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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69화 (169/342)

Chapter 169 - 미끼.(1)

"바로니스 국왕. 용사에게 시해 당했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멀쩡하신 것 같군요."

"...보르곤체프, 인가."

불길할 정도로 검은 남자를 내려다 보며 바로니스가 이를 갈았다.

교단에서 믿을 만한 인물을 보내준다고 하길래 승낙했더니, 하필이면 이 녀석일 줄이야.

제 밑에 있을 때부터 수상한 자였지만 설마 교단의 끄나풀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비웃으려고 온 건가? 아무리 상처가 깊다고 한들, 네 목 하나 잘라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만."

"진정하시죠 바로니스 국왕 폐하. 마족의 힘을 얻었다고 해서 정신까지 마족이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으드득, 하고 이가 갈렸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눈앞의 녀석을 찢어발기라고 외쳐댔지만, 아직은 교단과 척을 질 때가 아니었다.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마신을 이 세계에 강림시키고, 그 힘 전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 교단의 버러지들을 싸그리 죽여내는 날이 될 테니.

"아무튼,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 하나 뿐입니다."

"말해라."

"미련하게 북부의 성벽을 두드리는 것보다는, 목표를 북부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이 더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즉 사용했겠지.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에 바로니스가 코웃음을 쳤다.

마왕이라는 존재가 과연 미끼 같은 것에 이끌려 북부 밖으로 나올까?

아니, 절대 그러지 않겠지.

최소한 그 몸뚱이 위에 머리가 달려있다면야 절대 그렇게 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그냥은 나오지 않겠죠. 하지만, 미끼를 쓴다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손짓과 함께,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몇몇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양 손에 밧줄을 쥔 이들은 마치 가축처럼 무언가를 질질 끌고 있었는데, 끌려오는 것의 꼴이 어찌나 비참하던지 바로니스가 헛웃음을 토해냈다.

신성수에 얼마나 절여댔기에 저런 꼴이 되었을까.

참으로 감탄이 나올 정도의 솜씨였다.

"마왕과 함께 있던 마족입니다.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곁에 두던 동족이 이런 꼴을 당했다면 분명 찾아오겠지요."

"...좋군."

"좋아하실줄 알았습니다."

비죽 솟아오르는 입꼬리가 꺼림칙했지만, 예상 외의 소득이었다.

이대로 마왕이 나오지 않는다면 저 마족을 죽여 화풀이 용도로 사용할 수 있고, 나온다면 그 뿔을 강탈해 마신의 부활을 이룰 수 있겠지.

"그러면, 근 시일 내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바로니스 국왕 폐하."

문이 닫히고, 어둠이 드리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촛불이, 바로니스의 얼굴을 비췄다.

사악하고도 끔찍한 미소 안에는 진한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드디어, 앞으로 한 발자국이군."

이름 모를 이들의 핏자국으로 물든 홀 안에서, 악마가 중얼거렸다.

***

"...느낌이 이상한데."

몸이 으슬으슬한게, 무언가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온도 차이 때문에 그런 건가?

일교차가 심하면 감기에 걸리기 쉽다고 했으니까.

세계수의 주변은 따뜻했는데, 정작 조금만 멀리 가면 엄청나게 추워진다는게 문제였다.

"그나저나, 오늘도 내 옆에 있구나."

"...몰라. 말 걸지 마."

피부가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에밀리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는 것 같았지만, 종종 향해져 오는 시선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냥 인정하면 좋을 텐데.

"케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니?"

이제는 날 아주 보지 않을 셈인지 방문을 꼭꼭 걸어잠근 아이를 떠올라며 조금이지만 서운함을 느꼈다.

저러면서도 에밀리와는 만난다는게 참...

사이가 좋은 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나와도 사이 좋게 지내달라고 빌어야 하는 건지를 모르겠다.

"......그 년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에밀리는 언제나와 같이 신경질적인 반응이었지만서도.

아무래도 저번에 기분 나빴던 것도 전부 케이 때문인 듯 싶었다.

그러면서도 거의 매일마다 만나는게 참 우습다고 생각하지만.

"자, 슬슬 점심 먹으러 갈까?"

"가려면 너 혼자ㅡ"

꼬르륵.

그럴 줄 알았지.

아무리 성격이 고약하다고는 하지만, 배고픔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 어리네, 어려.

물론 정신은 지금의 몸보다 훨씬 더 성숙하겠지만서도.

"자, 가자. 오늘은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응?"

"...몰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을 슬슬 잡아당기면 또 자리에서 일어난다.

츤데레구나, 츤데레야.

나와 손을 잡고 있는데도 고개를 돌리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 붉어진 얼굴을 내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아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거려나.

'귀까지 빨개진 건 말 안 하는 편이 낫겠지...'

말했다가는 분명 오늘 점심은 굶을 테니까.

"읏, 추워..."

조금 벗어나니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마법보다도 더 마법 같네.

옷 틈 사이로 들이닥치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온기가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기침을 했을 정도의 한기였다.

"춥지 않니?"

"빨리 가기나 해."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정말, 솔직하지 않기는.

길게 늘어진 옷자락을 살짝 들어, 그대로 아이의 몸 위로 덮었다.

몸집이 작아서 그런지 이런 것도 되는구나.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춥기는 추웠던 모양이었다.

"벽난로에서 몸이라도 녹이고 있으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지?"

"그리고 케이에게도 밥 먹으려면 내려오라고 전해주렴."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지. 아주 잘 듣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전이었다면 잔뜩 상처 받을 법한 말투였지만, 요 며칠 동안 메일리와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지금은 꽤 익숙해진 상태였다.

불퉁거리고, 짜증을 잔뜩 섞고, 신경질을 흩뿌린 듯한 느낌이랄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계속 듣다 보니 저 말투도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아무래도, 적응을 잘 하는 건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똑 닮은 마족도 마찬가지인 듯 싶었다.

"아서는 언제쯤 오려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슬슬 쓸어내렸다.

내 눈동자의 색과도, 아서의 머리카락 색과도 닮아있는 보석이 빛을 반사해 자그맣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를 않는다니까.

'내가, 결혼이라니...'

멍하니 생각에 빠져들어서는 식기들을 꺼냈다.

아, 이렇게 따지면 결혼을 하기 전에 아이부터 낳은게 되려나.

더 따지고 들어가면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았지만, 별로 좋은 기억들은 아니었던지라 최대한 빨리 털어내기로 했다.

아무리 미화한다고 해도, 그가 나에게 했던 짓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앗, 따가..."

봐, 이렇게 쓸데 없는 생각을 하니 다치고 그러지.

식칼에 베여 따끔거리는 손가락을 얼른 입에 물었다.

입 안에서 느쎠지는 비릿한 향기에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다.

"...하아."

배부른 소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왁자지껄 할 때가 좋았는데.

털갈이를 끝낸 수인들은 근처 산이나 마을들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엘리는 언제나와 같이 의술을 배우러 다녔다.

라일라는 미안함 때문인지 도통 나를 만나려 들지를 않았고, 아서는 최근 북부의 전선을 두들기는 왕국군 때문에 이리저리 불려다녔더랬지.

거기에 더해서 케이는 나를 보기 싫다며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결국 남은게 에밀리 밖에 없다는 것이 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였다.

또 다른 하나는 내가 외로움을 엄청 탄다는 것이었고.

"케이는 어떻게 됐니?"

"안 먹는데. 뭐, 그냥 굶어 죽으라지."

"...나쁜 말 하면 못 써."

"내 입이니까 내가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하며 젓가락을 집어드는 에밀리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에밀리를 키울 때 조금 더 많이 훈육했어야 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뭐, 머리가 다 커버려서 무어라 말한다고 한들 들어먹지 않겠지만서도.

"뭐,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하네. 예전보다 더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칭찬해준 거야?"

"......그런 셈 치던지."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게 이런 뜻이려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수리를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는데, 지금 보니 아주 귀여운 개구쟁이가 따로 없었다.

봐, 밥도 잘 먹고 얼마나 보기 좋아.

"확실히, 그러네. 예전에도 내가 만든 밥 만큼은 잘 먹었었으니까, 응."

"...밥 먹는데 쓰다듬지 좀 말지?"

"미안, 기분 나빴어?"

방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하자 에밀리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분명 위협적인 표정이었지만, 뭐랄까.

입에 음식을 가득 담은 채로 말해봤자 하나도 안 무서운데 말이지.

"팔자도 좋구나."

"...여왕?"

그렇게 에밀리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손님 하나가 불쑥 찾아왔다.

나와 아서,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이곳에서 머물게 해준 은인의 등장이었다.

"네가 봐야 할게 있다."

식사라도 대접할까 했지만 표정이 심각해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를 향해 무언가를 건네는 여왕의 행동과 동시에, 식칼에 베였던 손가락에서 진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받지마.

받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그냥, 가만히 있어.

"봐야 할게 있다니, 무슨ㅡ"

한 걸음 물러섬과 동시에, 마치 짐승과도 같은 비명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그건 내 기억 속에 있는 비명과 비슷해서, 반사적으로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마수들 앞에 남은 마족 아이.

그 아이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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