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1 - 에트엘.(2)
"그러니까, 베르드 자작이 흑마법사라는 말이야?"
"그래."
단호한 대답에, 아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람들에게 생기가 없던 이유,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호화스러운 음식들까지.
분명 지금까지 봐왔던 것들을 머릿속에 그려내고 있는거겠지.
"자작 옆에 있던 자들은 어떤 것 같아?"
"아마도, 같을 거라고 생각 된다만."
나를 바라보던 그 시선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소름이 돋는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섭다고 해야 할지.
분위기만 보자면 먼저 덮쳐올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덮쳐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서 계속 머물러야 하나?
아니면, 속전속결로 끝내야 할까.
"하지만, 자작을 처리한다고 해도 다른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일지 모르겠구나."
마왕을 토벌하기 움직이던 때의 용사와 지금의 용사의 입장은 꽤나 차이가 있었다.
용사라는 이름 아래에 모든 것이 용납되던 시기는 이미 지난지 오래.
용사가 왕국을 배신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왕국의 자작이 용사에게 살해당한다?
절대, 여론에 좋지는 않겠지.
"심지어, 자작은 우리들의 편을 들어주는 말까지 했지. 그런 자작을 아무런 증거 없이 살해한다면, 분명 반발이 거셀 거다."
자작이 살아있어도 문제인데 죽어도 문제라니.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슥 죽일 수 있는게 아니었다.
잘못 죽였다고 다시 되돌릴 수도 없었고, 싫증이 났다고 그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결국은 상대가 먼저 움직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구나."
만약 내가 조금만 더 기억을 빨리 떠올렸다면.
그랬다면, 다른 이들이 이곳으로 향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미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네가 왜 미안해 해. 네 잘못이 아닌데."
"그렇지만ㅡ"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아서에, 조금이지만 위로가 됐다.
그래, 아서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는 너도,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이건 우리 둘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이건 바로니스 국왕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잘못이니까."
"...그래."
결국은 우리 둘 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잘못이라며 자책하고 있을 때, 상대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게 서로 뿐이라니.
용사와 마왕이, 세상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서로의 탓이 아니라며 상처를 보듬어 준다고?
"아서, 만약 우리가 평범하게 만났다면 어땠을까."
"..."
"마왕과 용사가 아니고, 이런 빌어먹을 세계가 아니라 평범한 세상에서 만났다면ㅡ"
그랬다면, 뭔가 달랐을까?
서로 상처를 받지 않은 상태로 사랑에 빠졌을까, 아니면 그저 좋은 친구로 남았을까.
만약이라는 단어가 주는 가정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찔끔거리며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눌러담으며 아서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그랬어도, 나는 너를 사랑했을 거야."
"푸흐, 말만이라도 고맙네."
해피 엔딩을 보고 싶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먼 길을 돌아왔고 또 힘들었기에, 마지막 만큼은 반드시 이 두 손으로 행복을 부여잡고 싶었다.
나와, 아서와, 다른 모두들과 함께.
***
밤은, 특히 만월이 뜬 밤은 어둠의 마력이 충만해지는 시간이었다.
흑마법사들이 고개를 들고, 마수들이 울부짖으며, 짐승들이 미쳐 날뛰는 광기의 순간.
괜한 불안감 때문에 잠을 못 이루다가, 기어이 몸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거기, 누구 있느냐?"
보통 이런 상황에서 이런 대사를 내뱉으면 하나 정도는 모습을 드러내던데.
사방에 깔린 짙은 적막에 반사적으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숨 막혀.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이렇게나 감이 좋으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
아니, 진짜 있었단 말이야?
달빛이 비치지 않은 어둠, 그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괴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림자와 반쯤 동화된 듯한 기괴함이 소리 없는 위압감을 주변에 흩뿌리고 있었다.
"아서, 아서? 어서 일어나 보거라, 아서!"
"...소용 없을 겁니다. 음식에 타놓은 약을 먹었으니, 잠시 정도는 깨어나지 않겠지요."
먹었어?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먹지 말라고 말을 할 걸.
유일하게 믿고 있던 존재가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위기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그걸 정해두지 않았군요. 해야 할 일들도, 하고 싶은 일들도 너무 많은 터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손에 잡힌 것이라고는 겨우 이불이 전부.
이걸로 상대에게 대항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겠지.
"그나저나, 용사와 함께 계실 때는 참 놀랐습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하는지는, 내가 정한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 만큼은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겠지만 말이죠."
한 걸음.
...한 걸음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그 정도의 거리만큼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나를 데려간다고 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텐데."
"전혀 아닙니다."
"..."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겠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이 비루한 몸뚱이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다들 이렇게나 달려드는 걸까.
바로니스 국왕도, 눈앞의 이 녀석도.
'어쩌면, 내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ㅡ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을 원하는 걸지도 모르지.'
아서가 전투불능일 때 기습을 당한다면 상당히 위험했겠지만, 상대는 딱히 아서를 공격할 의사가 없는 듯 싶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오히려 이쪽에 있어서는 최고의 기회였다.
약 기운이 떨어져고 있는지 조금씩 몸이 움직이고 있기도 했고.
아무래도, 별로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가시죠. 순순히 따라오지 않으시면 용사를 죽이겠습니다."
"...그래."
몸을 일으키자, 진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목 끝까지 차오른 비릿한 혈향에 비명이 터져나올 뻔 한 것을 어떻게든 참아냈다.
표정에서 티가 나지는 않았겠지.
마음을 다잡는 척 숨을 토해내며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까지는, 절대 나를 죽이지 않겠지.'
여기서는 오히려 마음을 단단히 먹는 편이 좋았다.
고통과 절망이라는 건 지겨울 정도로 느껴봤기에, 충분히 참아낼 수 있을 터였다.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잘도 비꼬는구나."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내 몸을 집어삼키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이상하게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아서.'
나를 구하러 와줘.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아리엘, 아리엘!"
거칠게 몸을 일으켜, 곧바로 성검을 뽑아들었다.
방심했다.
가장 방심해서는 안 되는 시간에 방심해버리고 말았다.
용사의 몸뚱이를 너무 믿은 것이 패착이었다.
"..."
당장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깨부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화를 참아낼 수 있었다.
이성을 잃지마.
만약 아리엘과 자신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진즉 죽이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런데 살려뒀다는 건 분명 살려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겠지.
달그락.
"...이건."
달빛을 받아 보라색으로 빛나는 조각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뻗는다.
아리엘의 뿔.
그녀의 건강을 위해 돌려줬던 것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마신님의 강림에 필요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의문을 가지고 있던 찰나, 갑작스럽게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자들은 그저 마족의 뿔이면 전부 가능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해석이 잘못되었습니다.'
'마신님의 강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족의 뿔이 아니라 마왕의 뿔입니다.'
마신의 강림.
그리고 마왕의 뿔.
행복에 파묻혀 있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고, 톱니가 맞물려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바로니스 국왕이 마왕 처단의 증거로 어째서 뿔을 요구했는지.
그가 어째서 마족들을 소환했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아리엘을 찾고 있는지까지.
"...마신의 강림을 노리고 있는 건가."
지금까지 최후의 적을 마왕이라고 생각했건만 최후의 적은 따로 존재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알고 있었음에도 눈앞의 행복에 젖어 억지로 눈을 가린 것일 터였다.
'아리엘을, 찾아야 해.'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행복이자 최후의 희망.
그것을 잃게 된다면, 자신은 분명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리라.
심지어 뿔을 지니고 있지 않은 상태의 아리엘은 가히 죽지 못해 살아있다고 봐도 될 정도였기에, 서둘러 찾아내야만 했다.
얼마나 버티고, 얼마나 빨리 찾아낼 수 있는지의 싸움.
지금은 그저 그녀가 어떻게든 견뎌줄 것이라 믿고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견뎌줘..."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자수정 색의 뿔에 달빛이 통과해, 성검의 칼날을 서늘하게 물들였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베르드 자작...'
굳이 돌아가는 수고를 들일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단숨에, 머리를 노린다.
마족을 처단하며 만들어진 가장 간단하고도 확실한 사냥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