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5 - 용사라는 것은.(2)
단 하나의 검
그리고 단 한 번의 휘두름.
겨우 그것 때문에, 여기서 무너져야 한다고?
이토록 허무하게?
"아니, 절대. 절대,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ㅡ"
두동강이 난 몸뚱이가 하나로 합쳐지고, 괴물의 형상을 잃었던 것이 다시금 괴물의 형상을 되찾는다.
겨우 하나의 적이, 수백 수천을 먹어치운 나를 쓰러뜨린다고?
이토록 쉽게?
그럴 수 없다.
절대로!
"나는, 인간을 초월했단 말이다!!"
손에 쥐여진 보라색빛의 보석이 밝게 빛을 냈다.
마석.
마족들의 힘을 증폭시켜주는 보석ㅡ
이것의 힘을 빌린다면 분명 용사도, 바로니스도, 마신도ㅡ
"그 보석, 본 적이 있군."
"?!"
하지만 그의 상대는 용사였다.
수천, 수만의 마족을 베어온 장본인.
그런 그가 마석을 사용하는 마족 하나 만나보지 못했을까?
아니, 오히려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만나왔겠지.
"하지만 상대가 나빴어."
그의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성검이었다.
마족들에게 극악의 상성을 자랑하는, 오로지 마족을 잘라내기 위해서 벼려진 신의 칼날.
오로지 마족들을 향한 살의로 빚어진 휘백색의 줄기가 그대로 베르드 자작의 몸뚱이를 갈라냈다.
마석을 품었다고는 생각되지 못할 정도로 허무한 최후였다.
"..."
정적이 내려앉은 복도.
가장 큰 적이 사라졌음에도 용사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의 목적은 더 이상 적을 죽여내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이를 구해내는 것이었기에.
용사가 숨을 토해내자, 칼날에 들러붙은 피와 살점이 보라색으로 빛나며 점점 사그라들었다.
'성검에 마왕의 피를 묻혀야 여신님께서 강림할 수 있답니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이겼다.
대체 마족과 여신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걸까.
무슨 연관이 있길래 그토록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해서 안달이지?
기분 나쁜 서늘함이 목줄기를 타고 흘렀다.
왕도로 향해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일단은, 아리엘을 찾아야 해."
시체들의 틈바구니를 헤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때 아닌 소란에도 저택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생자가 아닌 망자로 이루어진 장소를 통과해, 피 냄새가 짙게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오셨네요, 용사님."
"...엘리."
"아리엘 씨가 기다리고 계실거에요. 빨리 가지죠."
루나와 레아라고 했던가.
그 둘이 잠들어 있는 방 앞에 선 엘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벗겨진 베일 위로 솟아오른 뿔이 인상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리엘이 어디에 있는지 알겠어?"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방향 정도는 알 것 같아요. 피 냄새가 나고 있거든요. 마왕님의ㅡ 아니, 아리엘 씨의."
엘리의 손가락이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층이 아닌 지하.
붉은색의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본 엘리가 제 발치에 떨어져 있는 고깃덩이를 툭툭 차냈다.
누군가의 어깨죽지에 붙어있었을 팔뚝을 저 멀리 날려보낸 그녀가 짙은 한숨을 토해내며 걸음을 옮겼다.
"엘리."
"네, 용사님."
"...너는, 멀쩡한거 맞지?"
순간 느껴지는 위화감에 검자루를 부여잡았다.
마족을 마주할 때마다 울어대는 성검이, 눈앞의 존재가 마족이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저는 언제나 저였답니다, 용사님. 인간일 때도, 마족일 때도, 하나가 되었을 때도."
"...하나가 되었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빙긋 웃어보인 엘리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래, 엘리는 엘리야.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랐던 본능을 억누르며 지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늦었어, 멍청아."
"...아서."
"아리엘!"
바닥에 주저앉은 아리엘과 함께,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삐뚜름한 미소와 함께 바닥을 탁탁 내리치는 발끝까지.
설마 또 그녀에게 손을 댔나 싶어서 표정을 징그리면, 왜 그렇게 보냐는 듯한 신경질적인 시선이 마구 쏘아져 왔다.
"안 믿을지도 모르지만, 도와준거거든? 혼자 오해해서 또 지랄하지 말지?"
"네가 여기에 있는 것 부터가 문제야, 에밀리."
"네가 늦은 건 문제가 아니고? 아니, 어떻게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 이런 상황을 만들 수가 있지? 그러니까 네가 그런 거야, 아서. 이딴게 무슨 용사라고는ㅡ"
"그만!"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잘게 떨고 있는 아리엘이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래, 지금은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야.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굴을 뒤덮는 머리카락이 예쁜 얼굴을 잔뜩 가려대고 있었다.
"...괜찮아?"
"...그래."
조심스럼게 손을 뻗어내자, 상대 또한 느릿느릿 손을 뻗어왔다.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예뻤던 손이, 지금은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잔뜩 엉망이 되어있었다.
"손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그것보다는, 라일라를."
아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톱이 전부 뽑혀져 나갔다는 것보다는 다른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라일라.
설마 스승님까지 따라오셨을 줄이야.
희미하게 보이는 무채색의 벽에 누군가가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점점 작아져가는 숨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
"스승님!"
무언가가 잘못됐어.
그것을 느끼는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침 소리 사이에 섞여 나오는 불쾌할 정도의 끈적함에 서둘러 손을 뻗었다.
"...아서."
"스승님, 대체 이게 무슨ㅡ"
"이걸로, 빚은 갚은 겁니다. 그녀를 찌른ㅡ"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서든, 라일라든,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든.
바닥에 흩어져 있는 흑색의 그림자가 불온하게 꿈틀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움직임을 멈췄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어둠의 공간 속에서, 작은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아리엘이었다.
"흐, 흐아아아아아..."
"..."
"왜, 왜 따라온, 거야. 왜 도망치지 않은, 거야. 왜? 대체 왜? 왜!!"
피투성이의 손이 얼굴을 뒤덮자, 새하얀 도화지 같던 피부 위에 새빨간 잉크가 덧칠해졌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이고 계속 오열하던 그녀를 보며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내가 오자고, 흐, 해서 온 곳인데. 전부, 내 욕심 때문에, 내가 멍청해서 일어난 일인데, 왜..."
"..."
"왜 라일라가, 죽어야 했던 건데? 으, 흐흣, 으... 케흑, 케흑..."
"아리엘?!"
토혈이 쏟아졌다.
붉은색이 아닌 흑색이ㅡ 빌어먹을 정도로 불길한 색채를 하고 있는 그림자와 같은 색상의 흑생이 바닥을 짙게 물들였다.
죽음을 가장 닮은 듯한 불길함에 아서가 서둘러 제 품 안에 있던 뿔을 꺼내들었다.
"흐으, 하아..."
"이제 조금 괜찮아?"
자세히 집중하고 봐야 할 정도로 자그맣게 끄덕여지는 고개에 아서는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를ㅡ 아리엘을 잃는다는 건 그의 전부를 잃는다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 품에 안에 잠이 든 그녀에게서 새근새근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지친 모양이었다.
"그래서,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도 딱히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거든? 저 녀석 때문에 온 거라고."
에밀리의 자그마한 손가락이 저 옆의 그림자 속을 가리켰다.
어둠과 반쯤 동화되어 숨을 죽이고 있는 그림자에 아서가 표정을 찌푸리자, 그 속에서 사람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지켜보고 결정하라며? 그래서 따라온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지켜보려고."
"지켜보고 있었다면 대체 왜 돕지 않고ㅡ"
"내가 왜?"
"...뭐?"
"내가 무슨 이유로 마왕을 도와야 한다는 건데?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네가 말해봐 아서."
증오 서린 시선이 제 품에 안긴 이에게 닿을 세라, 아서가 제 망토로 아리엘을 가려냈다.
정작 상대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같잖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서도.
그 이유라고 한다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해서겠지.
케이에게 마왕이란 그저 죽여내야할 대상일 뿐이었으니까.
그녀에게 있어서 마왕을 돕는다는 말은 돼지와 사랑에 빠진다는 말 정도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착각하지마, 아서. 네가 마왕을 사랑한다고 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리가 없잖아. 하, 애초에 그딴 짓을 한 녀석들의 가장 위에 있는 녀석을 사랑한다고? 그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건 네가 그녀를 겪어보지 않아서 그래.
그녀와 유대를 쌓지 않고, 그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녀를 그저 사람들을 죽여댄 살인자이자 악마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죽어있던 존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 법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마족과 마왕을 향해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때 죽은 이라면, 그 속에 담긴 증오심이 쉽게 사라질 리가.
"결론은 났어, 아서."
내가 죽던지, 네 품에 안긴 마왕이 죽던지.
언제 꺼내든지 모를 칼날이, 케이의 손에 들려있었다.
당장에라도 마왕을ㅡ 혹은 용사를 찔러낼 기세로 새파랗게 벼려져 있는 살의가 날것 그래도 그들을 향했다.
인정도, 이해도 담겨있지 않은 무감정의 칼날.
단지 죽인다는 행위만이 담긴 비수에 용사 또한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심각한 와중에 미안한데 말이야. 이거, 움직이는 것 같은데?"
"...빌어, 먹을... 필멸자들 주제에..."
"봐."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바닥에 흩어져 있던 그림자가 하나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체, 그 다음에는 까마귀.
마지막으로 인간.
온갖 더러움을 한대 뭉쳐 빚어낸 듯한 형상이 괴물이 죽지 않은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