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6 - 사랑과 평화?(7)
케이.
만약 네가 조금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고는 했었더랬지.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사랑과 육체의 사랑을 동시에 알려준 그녀였기에 더더욱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때, 아서. 이제 이 누님의 품에 안길 생각이 들었니?'
'...누님은 무슨, 동갑이잖아 너랑 나.'
'흐응, 원래 남자들은 가슴 큰 여자를 누님이라고 부르던데.'
제 육체를 이용해 남자들을ㅡ 아서를 유혹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매일마다 그와의 초야를 쟁취하기 위해서 달라붙고, 속삭이고, 쓰다듬고ㅡ
물론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이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나 본인이 좋다고 달려드는데, 모르는게 이상하겠지.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만약 이미 죽어버린 소꿉친구ㅡ 아리엘을 잊었더라면 그녀와 이어지지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었지만, 그만큼 가장 가능성 있는 미래이기도 했다.
비록 자신이 아리엘을 잊지 못하고, 그녀를 향한 마음이 커지기도 전에 죽어버렸기에 결국 의미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 아서...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거짓말이지? 응?"
분명 마지막에 보았던 모습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케이가 맞았다.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가 머릿속에 담겨있던 추억과 일치했다.
케이.
그리운 이름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서.'
아리엘.
소꿉친구 아리엘이 아닌, 마왕인 아리엘.
과연 과거의 인연이었다고 해서, 과거에 동료였다고 해서 아리엘을 해친 것을 용서해야 할까?
아니, 절대 아니지.
절대로.
"네, 네가 그 년이랑 붙어먹을 리가 없잖아. 마왕이잖아! 마왕이잖아?!"
"..."
"사람들을 죽이고, 그리고, 응? 나도 죽였잖아!"
"...마왕이 아니라, 마족들이 죽인 거야."
"궤변이야!"
그 마족들이 과연 누구의 밑에 있었느냔 말이야.
직접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죄가 사라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증오해.
증오하란 말이야.
그 여자를 증오하라고!
"내, 내가 대신 희생한 건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어! 네가 마왕을 쳐죽일 거라고 믿기 때문이었다고!"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가 터져나왔다.
이건 언젠가 사랑했던, 그리도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남자를 향한 애증일까.
그게 아니라면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은 여자를 향한 증오일까.
"네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케이."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네가 그러면 안 되지."
흡사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당장에라도 목덜미를 물어 뜯을 것 같은 그런,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목소리.
"이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면, 내가 이런 식으로 되살아나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너를 살리려고 그녀를 선택한게 아니야."
너는 알까, 아서.
그 한 마디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지.
차라리 나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마왕을 택했다면 어떻게든 합리화 했을 텐데.
"죽여버릴 거야."
"..."
"그 여자ㅡ 빌어먹을 썅년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라고."
자그마한 날붙이 하나로도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연약한 몸뚱이 정도라면, 지금의 자신이라도 충분히 죽여낼 수 있었다.
목, 심장.
그 어느 하나라도 조금만 파고든다면 순식간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겠지.
"그만!! 그만, 그만 말해!!"
그런 진한 증오가 한때의 동료에게서 터져나오는 것을 대체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란 말인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서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인식이 바뀌었다고,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돌아온 이들의 시선 또한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아리엘에게 그딴 말을 할 수는 없어, 케이."
"...아리엘?"
케이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고개를 숙인다.
그러고는 이내 아리엘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튀어나온지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설마, 마왕한테 소꿉친구 이름을 붙여준 거야?"
"아니, 우연히 이름이 겹쳤을 뿐이야."
"...그걸 그대로 믿었다고? 거짓말일게 분명하잖아?!"
거짓말일게 분명했지.
분명했는데, 설마 그게 진짜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뿐이니까.
"거짓말이 아니야. 그녀를ㅡ 아리엘의 대신으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세뇌나 협박을 당한 것도 아니야."
"...아서."
충격을 받은 듯 동그랗게 뜨인 눈 속에에 담긴 절망이, 그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왜 그런 말을 해?
거짓말이지?
대체, 왜?
네가, 대체, 왜?!
"나는,"
"그만,"
"그녀를,"
"그만!!!"
"사랑해."
그 한 마디가 끝난 뒤, 방 안은 기묘할 정도의 침묵에 휩싸였다.
믿을 수 없는 진실을 알아버린 소녀 하나와, 담담히 그 사실을 고한 남자 하나.
어듭고, 질척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서 아서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무저갱처럼 검고 검은 눈동자에 서린 파괴 욕구가 그의 몸을 강제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그만."
"..."
"이런 걸 바란게 아니야, 케이."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을 꽉 붙잡는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언젠가의 시체들을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래. 알고 있었잖아, 아서.
그녀를ㅡ 마왕을ㅡ 아리엘을 사랑한다는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잖아.
"이야기를 들어줘."
"..."
"내가 해주는 이야기를 전부 들은 다음 판단해줘, 케이."
그녀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 받아들일 수 있을 터였다.
그녀의 미소와, 아이들을 바라볼 때의 그 부드럽고도 상냥한 표정까지.
그것들을 알게 된다면, 그것들을 직접 보게 된다면, 그것들을 전부 겪게 된다면.
분명 케이 또한, 아리엘을 좋아하게 되겠지.
"싫어."
하지만 돌아온 건 단호한 거절의 답이었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ㅡ 그리고 절대 함께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
그 가느다란 팔을 털어낸 케이가 그대로 몸을 물렸다.
명백한 거절의 표시에 아서가 입을 다물었다.
"케이."
돌이킨다면ㅡ 아니, 의미 없는 가정이겠지.
원래대로의 관계로 돌아오려면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할 테니까.
아리엘을 사랑하는 자신, 아리엘의 부활을 포기한 자신, 마왕을 증오하지 않는 자신까지 전부 다 버려야만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나는 네가, 아리엘에 대해서 알아갔으면 좋겠어."
"..."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잘게 떨리는 몸 위에 그의 손길이 닿자, 조금이나마 그 정도가 줄어들었다.
케이, 제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내 말을 들어줘.
강제가 아닌 부탁.
그런 그의 진심에, 아주 조금이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딱, 한 번 뿐이야."
"..."
"내가 너를 믿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그러니까, 만약 네가 틀렸으면 그 빌어먹을 년을 죽여버릴 거야."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나 자신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지만, 만약에라도 그녀가 아리엘을 해치게 된다면 스스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
따뜻한 온기가 몸 속으로 파고들어, 천천히 의식을 일깨운다.
콜록거리며 마른 기침을 내뱉으니 검게 죽은 핏덩이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풀 위를 물들인 검붉은 덩어리가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살았구나.
"고마워."
손을 뻗어, 자그마한 새싹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는 내 손바닥 크기 만큼 자라난 세계수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흘리자, 마치 자아가 있는 것처럼 퐁퐁 움직여댔다.
뭔가 만화 속에서 나올 법한 느낌이네.
멍하니 그런 감상을 토해내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쩌면 좋을까."
조금이지만 트라우마가 다시 돌아와 버렸다.
내게서 태어나는 아기들이 나를 증오하면 어떻게 하지? 같은 생각이 심장을 채우니, 두려움이 치솟아 오른달까.
라일라도 그랬지.
에밀리도 그랬고, 이번에는 그 아이까지.
앞으로 낳아야 할 아이는 수도 없이 많은데, 과연 내가 그 절반 정도 되는 증오마저도 견뎌낼 수 있을까?
만약 과반수 이상이라면?
"...헉, 흐윽..."
여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죽인 만큼 낳는 것이 어째서 나에게 있어 최고의 벌이 되는 이유를, 다시금 절절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기가 나에게 증오를 쏟아내게 되어도 나는 반드시 용서하겠지.
어쩌면 그 결과가 나의 죽음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터였다.
"...이제 와서 멈출 수 없다는게 우스울 따름이지만."
레이나를 내 손으로 죽인 시점부터, 나는 이미 나머지 아이들을 전부 낳아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백만의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레이나가 백만 번 째에 태어난다면?
그렇다면 분명 전부 낳을 수밖에 없겠지.
그건 린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내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과 같았다.
"마왕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할리벨?"
자그마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살랑이는 꼬리로 내 입가를 훔친 할리벨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맞춰왔다.
얼마 동안 보이지 않다가 다시 보이다니, 이러니까 정말 내가 미친 사람 같잖아.
아니, 이미 미친 건가?
"행복하게 지내셔야죠, 마왕님. 겨우 붙잡은 행복을 놓아버리면, 너무 아깝잖아요."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을 때 가장 행복했어."
내가 구해낸 처음이자 마지막의 생명.
여전히 느낄 수 없는 온기에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런 내 등을 할리벨이 천천히 쓸어내렸지만, 그 어떠한 감촉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