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7 - 사랑과 평화?(8)
아서, 아서, 아서.
네 이름 두 글자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
그 두 글자를 입에 담을 때면 부풀어 오르는 이 마음이, 어느 정도로 진심인지 알고 있느냐고.
아아, 너는 분명 모르겠지.
당시의 네 눈동자에 담긴 건 나도, 그 누구도 아닌 이미 죽어버린 네 소꿉친구였으니까.
죽은 자의 흔적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시작된 여정이었었지, 아마.
사람들이 죽고, 사람들을 살리는 길 위에서도 너는 그 자그마한 흔적을 절대 놓치지 않았더랬지.
'나, 이렇게 보여도 꽤 유능한데 말이야. 어때, 이 정도면 일행으로 받아줄만 하지 않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사람들응 돕는 그 모습에 반해서?
아니면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그 모습에 나 또한 사랑 받고 싶다고 느낀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ㅡ
'어서 가, 아서. 함정 해제는 도적 전문이니까, 어서.'
ㅡ그래도, 너를 사랑한 마음 만큼은 진짜였어.
닳디 닳은 몸뚱이와 마음을 최대한 사용해서 유혹했는데도 넘어오지 않았더랬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태도로 다가갔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순결한 처녀처럼 네 얼굴을 볼 때마다, 네 목소리 한 조각 한 조각을 귓속에 담을 때마다 얼굴을 붉혔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래, 너를 가질 수 없었기에 네 안에 영원히 남고자 했다.
사랑으로 남을 수 없다면 하나의 커다란 상처로 남기 위해서ㅡ 흉터로 남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었었지.
"...아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너를, 나는 알지 못한다.
언제나 피폐하게 물들어 있는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진 모습을, 나는 알지 못한다.
분명 내가 옆에 있는데도 날 향하지 않는 시선이 아파서, 괜히 몸을 더욱 움츠렸다.
"아가, 이리 오렴."
"...싫어."
어울리지도 않게ㅡ 아니, 어울리나?
아무튼, 마왕이라는 작자가 저렇게 친절한 척 하는 모습이 참으로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기에 남아있는 이유라고 한다면, 아서가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달라지게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바로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싫, 다니까?!"
"..."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두려고 했지만, 보는 눈이 있었다.
그걸도 가장 보면 안 되는 사람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이자, 피부를 타고 서늘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서늘하지만 따뜻하다니, 모순이잖아.
'마족 주제에.'
이것 때문이었다.
인간과는 다른 이 서늘함 때문에 그녀가 마족인 것을 알아차렸더랬지.
그것만으로도 혐오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마왕이라는 사실까지 깨달으니 뭐랄까...
...웃기지도 않아, 정말.
"...이제 그만하지 그래? 굳이 싫다는 사람을 계속 붙잡고 있을 필요가 있어?"
결국 내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아도, 아서는 이 녀석을 죽게 두지 않을 터였다.
이 정도로 사랑에 빠진 얼굴은 죽은 제 소꿉친구의 이야기를 할 때 조차도 본 적 없었으까.
'...이럴 줄 알았다면 다시 살아나지 않는 편이 좋았어.'
그저 하나의 희생으로 끝났다면 이토록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차라리 그의 마음 속에 커다란 흉터 하나로 남는 편이 좋았을 텐데.
"아가, 나는ㅡ"
"그러니까, 나는, 네, 아가가, 아니야!!!!"
화를 내게 할 생각이었다면 성공을 넘어서 아주 대성공이었다.
내 몸을 감싸안은 팔을 떨쳐내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역겨워.
감히 누가 누구의 부모 행세를 하겠다는 건데?
"너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뚫린 입이라고 아무렇게나 지껄이지!!"
씩씩거리며 분노를 토해낸다.
아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어떻게 부모 노릇을 하겠다는 거야?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나한테, 부모 따위는 필요 없어."
부모란 존재는 언제나 그랬지.
언제나 그랬어, 언제나!
잊고 있었던 기억이 피부를 기어다녀, 신경질적으로 팔뚝을 긁어내렸다.
"...그러니까 부모인 척 하지마. 역겨우니까."
동그랗게 떠진 눈을 그대로 후벼파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낼 수 있었다.
아아, 정말이지...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를 껴안았던 품의 그 온기가ㅡ 그 부드러움이 하나의 혐오가 되어 심장을 파고들었다.
'아파, 아파요!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가만히, 가만히 있어! 이 빌어먹을 년이, 끝까지 쓸모 없기는!'
분명 전부 잊어버렸을 기억이었는데, 왜 이제와서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나는지 모르겠네.
하하, 하고 헛웃음을 토해냈다.
아버지, 당신의 말이 옳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역시 끝까지 쓸모없는 년이었던 것 같아요.
"씨발, 씨발, 씨발..."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신결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를 범하던 좆이, 나에게 거짓된 사랑을 속삭이던 여러 목소리들이 머릿속에 달라붙어서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흣..."
아서.
나는 네가 나만의 왕자님이 되어줬으면 했어.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서..."
온갖 진창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너는 너만의 행복을 이뤄냈구나.
나는 전부를 잃고, 결국 사랑과 목숨까지 잃었는데.
아아, 물론 네가 행복하다면 나도 좋아.
그렇지만, 그렇지만ㅡ
"...그 행복 속에, 내가 있으면 안 됐던 거야?"
만약 살아있었다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을까?
차라리 그때 희생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았더라면, 그의 곁에 있는게 내가 될 수 있었을까?
지금 와서는 의미 없는 가정이었지만, 상상할 수밖에 없었더랬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유일한 의미였기에.
"물에 젖은 생쥐 꼴이네."
"...에밀리?"
문이 열리길래 분명 마왕인줄만 알고 있었거늘, 막상 고개를 들어올리니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자그마한 소녀였다.
분홍색 눈동자에 분홍색 머리카락.
동시에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건방진 표정까지.
크기를 제외하면 기억 속의 그녀와 완전히 똑같았다.
"뭐야, 그렇게 큰 소리 치더니 너도 죽은 거였어? 천재 마법사님 다 죽었네~"
"...너처럼 마왕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죽지는 않았는데? 겨우 함정 따위에 걸려서 죽어버렸으면서."
"내가 대신 죽어서 목숨을 부지한 주제에 말이 많네. 천~재 마법~사 님?"
눈이 마주친다.
노려보는 것 같기도, 째려보는 것 같기도 한 묘한 시선들이 서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원래의 크기였다면 약간의 표독스러움이 담겼을지도 몰랐지만, 이런 자그마한 몸뚱이로는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프흐, 하핫!!"
"정말이지 걸작이잖아... 네가 이런, 이런, 자그마한 꼴이 될 줄이야!"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여정을 함께할 적에는 그다지 사이가 안 좋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 다시 보니 그저 유쾌하기만 했다.
그 잘난척쟁이 천재 마법사께서 결국 죽어버렸다니!
저 꼴을 봐, 정말 쓰다듬고 싶게 생겼잖아!
"읏?! 뭐, 뭐하는 짓이야?!"
"원래 귀여운 아이는 쓰다듬는 거란다, 꼬맹아."
"그러는 네가 더 작거든?! 빌어먹을 쥐새끼가!!"
"사역마로 쥐를 쓰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면 그런 거야? 사역마로 쓰고 싶을 만큼 믿음직하다는 뜻?"
제 정수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에밀리가 퍼드득 몸을 떨었다.
마치 더러운 오물이 묻었다는 것 마냥 표정을 일그러뜨린 그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물론 상대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아무 남자한테나 대준 창녀 주제에!"
조금 과한 감이 있었지만, 무시 당했다는 사실에서 튀어나온 분노는 쉽게 참을 수 있을 법한 것이 아니었다.
씩씩거리며 성을 내고 있는 에밀리를 앞에 두고 케이의 표정이 잠시 구겨졌지만, 그것도 잠시.
멋들어지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케이가, 그대로 턱을 치켜올렸다.
"다시 살아나서 이제 처녀인데? 이 몸으로는 아직 경험 인수 제로인데?"
"그래봤자 네 경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
"오히려 더 좋은거 아닌가? 경험이 있어서 능숙한데 처녀라니. 이것 만큼 완벽한 것도 없잖아?"
예상 외의 당당함에 에밀리의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본인이 뭐라고 말을 한들 상대는 그 말들을 전부 대충대충 흘려들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케이의 입장에서는 상대의 입을 다물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아무튼 다시 보게 되서 정말 반가워, 에밀리."
"...나는 별로 안 보고 싶었어."
슬쩍 다가와 억지로 손을 잡아오는 상대에 에밀리가 표정을 찌푸렸지만, 케이는 그것마저도 즐겁다는 듯 피식피식 웃을 뿐이었다.
우울하던 찰나에 잘 됐네.
눈앞의 천재 마법사님을 어떻게 골려줘야 할지 생각히며, 천천히 손을 잡아당겼다.
"야, 이거 안 놔?! 야, 야?! 잠, 깐ㅡ"
"그렇게 싫으면 네 잘나신 마법으로 빠져나가면 되잖아? 사실 좋으면서 일부러 싫다고 말하는거 아니야?"
이 다혈질 마법사라면 분명 불덩이 하나나 둘 정도는 날아오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 성격이 좀 유해졌나 싶었지만, 표정을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지만서도.
그러면 뭘까. 대체 왜 아무런 저항도 안 하는 걸까.
'...설마.'
"에밀리 너, 마법을 못 쓰는 거야?"
"..."
순식간에 굳어지는 얼굴을 보며, 케이가 방긋 미소지었다.
그 미소가 무슨 의미일지는 오직 그녀만이 알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