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4 - 다시 그곳으로.(2)
"레아, 진짜 용사님이셔. 진짜 용사님!"
"...왕국의 배신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믿는데?"
아서를 보며 눈을 빛내는 아이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아이 하나.
그리고 나와 아서, 엘리에게 검을 겨누고 있은 호위 기사들까지.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검을 거두지는 않는구나.
뭔가 엄청나게 철저한 사람들이네.
"저희들은 습격자가 아닙니다. 보내주시죠."
"...당신이 진정으로 왕국의 배신자라면,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말입니다."
가장 앞에 선 기사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해왔다.
하긴 지금 바로니스 국왕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마왕인 나를 포함해, 배신자인 용사를 처단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이었으니까.
몇몇은 아서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상황을 꺼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결정권은 아무래도 눈앞의 남자에게 있는 듯 싶었다.
"로엔 경, 검을 내려주세요. 용사님이 저희들을 배신할 리가 없다는 건 경이 제일 잘 알고 계시잖아요!"
"...하지만 아가씨, 이런 상황에서는 만약의 만약의 경우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여 저들이 저희들의 등을 노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날 겁니다."
확실히, 타당한 의심이기는 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존재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 적일지도 모르는 이들을 쉽게 보내주고, 등을 보인다?
그것도 정면에서 전투를 치러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에게?
이해가 됐다.
우리가 들킨 것도 어디까지나 내 실수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으응...
"제 일행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저 또한 당신들을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맹세하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그만, 로엔 경. 로엔 경 정도 되는 사람이 상대의 살기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대는 용사입니다."
"상대가 용사님이니까 믿는 거에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 세상을 구해오셨던 용사님이시니까."
확실히, 마족들에게 고통 받던 이들을 위해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고생하던게 바로 아서였으니까.
내 이야기가 아닌데도 괜히 뿌뜻해져, 베시시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내가 마왕이라는 건 비밀이었지만ㅡ 아니, 그보다 마왕이 용사 이야기를 듣고 제 이야기인 것처럼 자랑스러워 하는게 맞나?
"...아가씨의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겠습니다."
"뭐야, 내 뜻은? 왜 루나 말만 듣는 건데? 당장 다시 칼 겨눠, 로엔!"
뭔가 푸근한 인상의 아이 옆의 또 다른 아이가 앙칼진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저기, 일단은 조금 조용조용히 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아무리 거리가 있다고 해도 여기는 왕국군의 영역ㅡ
"설마 시선을 끌어놓고 왕도로 가실 생각이었나?"
"웬놈이냐!"
"...마족?"
생각하기가 무섭게, 나무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백힌 피부와 머리 위에 난 뿔.
누가 봐도 마족이었지만, 입고 있는 갑옷이나 의복 같은 건 왕국군의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직접 보니까 기분이 묘하네.'
마치 할로윈에 사람들이 악마 코스프레를 하는 걸 본 것 같달지, 아니면 오랑우탄이 사람 흉내를 하는 걸 본 것 같달지... 으음.
쿵쿵 뛰어대는 심장에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마족이 된 인간을 봐서 이러는 건가 싶었지만, 엘리를 봤을 때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친근감만 들 뿐이었지.
"심지어 그 옆에 있는 건ㅡ 호오."
정말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구나.
겉으로 보면 꽤 우스운 꼴일 텐데도 그 얼굴에는 미소 한 점 없ㅡ 아니, 이미 비웃고 있네.
아무튼 어디에서나 볼 법한 삼류 악역 같은 등장을 한 녀석이 나를 보며 입맛을 다셔대기 시작했다.
"...아서. 저 녀석, 기분 나쁘구나. 진심으로."
슬쩍 소매를 잡아당겨 아서의 등 뒤로 숨었다.
나를 보는 눈길에 색욕이 가득 들어찬게, 시선만으로 강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저딴 놈에게 붙잡히면 분명 볼 꼴 못볼 꼴 전부 당하게 되겠지.
물론 아서 또한 녀석의 시선에 담긴 저열함을 눈치챘는지, 어느샌가 성검을 뽑아들고 있는 채였다.
"아름다워. 내가 봤던 그 누구보다! 역시 마왕이라면 그 아름다움 또한 마족 중 제일이라는 건가?"
"...뭐?"
"마왕, 이라고?"
거둬졌던 칼날이 다시 한 번 우리를 향해 겨누어졌다.
입 가벼운 자식.
등장부터 눈빛, 그리고 말하는 것까지 전부 마음에 안드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래, 저 여자가 마왕이다. 기억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겼어."
"용사님께서 왕국을 배신 했다는 소문이, 진짜였다고?"
역시 이런 전개로 흘러가는구나.
딱히 변명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한들 저들은 절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을 테니까.
마왕이라는 이름은 인간들에게 그저 증오를 불어일으킬 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말이지ㅡ'
"미안하지만, 나는 마왕이 아니다. 봐라, 머리에 뿔도 없지 않느냐?"
마왕이 아니라면 어떨까.
물론 나는 마왕이 맞았지만, 엘리나 아서가 말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내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터였다.
심지어 이 자리에서 딱 봐도 마족인 존재는 저 녀석 밖에 없기도 했고.
"보거라. 저 왕국군의 옷을 입은 마족의 말을 믿을 건가? 아니면 용사와 함께 있는 나를 믿을 테냐."
"그건ㅡ"
혼란이 올 수밖에 없겠지.
누가 봐도 마족인 녀석이 저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과연 누가 쉽사리 믿어줄 수 있을까.
지금 검을 겨눈 건 마왕이라는 단어가 들려왔기에 반사적으로 뽑아든 것이 분명했다.
봐, 표정만 보더라도 이미 의심이 가득하잖아.
"누가 보아도 마족인 존재가 왕국군의 의복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로니스 국왕의 타락은 증명되었다. 그러면 대체체 누구에게 검을 겨눠야 하는 거지? 사람들을 구원한 용사? 아니면, 버러지 같은 마족?"
버러지 같은 마족이라는 말을 내뱉을 때 즈음에는 조금 양심이 찔렸지만, 설득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노력이 통했는지 칼날의 방향이 바뀌어, 나무 위에 있는 마족을 향해 겨누어졌다.
"이, 멍청한 녀석들이..."
멍청한 건 네가 아닐까.
마족의 모습을 하고 그런 말을 하면서 설득이 될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하물며 그 머리 위에 달려 있는 뿔이라도 잘라냈다면 인간처럼 보일 수는 있었겠지.
뭐어, 엄청 아프기는 했겠지만서도.
"닥쳐라, 이 타락한 종자야! 이 검으로 네 녀석의 목을 쳐주마!"
"겨우 인간 주제에ㅡ"
그쪽도 얼마 전까지는 인간이었으면서 겨우 인간이니 뭐니...
직접 눈앞에서 보니 저것만큼 꼴사나운 일도 없었다.
유치하다고 해야 하나, 오글거린다고 해야 하나.
'특히 머리에 뿔을 달고 이야기 하니까 더 그렇네.'
아무튼, 갑자기 여러 명의 검이 향해지니 상대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더 이상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싶었다.
그래, 왜 괜히 쓸데 없는 말을 해서 적을 만들어.
차라리 기습을 했다면 더 승산이 있었을 텐데.
"설마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기사가 된 자가 등을 보이는 건 수치나 마찬가지일 텐데?"
"...네 년!"
"용사가 앞에 있음에도 당당하던 녀석이 다른 이들의 검이 더 겨누어졌다고 도망치려 든다는게 말이나 되는 건가? 정말이지, 우습기 짝이 없구나. 명예도 뭣도 없는 쓰레기 그 자체로군."
혹시 도망친 뒤 동료들을 불러올까 싶어 미리 말을 해뒀다.
역시 기사라는 건 명예라는 단어만 들리면 과민하게 반응한단 말이지...
몸은 마족이지만 정신은 기사라는 걸까.
임자가 있는 아녀자를 불순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기사로써 또 어떤가 싶지만서도.
"대신, 정정당당하게ㅡ 큭?!"
"힘을 위해 마족으로 영락한 주제에 감히 정정당당을 입에 올리는가!"
마족의 입을 막은 건 다름 아닌 귀족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호위기사였다.
어찌나 움직임이 빠르던지 주변으로 바람이 불 정도였는데, 순식간에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는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같았다.
"기습을 하다니, 비겁한 자식!"
"마족 따위가 감히 비겁을 입에 담다니, 양심도 없는 건가?"
"뭣ㅡ 크악?!"
한 번 더 신경을 긁어주니 이번에는 막지 못하고 그대로 일격을 허락했다.
그나저나, 저렇게 큰 상처를 가지고도 멀쩡히 움직이는구나.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분명 죽었을 정도의 상처였을 텐데.
"언젠가는, 네 년을 반드시 찢어죽여주마!"
"가능하다면 말이지."
"무슨ㅡ"
소리조차 나지 않은 깔끔한 일격이었다.
봐, 목이 허공을 날고 있는데도 본인이 어떻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꼴이잖아.
"꺄아, 흐읍?!"
"쉬이ㅡ 비명을 지르면 저런 녀석들이 또 찾아올 거다."
비명을 지르려는 아이들의 입을 꾹 틀어막았다.
아서가 진다는 건 애초에 상정하지도 않았지만, 만약에라는게 있으니까.
무엇보다 그를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고 약속한다면 놓아주마. 알겠느냐?"
"..."
"좋아."
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아이들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이들을 대할 때는 미소와 진심으로 대해야 한 법이지.
봐, 바로 이렇게 말을 잘 들어주잖아.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구나."
뭔가 저택에 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나서 반사적으로 손이 뻗어졌다.
쓰다듬어지는걸 참 좋아하던 아이들이었는데...
뭐, 자기들끼리 쓰다듬으면서 잘 지내고 있지 않을까.
' 내가 없어도 잘 지내야 할 텐데...'
떠올리니 괜히 걱정이 앞섰다.
어머니의 본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