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7 -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1)
증오의 방향만 정해진다면, 인간이라는 것은 거리낌이 없어지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상실과 절망이 하나의 분노가 되고, 그 분노가 엮이고 또 엮여서 진한 증오로 화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증오가 누구에게 향하는지 정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여신..."
그 증오스러운 이름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만 했다.
내가 품고 있던 소망, 희망, 행복 그 전부를 앗아가기 위해 그런 짓들을 해대는 년.
처절한 울음 소리 뒤에 남겨진 것은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비명이었다.
죽어.
죽어버려.
아니, 죽여버릴 거야.
"오오, 역시 내가 옳았어! 마왕은 다른 마족들과 다르다는 가설이, 맞았다고!"
그림자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처음보다 훨씬 작아진 모양새로, 거의 죽어가듯 기어다니던 몸뚱이가 마치 신을 찬양하듯이 하늘 위로 팔을 뻗어대고 있었다.
사방에 흩뿌려진 깨진 유리조각과, 그 안에 담겨 있던 마기가 그대로 내 몸뚱이에ㅡ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품의 뿔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진한 스트레스와 분노, 그리고 살의.
갑작스럽게 채워진 힘에 목구멍을 통해 피가 터져나왔지마, 오히려 몸은 상쾌한 채였다.
"...말해라."
"..."
"어떻게 해야 여신을 끌어내릴 수 있지? 어떻게 해야 그 가증스러운 존재를 죽여낼 수 있지? 어떻게 해야ㅡ"
그 역겨운 년을, 내 앞에서 무릎 꿇릴 수 있을까.
하하, 하고 웃음을 토해냈다.
다른 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 같은 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신의 술수로 인해 죽어간 나의 아이들과 산산조각난 내 행복 뿐이었으니까.
"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건, 같은 신이지 않겠습니까?"
아, 그래. 그렇겠지.
같은 신이라면 분명 여신도 꽤나 애를 먹을 것이 틀림 없었다.
심지어 그것이 본인이 그토록 증오하던 마족들의 신이라면 더더욱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 터였다.
마신이 어떤 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신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상관 없었으니까.
"아아, 진작부터 그랬어야 했는데. 내 앞길을 막아서는 건 그 녀석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아, 아하하하하하!!! 하, 흐, 흐하으..."
망가졌나.
아니, 이제 곧 망가지려나.
미친 듯이 웃으며, 반쯤 무너진 몸을 이끌고 라일라의 앞으로 기어갔다.
"아가. 아가... 나를 찌른 건 용서한지 오래니까, 부디 죄책감 따윈느 가지지 말아다오. 제발..."
차갑게 식은 손을 부여잡고는 한참이고 울었다.
이런 빌어먹을 운명 따위, 바라지도 않았어.
내가 그토록 미웠다면 나 하나로 끝내도 될 문제였다.
어쩌면 언젠가 보았던 스크립트의 내용들처럼 씨받이로 사용해도 될 일이었고.
하지만 여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를 조롱하고, 경멸하고, 괴롭히고, 가지고 놀면서ㅡ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을 벌려대고 있었지.
"아리엘."
"...흐, 미안, 하구나. 너에게서 증오를 빼았아서, 정말, 미안해..."
용사는, 아서는 나의 억지로 인해서 증오를 거세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얼마나 죽이고 싶었을까.
얼마나 복수하고 싶었을까.
나 따위도 이렇게나 원망스러워 미칠 지경인데, 아서는 대체 얼마나 끔찍한 시간을 보내왔던 걸까.
스스로가 우스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목적은 정한 거야?"
"..."
"여신을 죽이러 가던, 바로니스 국왕을 죽이러 가던, 아니면 마족 아이를 구하던 하나만 하지 그래? 네 그 몸 상태로 셋 다 하려고 하다가는 분명 죽어버리고 말 테니까."
그래, 분명 그러겠지.
하지만 하나만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렇지?
바로니스 국왕을 죽이고, 교단으로 찾아가 마족 아이를 구한 다음 마신을 소환해 여신을 죽인다.
어째 살벌한 내용들로만 가득 찬 듯한 느낌이었지만ㅡ
마왕이니까, 푸흐.
"시간이 없어, 아서."
그림자의 목을 쳐낸 아서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서두를 때였다.
***
케이에게 있어서 마족이란 인간들을 죽여대는 짐승들에 불과했다.
아니, 겉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짐승보다는 살인자로 보고 있다는게 더 옳겠지.
"...뭐라도 먹어, 멍청아."
"...미안, 지금은 입맛이 별로 없구나."
음식을 내미는 에밀리와 그것을 거절하는 마왕의 모습.
이질감이 들어도 적당히 들어야 할 텐데, 눈앞에서 저런 꼴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마족을 증오하기로는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천재 마법사께서 저런 행동을 한다고?
말투나 표정 같은 건 신경질이 잔뜩 담겨 있었지만, 그 행동 만큼은 진심으로 친절하기 그지 없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아리엘을 지켜보려고 여기까지 따라왔다고 했지?"
"그래."
"그래서, 어떤 것 같아?"
제 옆에 선 이에게 시선 한 조각 주지 않은채 코웃음을 친 케이가 손에 들린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어떤 것 같냐라...
세상 우울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서는 고개를 떨군 모습.
죽은 라일라를 보며 서럽게 오열하던 모습.
그리고 손톱과 발톱이 전부 뽑혀져 나가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까지.
"딱 너랑 어울리는 여자네."
서로 상처란 상처는 전부 입은 것이 딱 닮은 꼴이었다.
만약 서로의 관계가 용사와 마왕이 아니었더라면 더욱 빨리 인연이 맺어질 수도 있었겠지.
아니면 평생 동안 만나지 못했다거나.
"그 기분 나쁜 녀석의 연구실에서 몇 개 주워온게 있는데 말이야."
"..."
"뿔이 잘린 마족들은 전부 죽었다고 하는데, 저 녀석은 잘도 살아있네.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너무 정은 주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어?"
몸뚱이가 너무 작은 나머지 품에는 넣을 수 없어서 등 뒤의 보따리에 담아왔더랬다.
무게가 조금 나가기는 했지만, 반 정도는 저쪽의 천재 마법사께서 가지고 있었기에 불평 같은 건 없었다.
"어째서 살육과 분노만이 길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우리는. 어쩌면 그 미친놈이 옳았을지도 모르겠어. 물론 아직까지도 마족 같은 건 전부 죽어버렸으면 좋겠지만."
미친 놈이 연구하는 것이 마족과 마왕을 처단하기 위해 피를 흘린 것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일이었다니, 웃기지도 않아서.
심지어 그 정신병자의 연구를 통해 죽어간 이들이 전쟁을 통해 죽어간 이들보다 훨씬 더 적었다는게 아이러니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진정으로 미친 건 그가 아니라 우리들 아니었을까.
그저 단순한 선동에 휘말려, 피해자와 피해자들끼리 목숨을 걸고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발악한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아리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들을 받았으니까, 더는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데."
어째서 저런 길을 걷는 걸까, 그녀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이름 뿐인 직함과, 뿔이 잘려 인간보다도 약해진 몸뚱이 뿐.
그마저도 잘려나간 뿔이 없다면 곧바로 죽을 정도로 약해빠질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불안해 미칠 지경인데, 그녀의 말을 거절하고 무시할 수 없다는게 문제였다.
"옛날의 너랑 똑 닮았네. 아무것도 할 줄 몰랐으면서 저보다 한참 강한 마족에게 달려들고, 잠도 자지 않고 하루 종일 바깥을 돌아다니고. 참, 남편이나 아내나 무모한데다 무리를 밥 먹듯이 하는 건 똑같네."
"...칭찬이야?"
"비꼬는 거야, 멍청아."
케이가 아서의 정강이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발길질을 해댔다.
물론 걷어찬 쪽이 더 아프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기분 나쁨 정도는 전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래서, 이길 수 있겠어?"
"누구를. 바로니스 국왕? 아니면, 여신?"
"둘 다."
진정한 평화를 손에 넣으려면 그 둘과 어떻게든 끝을 봐야할 터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바로니스의 힘을 떠올린 아서가 흠, 하고 침음을 삼켰다.
만약 마왕이라는 직함에 걸맞는 힘이라는게 존재했다면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만나봤던 마족들 중 최강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강대한 힘이었다.
'크, 결국 죽이지는 못했구나, 용사.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텐데 말이다!'
칼날이 조금만 더 파고들었다면 분명 그 목숨을 끊어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때 입혔던 상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전부 회복하기 전에 다시 전투를 벌인다면 저번과 같이 애를 먹지는 않겠지.
'문제라고 한다면, 여신인가...'
어떠한 정보도 알아낼 수 없는 미지의 적.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를 죽일 수 있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해야지. 아무리 불가능할 것 같아도, 해내야지."
"용사니까?"
"...그래, 용사니까."
진지한 대답에 옆에서 자그마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란 아서가 고개를 돌리자, 언젠가 보았던 천진한 얼굴로 웃음을 토해내고 있는 케이의 얼굴이 보였다.
"정말이지, 너는 하나도 안 변했구나. 어떻게 내가 죽기 전이랑, 죽고 난 뒤랑 똑같을 수가 있어?"
"케이."
"그런 우직한 점을 좋아했었는데. 아아, 아쉬워라. 그냥 그때 내가 아니라 저쪽의 천재 마법사님을 미끼로 두고 도망칠걸 그랬어. 그랬으면 몸을 써서라도 강제로 내껄로 만드는 건데."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케이가 저쪽에 앉아있는 아리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리엘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상태로 무언가를 안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저 녀석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것도 신기하고, 뭐어. 그보다, 저런 몸이 취향이었던 거야?"
"..."
"뭐야, 그러면 나한테도 기회는 있었네. 아아, 진짜..."
입술을 비죽이며 말하는 케이에 아서가 한숨을 내뱉었다.
여기서 무어라 더 말을 했다가는 제 머리만 아파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