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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80화 (180/342)

Chapter 180 - 에트엘.(1)

여러 헤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에트엘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에서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지만, 레아와 루나가 얼굴을 보여주니 프리패스였다.

역시 귀족이라는 건 대단하구나.

평범한 서민으로 살던 나랑은 확실히 느낌이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네.

"에트엘 영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녀님들."

뭔가 젠틀한 모습의 기사가 우리를 맞이했다.

이러니까 정말 중세시대에라도 온 것 같네.

뭐랄까, 창작물이 아닌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느낌의 복장이라고나 할까...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다들."

문을 통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저택으로 향한다.

후작이라고 했었나? 이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사람은.

우리들을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흘긋거리며 아서의 옆에 꼭 붙었다.

"쉽게 들여보내줘서 다행이네."

작은 중얼거림에 아서가 표정을 찡그렸다.

왜 그래? 뭔가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매를 잡아당기자, 아서가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이 정도로 쉽게 들여보내다니, 이상하지 않아?"

"..."

아무리 공녀들의 일행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쉽게 통과가 된다고?

아서가 가지고 있는 의문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뭐어... 공녀의 일행이니까 상관 없지 않아?

이유 있는 의심이었지만, 괜히 깊은 고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지켜줄 거잖아. 그렇지?"

"...그래."

레아와 루나는 저택의 주인을 만나러 간다고 따로 떨어졌고, 다른 이들은 사용인의 안내를 따라 각자 방으로 향했다.

북부의 저택보다 좋은 곳이네.

공녀들의 동행이라 그런지, 대우가 상당했다.

그렇다고 북부의 대우가 나빴다는 뜻은 아니었지만서도.

"그래서, 여기에 얼마나 머물 생각이야?"

"...하루 정도?"

오래 있어도 의미는 없으니까 말이지.

애초에 목적도 에트엘 영지로 오는게 아니라 왕도로 가서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이었으니까.

원래라면 당장 출발하려고 했지만, 다리가 너무 아픈 걸 어떻게 해.

"그나저나, 아서. 여기 사람들 뭔가 이상하지 않았어? 기운이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으응,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서 그런 거겠지?"

"...확실히."

저택으로 오며 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마치 생기가 빨려나간 것처럼 홀쭉하게 들어간 볼과, 허공을 응시하는 텅 빈 눈동자까지.

그건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마치 시체에 가까웠다.

시체가 죽지 못해 살아 움직이는ㅡ

"아."

"왜 그래? 아리엘."

"...아서, 이곳 영지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에트엘."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까.

스스로의 멍청함을 비웃으며 머리통을 탁탁 내리쳤다.

그걸 왜 까먹고 있었던 거야, 대체.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꽤 되어서 그런 걸까.

"아서,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에트엘 영지의 주인은ㅡ"

"손님분들. 자작님께서 찾으십니다."

"..."

"손님분들?"

타이밍 하고는.

속으로 혀를 차내며 일단 몸을 일으켰다.

당장에라도 도망치자는 말이 목 끝까지 차고 올랐지만, 내 옆에 있는 건 무려 용사였다.

그것도 마왕 토벌까지 해낸 최강 용사.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을 거야.'

분명 처음 봤을 때는 인자하게만 보였던 사용인이었는데, 지금은 뭔가 음산하게만 보였다.

악의 하수인 같은 모습이랄까.

길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서 도착한 식당에는 커다란 식탁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 위에 놓여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까지.

"...화려하네."

"바깥의 사람들은 굶주려 있는데 말이지?"

자그마한 목소리로 서로 소근거렸다.

탁자 위에 놓여진 음식들은 전쟁이 끝난 직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말 그대로 귀족들이 먹을 법한 식사라고나 할까.

사람들의 생명을 빨아 만든 음식답게, 아주 생기가 넘쳤다.

몇몇 사람들도 그것을 눈치채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대부분은 오랜만에 먹는 만찬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다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조금 들뜬 분위기가 이어지기를 잠시.

식당의 문이 열리고 인자한 분위기의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카락과 단정하게 정리된 수염까지.

딱 봐도 귀족처럼 보이는 이의 몸에는 특유의 중후함이 넘쳤지만, 내 눈에는 그저 같잖은 연기로만 보였다.

'사람들의 생명을 빨아먹는다고 했었나...'

마족에게 협력하는 인간들 중 하나로 나오는 엑스트라 캐릭터였는데, 보통은 마왕의 사천왕 중 하나에게 사망하는 역할이었다.

물론 루트에 따라 살고 죽고가 나뉘기는 했지만ㅡ 여기서는 생존한 루트인 듯 싶었다.

"귀하신 분과ㅡ 그리고 또 귀하신 분도 함께 해주셔서 더욱 기쁜 날이군요."

"..."

레아와 루나를 지칭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의 시선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지금까지.

분명 아서와 나ㅡ 용사와 마왕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일 터였다.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이렇게 만찬을 대접하고는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원래 얼굴을 드러내야 하지만, 공녀님들의 손님이시니 한 번 쯤은 넘어가도록 하지요. 다만, 다음에는 얼굴을 보고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느다랗게 뜨인 눈 사이에서 붉은 색이 번뜩였다.

기분 나쁜 눈빛.

인간이 아닌 잘 만들어진 음식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서를ㅡ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노리고 있는 눈.

"자, 다들 드세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모두 시장하셨을 텐데."

"환대에 감사를."

귀족식의 인사가 오가고, 하나 둘 식기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먹을 준비를 하고 있길래 나 또한 식기를 들기를 했는데, 정작 먹기에는 조금 꺼려지는 바가 있었다.

사람들의 생명을 거머리 마냥 빨아먹는 녀석이 준비한 음식이다.

그런데 그런 걸 먹어도 되는 걸까?

이상한 처리라도 되어 있으면?

"두 분은 안 드십니까? 취향이 아닌 음식이라면 주방장에게 말해 다른 것으로도 준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희 가문의 주방장은 일류이니까요."

"아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의심 받ㅡ 아니, 애초에 들킨 것 같지만서도.

아무튼, 레아와 루나가 이쪽에 흘긋흘긋 시선을 주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식기를 들어올렸다.

확실히 맛은 있어 보이는데.

눈 앞에 놓여있는 스테이크를 조심스럽게 썰어, 입 안에 집어넣었다.

"...!!!"

"...아리엘?"

뭐야 이거.

속에서 치솟는 무언가에 숨이 턱 막혔다.

옆에서 당황한 듯한 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단은 눈앞의 음식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맛있구나."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왔던건 대체 뭐였을까.

아니, 이런 음식이 가능하단 말이야?

무언가 수라도 쓴게 아닐까.

약을 탔다던지, 그런 것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너도 들어라."

귓가에 속삭이는 아서에 그 옆구리를 팔꿈치로 톡톡 두드렸다.

괜찮아, 진짜 괜찮데도?

만약 독이 들어있었다면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이미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아서는 여전히 의심하는 듯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지만서도.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에는 편히 쉬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귀빈분들."

원래라면 내일 당장 떠날 생각이었지만, 상대의 정체가 정체인 만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겠지.

레아와 루나를 설득한다는 선택지는 이미 배제한지 오래였다.

저거 봐.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상대를 잔뜩 신뢰하게 된 눈빛을.

냅킨으로 입을 닦아내는 척 입 안에 들어있던 고기 조각을 뱉어냈다.

수상한 걸 넙죽넙죽 받아먹을 정도는 아니라서.

...맛은 있었지만.

"베르드 경은, 어느 쪽이신가요?"

한창 만찬이 이어지고 있던 도중, 루나가 물었다.

어느 쪽이냐.

간단한 질문임과 동시에 여러가지 뜻을 담고 있는 질문이었다.

용사가 왕국을 배신했다는 쪽을 믿느냐, 아니면 국왕이 타락했다는 쪽을 믿느냐.

"이런 말을 입에 올리기에는 심히 조심스럽지만, 저는 국왕 폐하께서 타락하셨다는 쪽이 더 맞는 것 같군요."

"...그렇나요?"

"물론입니다. 절대 당사자가 이 자리에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하하."

능구렁이 같은 자식.

한 순간에 다른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리들에게 모여들었다.

루나와 레나, 그리고 그 일행들은 그렇다고 쳐도 베르드의 하수인들의 시선이 모이는 건 조금이지만 소름 돋을 정도였다.

손님이 아닌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감각.

이런 나조차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는데, 아서라면 또 어떨까.

"그러니, 이곳에서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루스테리나 아가씨, 레스테이아 아가씨."

"감사합니다, 베르드 경."

안도한 듯 한숨을 토해내는 루나에게 베르드가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역겹구나, 진심으로.

그렇지 않아도 없던 입맛이 더더욱 사라졌다.

뭐, 애초에 먹고 있지는 않았지만서도.

"감사 인사는 괜찮습니다. 저 스스로가 판단한 사항이니까요."

진심으로 황송하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사람들을 속여먹고 생명력을 빨아먹으려면 저 정도의 철면피는 깔아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바지 마왕이 아니라 진짜 마왕이었다면 보고 배울 정도로 교과서적인 기만이었다.

'...역시 기분 나빠.'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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