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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76화 (176/342)

Chapter 176 - 다시 그곳으로.(4)

병력을 북부의 전선에 전부 몰아놓은 건지, 딱히 왕국군을 만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우연히 안전한 길을 골라서 가고 있는 걸지도 몰랐지만, 우연보다는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낫겠지.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면 안되겠지만서도.

"아리엘 씨는 어딘가의 귀족이나 왕족이신가요?"

곤란한 질문이었다.

마왕이라 자칭할 생각은 없었기에 무언가 변명을 해야 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조금 양심이 찔렸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던 인간이 과연 귀족이나 왕족이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도 되는 걸까.

전혀 아니겠지.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말투요. 그런 말투는 조금 오래된 귀족들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오래 됐다는 말은 역사가 오래됐다는 뜻이에요!"

물론 마족이니만큼 외형에 비해서 오래되기는 했겠지만서도ㅡ

뭐랄까, 말투가 문제라고 하니까 조금 묘한걸.

슬쩍 고개를 돌려 아서를 바라보자, 저 혼자 웃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아니, 정정.

엘리도 같이 웃음을 참고 있네.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보지는 못하지만, 내 여자의 감이 그렇게 일러주고 있었다.

"이런 말투는 꽤 흔한 편이지. 겨우 말투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별로 좋은 습관이 되지 못한다."

"아, 아니에요! 말투 뿐만이 아니라, 그, 그으ㅡ"

"...그?"

"......예쁘시잖아요. 어딘가의 공주님처럼, 반짝반짝!"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엘리였다.

내가 예쁘다는 말에 웃은 걸까, 아니면 공주님이라는 말에 웃은 걸까.

하긴, 마왕이 어딘가의 공주님 같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그게 웃기지 않으면 뭐가 웃길까.

겨우 그 웃음 소리 하나로 사람들의 시선이란 시선은 전부 독차지 했는데, 욕심쟁이도 이런 욕심쟁이가 따로 없었다.

"쓰, 쓸데없는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다."

미안해하는 아이의 정수리를 톡톡 두드려줬다.

겨우 그런 걸로 미안해 했다가는 하루 종일 사과만 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니, 비죽 튀어나온 입술이 눈에 띄었다.

옆에 있는 아이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에트엘 영지로 가면 됐던 거잖아?! 다리도 아픈데 진짜, 짜증나!!"

"미안. 내가 잘못 했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응?"

"몰라! 더 이상 걷는 건 무리란 말이야!"

아이가 바닥이 털썩 주저앉자, 주욱 뻗어진 다리가 눈에 띄었다.

확실히, 왕도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를 걸어왔다면 어린아이들에게는 고문이나 다름 없을 터였다.

"조금만, 상태를 보자꾸나."

"읏, 만지지 맛?!"

"쉬이, 아프게 하지 않을 테니까."

다리에 내 손길이 닿는 순간, 아이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만큼 아프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확인하지 않으면 정확한 상태를 알 수가 없으니까.

조심스럽게 바지 밑단을 걷어올리자, 퉁퉁 부어오른 다리가 눈에 띄었다.

"지금까지 고생했구나, 음. 레아."

"...하, 하나도 고생 아니었거든?! 이 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여태까지 참아오다가 이제야 투정을 부린다는 건 정말 한계에 달했다는 뜻이겠지.

다른 사람들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걸 보면 다들 몰랐던 것 같고.

레아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슬슬 닦아주며 속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이렇게 작은 아이들이 아직까지도 고통 받고 있다니...'

마왕인 나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 없었고, 다른 마족들은 전부 죽거나 인간들의 노예가 되었지.

분명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까지도 고통 받는 존재들이 있었다.

창작물 속의 세상이라고 무조건 밝고, 희망차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아니, 여기는 현실이야.'

현실에는 절대적인 해피 엔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지.

이곳은 현실이었기에 마족들이 전부 사라졌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거나, 갑작스럽게 평화로워진다거나 하지 않았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있다고, 마족과 인간의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인간과 인간의 전쟁이 있을 뿐이었다.

"아프더라도 조금만 참으렴."

"무슨 짓ㅡ 흐꺄윽?!"

천천히, 그리고 진득하니 아이의 다리를 주물렀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아픈 것도 알고 있고, 지친 것도 알고 있지만 조금만 더 힘내자.

이곳은 위험하니까, 더 안전한 곳으로 가는 거야.

"어때, 지금은 조금 괜찮니?"

"네, 네에..."

아이들을 대할 때는 내려다 보는 것보다는 올려다 보는 편이 낫고, 얼굴에는 미소를 띄는게 좋다고 했었나.

뭔가 얼굴이 붉어지기는 했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서 괜히 뿌듯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업히렴."

"네, 아리엘 님..."

나에게 손을 뻗어오는 레아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업어준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려나.

슬쩍 시선을 돌려서 아이들의 호휘 기사 중 하나에게 살랑살랑 손짓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업어주고 싶었지만...'

고양이 수인들처럼 엄청나게 가벼운 아이들을 제외하면, 잠시는 몰라도 오랫동안 업는 건 무리였다.

심지어 껴입은 옷의 무게 때문에 더더욱 그런 감이 있었고.

"루나, 라고 했었나? 원한다면 네 다리도 주물러 주마."

"아, 아니! 괜찮아요! 저는 아직 괜찮으니까, 네에..."

그렇게까지 격하게 거부할 줄은 몰랐는데.

조금은 안타까웠지만, 아이의 상태가 아직 괜찮다는 건 다행이었다.

"자, 그러면 슬슬 출발하자꾸나."

아직 갈 길은 멀었고, 우리들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

...말을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말이지.

"하아, 하으, 흐아..."

옷이 너무 두껍잖아.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옷 무게와 더불어 옷이 땀에 젖으니 체력 소모가 장난 아니었다.

애초부터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더 그런 감이 있었지만서도.

"조, 조금만... 흣, 조금만, 쉬었다 가자꾸나... 흐악..."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걸으면 엉망으로 주저앉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겨우 주저앉을 정도로 끝날까. 아주 드러누워 버리겠지.

"조, 조금만 쉬었다 가도록 하죠!"

레아가 당황한 듯 외쳤다.

그야 자신있게 말한 사람이 가장 먼저 쓰러진 격이니까 당연하겠지...

심지어 왕도에서 여기까지 온 자신들보다 더 먼저 휴식 선언을 하기까지 했으니까.

'부끄러워. 진심으로 부끄러워...'

"아, 아서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 쏠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여서, 얼른 아서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엄청 쌩쌩하구나.

역시 용사의 체력은 상상 이상이라고 생각하며 몰래 입술을 비죽였다.

어떻게 이런 몸뚱이가 마왕이야.

"...그나저나, 다들 너무 나만 바라보지 않느냐?"

"큼, 크흠, 흠..."

과도한 관심은 독이 된다고 했다. 그건 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시선을 피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영 꺼림칙했지만, 지금은 일단 몸을 쉬는 편이 우선이었다.

"아서."

"응, 아리엘."

"덥구나. 엄청나게 더워. 옷 때문에 열이 빠져나가지를 않아서, 특히 더 덥구나."

원래 체온이 낮아서 그런지 열기에 특히 더 약했다.

아니, 지금 생각하면 차가운 것에도 약했잖아.

더워도 안 돼, 추워도 안 돼.

언제나 봄, 아니면 가을만 바라는 듯한 몸뚱이에 괜히 입술을 비죽였다.

무엇 하나에라도 강하게 해줬다면 옷을 벗던지 입던지 고를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지금은 벗는 쪽이지만.'

"아서."

그렇게 겹겹이 쌓여있는 옷을 벗으려고 했는데 땀에 젖어서 그런 건지, 너무 껴입어서 그런 건지 제대로 벗겨지지를 않았다.

이름을 불린 아서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을 보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

소심한 동작으로 손짓하자, 아서가 눈치 빠르게 내 앞으로 제 귀를 가져다댔다.

"옷 좀, 벗겨줘."

"무ㅡ 콜록, 콜록콜록!!"

사레라도 들린 듯 거칠게 기침을 내뱉길래,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줬다.

갑자기 왜 이래.

끙끙거리며 겨우 망토를 벗어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내 손에 들린 망토를 집어들어서ㅡ

"...아서?"

ㅡ 그대로 다시 내 몸 위에 뒤집어 씌웠다.

...겨우 벗은 건데 대체 왜?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서를 올려다 보니,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에 띄었다.

'부끄러워 하고 있네.'

엄청나게 부끄러워 하고 있잖아, 이 남자.

왜 이러는 걸까 싶어서 잠시 생각에 빠지면, 문득 내가 아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으응... 옷을 벗겨달라고 했었지.

"아서, 설마ㅡ"

"아니 그게 아니라ㅡ"

"ㅡ 내가 여기에서, 관계를 맺자고 하는 줄 알았던 거야?"

아서의 존엄성을 지켜주고자 최대한 작게 말하기는 했지만, 터질듯이 달아오른 얼굴 만큼은 가릴 수가 없었다.

바보야, 진짜.

아니, 바보가 아니라 욕망에 솔직한 걸지도 모르지.

케이를 낳은 뒤에는 한 번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으니까.

"푸흐, 귀엽네."

"그런거 아니니까 제발, 아리엘..."

"그렇다고 칠 테니까, 나 옷 좀 벗겨줘. 열이 빠져나가지를 못해서 그런지 더워 죽을 것 같아..."

그제서야 한 겹 한 겹 옷을 벗겨주는 아서에 생긋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고 있었지만, 은근슬쩍 부풀어 오른 고간이 그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못 말린다니까.'

그게 미워보이지 않는 나도 못 말리는 건 마찬가지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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