자 하니까.'
망가지고 다시 접합되어진 마음.
그 속에 잠들어 있던 매콤한 향기가 속을 활활 불태워댔다.
씨, 어쩌구나 병, 어쩌구가 튀어나오기 전에 가까스로 입을 틀어먹을 수 있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이지?
'굳이, 참을 필요가 있나?'
몸이 편해지면 사람의 본성이 튀어나온다고, 요 며칠간 몸과 마음을 회복해서 그런지 조금씩 과거의 성격들이 그 틈을 비집고 나오려 했다.
...참자.
참자, 아리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달라.
나는 그저, 나야.
나는 그냥 아리엘ㅡ
"분명 너랑 관계를 맺은 새끼도 혐오스럽ㅡ"
"...조용히 해."
감히, 누구를 욕해.
속이 뒤틀렸다.
어떻게는 참아내려 버티고 있던 힘 그대로, 마음이 뒤틀렸다.
아아, 정말.
저런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왜 참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자기 뱃속에서 태어난 아기라고 해도 말이지, 훈육이 중요하다고 했잖아?
아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건 어른의 잘못이라고 했으니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겠지.
"...뭐야? 저리 안 꺼져?!"
"..."
"야, 야!? 꺼지라고, 씹... 야!!"
온갖 욕설이 난무하다 못해, 이젠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댄다.
연약한 몸뚱이는 아이의 주먹질에도 고통스러워 했지만, 머리 끝까지 차오른 분노는 그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주었다.
손을 뻗어, 아이의 팔을 붙잡고는 그대로 끌어당긴다.
"...나쁜 말을 했으니까 혼나야지, 안 그래?"
내가 듣기에도 서늘한 목소리였지만, 그렇다고 아이에게 체벌을 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아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할 뿐.
내가 다가오는게 싫고, 달라붙는게 싫다면 그걸로 벌을 주면 되겠지.
"윽..."
"꺼져, 꺼지라고!! 저리, 꺼져!!!"
할퀴고, 때리고, 깨문다.
전력을 다해서 발버둥치는 아이를 꼭 껴안자 어깨를 마구 깨물어왔다.
이 정도로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아이에게 부정 당하는 감각이란, 언제 맞이해도 별로 좋지 못한 느낌 뿐이었다.
"날 그렇게 죽여놓고는, 이제 와서 뭐? 웃기지 마!!!"
이 작은 몸뚱이에 어찌나 많은 힘이 잠들어 있던지, 잠시 틈을 내어주니 얼굴을 향해 주먹이 날아왔다.
분명 나보다 한참이나 작은 아이의 주먹질이었는데, 고개가 픽 돌아갔다.
'...아파.'
뺨을 부여잡으며 신음을 토해냈다.
내가 아파하는 와중에도 아이는 내 몸뚱이를 마구잡이로 때려대고 있었다.
어째 너무 아프다 싶었는데, 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자그마한 조각상이 어느새인가 아이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윽, 흐윽..."
"...나한테, 다시는, 달라붙지마."
전신이 쓰라렸다.
쓰러진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풀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아, 정말. 운동이라도 해야되는게 아닐까.
속으로 헛웃음을 토해내면서도 가쁜 숨을 내뱉었다.
옆구리가 쓰렸다.
"...하으, 흐으..."
"...엄살이라도 부리는 거야? 빨리 내 방에서 꺼지기나 해!!"
아니, 그런게 아니야.
엄살이 아니라 정말로ㅡ
"흐, 흐악..."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뚱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강한 충격이 가슴께로 퍼져나가고, 그곳에서 느껴지는 격통 덕분에 스스로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갈비뼈, 부러졌구나.
어쩐지 숨쉬기가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흑, 흐악, 흐아..."
살려줘.
누군가가, 도와줘.
비명조차 되지 못한 거친 숨소리가 절박하게 터져나갔다.
빌어먹을 몸뚱이.
겨우 이 정도로 죽으려 하다니,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시야를 채우는 붉은색과 함께 머릿속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아, 서."
손을 뻗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서, 아서, 아서...
나, 지금 너무 아파.
네가 필요해. 그러니까, 빨리ㅡ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너 지금 뭐라고 했냐고!!"
"케흑, 흑..."
엎어져 있던 상태에서 그대로 멱살을 붙잡힌다.
활활 불타는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니, 그제서야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용사 파티에 도적 캐릭터 하나가 있었지.
아리엘과 마찬가지로 절대 구할 수 없는 그런 캐릭터가.
"네가, 네가 그 이름을 대체 어떻게 아는 거냐고?!"
"...크흣, 켁..."
그러고 보면, 아이 앞에서는 아서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아서가 아이를 만나보겠다고 했을 때 그냥 허락해줄 걸 그랬으려나...
그렇지 않아도 숨 쉬기가 영 껄끄러웠는데, 멱살까지 붙잡히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건, 정말 죽을지도...'
숨을 쌕쌕 내뱉으며 고개를 떨꿨다.
아이에게 두들겨 맞아서 죽는 엄마라니, 이토록 비참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죽고 싶지 않았지만, 만약 죽는다면 이 이상의 비극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이것, 좀... 흐, 놔, 줘..."
"네가 아서를 어떻게 아는지 당장 말 해!!!"
"...제, 발..."
죽기 싫어.
죽기 싫으니까, 이제 좀 놓으란 말이야.
하지만 이미 분노에 눈이 멀어버린 아이의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남은 건 오직 내가 그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대한 증오 뿐.
"...아, 서."
"아리엘!!"
아서의 단점이라고 한다면 언제나 필요할 때 곁에 없다는 점이었지만, 장점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순간에 나타난다는 점일까.
이렇게 보면 정말 주인공이구나.
...조금 얄밉기도 하지만.
"...아서?"
문을 박차고 들어온 아서를 보며, 아이가 멍청히 중얼거렸다.
물론 그의 시선은 아이가 아닌 날 향하고 있었지만.
조금 유치하기는 했지만,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래, 아서가 신경쓰고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아이 상대로 이런 우월감이라니, 바보 같네.'
물론 자제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당한게 있는데, 이 정도는 갚아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여러모로.
"...어떤 새끼야."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분명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닌데도 느껴지는 진한 살기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아, 서... 진정, 진정..."
있는 힘 없는 힘을 전부 끌어다가 겨우겨우 아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너무 화내지 말고, 응?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그렇지?
"...아리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쿡쿡 찔러대는 통에 신음을 토해내자 아서의 눈동자에 걱정이 서렸다.
그래,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내 걱정이나 하란 말이야.
나 아파 죽을 것 같으니까 빨리, 응?
"흐으, 윽..."
신음을 참지 않고 일부러 토해내니, 아서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게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면... 흐극.
"바, 바보야아아..."
"미, 미안..."
잔뜩 울먹이며 올려다 보니,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눈매가 둥글게 변했다.
겨우 눈매 정도로도 사람의 인상이라는게 이 정도까지 변할 수 있구나.
바깥 공기도 차갑고, 몸은 아파서 죽어버릴 것 같았지만, 아서의 표정 변화가 재밌어서 키득키득 웃어버리고 말았다.
"후흐, 윽... 프하, 흑...으후후, 흐으으..."
"...아프면 그만 웃는게 어떨까."
웃을 때마다 신음이 터져나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치만, 재미있는걸 어떻게 해?
나를 웃기지를 말던지.
왜 나를 웃겨서 이렇게 아프게 만드는 거야?
"바보."
"바보라고 할 때만 제대로 말하네?"
"...바아보."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너무 아파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순간 웃음을 참는 듯 꾹 짓눌린 입술이 눈에 띄었지만, 시시덕거리는 것도 이제는 한계였기에 그냥 얌전히 눈을 감았다.
눈 뜨고 있다가 또 무슨 꼴을 볼줄 알고.
한 번 더 웃으면 갈비뼈가 폐를 뚫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정말 의사에게 가지 않아도 되겠어?"
"...여기로 충분해."
확 달라진 주변의 공기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세계수는 새싹이어도 세계수구나.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풀밭이 몸을 뉘이자 고통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확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 아이, 봤지?"
"...응."
아서의 무릎을 베고 누워 조심스럽게 물었다.
느린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속에 잠든 슬픔을 보니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를 통해서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인연을 보는 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이상하지 않을까?
심지어 그것이 가장 사랑하는 이를 해치는 모습이라면 더더욱 그럴 터였다.
분명 그들은 나를 증오할 권리가 있었지만, 나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용사님께서는 그 증오를 두고 볼 수 없는 듯 싶었다.
설령 그것이 과거의 인연이라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