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1 -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5)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에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이 비극일 것이 분명했다.
비극으로 시작해서 비극을 거쳐, 비극으로 끝나는 인생.
잠시의 행복 뒤에 찾아오는 예정된 파멸이, 이토록 무거울 줄이야.
"아리엘."
"...아서."
비쩍 마른 손을 꼭 붙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신에게라도 기도하고 싶었지만, 그 빌어먹을 여신에게는 자그마한 믿음조차도 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은 건 달뜬 숨소리와 뜨거워진 체온 뿐.
"괜찮아. 이제 곧 있으면 전부 끝날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조금만 버텨줘."
"응..."
손에 닿는 온기가 이토록 뜨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리엘을 바라보던 아서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어째서.
왜 그녀가 이런 꼴이 되어야만 하는 건데.
대체 왜.
'전부 당신 때문이잖아요, 용사님.'
"헉?!"
빌어먹을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왕을 죽이면 모두를 살려주겠다는 달콤한 거짓말을 내뱉은 악마의 음성이ㅡ
"젠장, 제기랄, 빌어먹을..."
유일한 방법으로 남은 것이 마신을 부활시키는 것 뿐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걸까.
이럴 줄 알았다면 그녀의 부탁을 무시하는 편이 나았다.
차라리 세계수가 옆에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그래, 그녀의 생명을 위해서 그녀를 가둬두는 선택이 더 옳았을지도 몰랐다.
"너무, 자책하지마. 네 잘못이 아니니까..."
"네 뿔을 자른 건 나야!!!"
"..."
"내가, 네 뿔을 잘랐다고... 멍청하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올리고는 그대로 고개를 파묻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 짓 따위 하지 않을 텐데.
위장을 위해서 뿔을 잘라야 했다고?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아서, 나 봐."
"..."
"아서, 빨리. 나 봐. 이제부터 평생 나 안 볼거야?"
곧 꺼져버릴 것 같이 희미한 목소리였다.
자신이 그저 고개를 들기만 해도 사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
눈을 마주치면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이 전부 환상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지. 이 멋진 얼굴을 왜 가려두는 건데, 아깝게."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왜, 싫어?"
짙은 어둠으로 물든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마치 맑은 하늘의 초승달 같은 눈동자에, 아서는 허탈함이 담긴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작 죽어가고 있는 당사자는 이토록 행복해 하고 있는데 곁에 있는 내가 우울해져 있을 필요가 있을까.
행복을 채워넣어도 모자란 심장에 슬픔을 채워넣는 일 따위, 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촉ㅡ
"어때, 이러면 기분이 조금 나아져?"
"..."
가볍게 입을 맞춘 아리엘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어보였다.
더 이상 제 소꿉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ㅡ 아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
내 반쪽. 내 사랑. 내 전부.
천천히 손을 뻗은 아서가, 상대의 왼손 약지를 감싼 반지에 입술을 맞췄다.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입맞춤은 손등, 팔, 어깨, 목, 그리고 다시 입술까지 타고 올라갔다.
"간지러워, 흣?!"
"너를 잃을까봐 무서워, 아리엘."
너는 알고 있을까, 지금 내가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는지.
가족을 잃었을 때도, 친구를 잃었을 때도, 하물며 소꿉친구를 잃었을 때도 이런 감정은 들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왜 너를 떠나보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이토록 심장이 아파오는 걸까.
그건 분명, 그 무엇보다 너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를 잃지 않으면 되잖아, 아서."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내가 말했잖아. 내가 믿는, 너를 믿으라고."
그래, 그랬지.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아리엘, 난ㅡ"
"쉬이ㅡ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으니까, 지금은 조금 쉬자. 곧 있으면 마지막이니까, 힘을 비축해야지."
차가운 온기가 아서의 머리를 감쌌다.
분명 이런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에 무리가 가고 있을 텐데, 아리엘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행동했다.
마왕이라는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그 사실이 아파서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하나도 후회하지 않아."
"..."
"너를 용서한 것도, 너를 사랑한 것도, 아이들을 낳은 것도, 아이들을 사랑한 것도 전부ㅡ"
전부 후회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은 그런 표정 하지 말아줘.
"네가 울면 나도 울 것 같아지니까, 그냥 웃어줘. 자,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잖아?"
잘게 떨리는 손이 아서의 양 입꼬리를 비죽 집어올렸다.
양 뺨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그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한 들꽃 같이 아름다운 사람.
나에게 행복을 돌려준 은혜로운 사람.
그리고, 곧 있으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물거품 같은 사람.
"물거품이 되기 전에, 다리를 만드는 수밖에ㅡ"
"응?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감상에 젖은 채로 아리엘의 손등에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간지럽다며 꺄르르 웃는 모습에서 행복을 발견했다면 그건 나의 오만일까.
부디 내 행동 하나하나가 너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억누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
왕도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일행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그건 도처에 왕국의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시체와 우울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마왕ㅡ 아리엘의 상태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것 때문일 터였다.
"...아리엘 씨."
그중에서 그녀를 가장 걱정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에밀리도, 케이도, 아서도 아닌 엘리일 터였다.
성녀였던 인간.
신과 가장 가까웠던 타락자.
우울한 낯빛으로 베일을 벗어낸 엘리가 곤히 잠든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머리카락이 많이 푸석푸석해졌네요. 분명 비단처럼 부드러웠었는데..."
아직 제 몸에 신성력이 맴돌고 있었다면 달랐을까.
아니면 조금만 더 의술을 열심히 배웠더라면?
마신전에 있을 때 마족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았더라면, 뿔이 잘린 마족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지금 와서 후회한들 전부 소용 없는 일들이었지만서도.
"걱정을 하더라도 자기 몸은 관리 하면서 하지?"
"케이."
"우리 귀여운 엄마가 걱정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환자가 둘로 늘어나서야 아무런 좋은 점이 없잖아? 그러니까 남 걱정하기 전에 자기 몸 걱정이나 먼저 해, 엘리."
괜찮다고 말하기 직전,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었던게 며칠 전이었더라.
식량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핑계로 물조차 입에 대지 않고 있었더랬지.
마족의 몸뚱이를 가지게 되었지만, 어느 정도는 인간에 가까웠기에 뭐든 먹어주는 편이 좋을 터였다.
"...네."
"사실 에밀리 쪽이 배를 곪고 있어서 그런지 엄청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그래. 아니, 원래도 신경질적이었지만 그 정도가 배가 된 것 같달까ㅡ 아무튼."
겨우 사용할 수 있게 된 마나로 매일마다 방벽을 치고, 존재감을 흐리게 하는 마법을 사용하고, 사역마를 보내 주변을 정찰하고ㅡ
만약 에밀리가 없었더라면 분명 왕도에 오기 전에 몇 번이고 큰 장애물들을 맞이했겠지.
아리엘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존재가 이토록 헌신적으로 그녀를 돕고 있다니, 역시 인생이란 것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지금은 일단 먹고 생각ㅡ"
"여기서 또 농땡이나 부리고 있던 거야? 그럴 시간에 주변 정찰이나 하라니까?! 안 그래도 빌어먹을 마족인지 인간인지 모를 새끼들이 계속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데ㅡ"
"쉬이, 쉬잇! 엄마 자고 있잖아, 우리 말괄량이 마법사 딸내미님."
능글맞은 것도 정도가 있지, 저 정도면 그냥 시비를 거는거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 분명 시비를 걸고 있는거겠지.
그렇다고 딱히 처음 보거나 하는 장면은 아니었기에, 엘리는 그런 둘의 신경전에도 마음껏 태연하게 있을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살아있을 시절에는 마법이 날아다니고 그랬으니까.
"아리엘 씨가 깨면 두 사람 다 크게 혼날거예요."
"내가? 그 녀석한테? 아서라, 그 녀석은 제 애라면 절대 안 혼내고 가만히 있을ㅡ"
"아리엘 씨가 아니라, 제가 혼낼 거니까요."
서늘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에밀리와 케이가 한 번씩 죽고 되살아나기를 반복할 동안, 세 사람의 관계도는 생각보다 꽤나 변화했더랬다.
원래라면 두 사람이 싸우더라고 가만히 보고 있거나 소심하게 말리던 것이 전부였던 엘리였는데, 지금은 완벽하게 제압을 하고도 남을 정도였달까.
아무리 신경질적인 에밀리더라도, 저기압의 엘리 앞에서 잘못 행동했다가는 여러모로 큰 일을 겪게 될 터였다.
예를 들자면 몸을 제압 당한 다음 케이 앞에서 엉덩이를 두들겨 맞는다던지 그런 것들.
"...미안."
"이야, 그 천재 마법사님께서 사과를 하실 줄은ㅡ"
"케이 씨."
"미안!"
물론 그건 케이 또한 마찬가지라서, 그녀 또한 순식간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아서는? 아서라면 분명 예쁜이 엄마 옆에 쭉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잠시 바깥에 다녀온다고 하셨어요."
"잠시라고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나지 않았나?"
그래, 확실히 시간이 꽤 지나기는 했다.
어쩌면, 용사 혼자 왕도에 도착했을지 모를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