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2 - 해피 엔딩.(2)
"...저주는 해제된거 아니었어?"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구나."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신이 사라진 뒤로 거의 하루 종일 몸을 겹쳤는데,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루 사이에 배가 몰라보도록 커졌다.
뱃속에 있는 아이의 심장 소리가 나에게도 느껴질 정도랄까.
'저주, 안 없어졌구나.'
물론 그 편이 나에게 있어서는 더욱 좋은 소식이기는 했지만, 아서에게는 아닌 것 같았다.
확실히, 내가 아이를 낳을 때마다 죽어가려고 하기는 했지.
그걸 생각하면 이렇게나 빨리 아이를 임신한다는 사실이 아서에게 있어서는 불안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터였다.
"이번에는 누구일 것 같으냐?"
"...아리엘을 닮은 아이?"
"그랬으면 좋겠다만, 푸흐..."
아서의 소망 아닌 소망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나 닮은 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네.
아니면 아서를 닮은 아이나.
물론 여신의 저주가 지워지지 않았다면 당분간, 혹은 아주 오랫 동안 그럴 일 따위는 없겠지만서도.
"자, 돌아가자. 날씨 추우니까 단단히 여미고."
"...그래."
작게 몸을 떠는 내 어깨 위로 아서가 제 망토를 얹어줬다.
무거워.
털이 많아서 그런지 엄청 무겁네.
물론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 뱃속에 있는 아이에 더해서 거대한 털 망토까지 더해지도 조금 죽을 맛이었다.
"읏, 차."
"...고맙구나. 그, 혹시라도 무거우면 꼭 말해다오."
"하나도 안 무거워. 엄청 가벼운데?"
뭐, 그 전에 아서가 나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올리기는 했지만.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공주님 안기를 당하고 있다니.
슬며시 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리자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웃지 말거라."
"귀여운데, 왜."
"귀여워도! 그래도... 응... 웃지 말거라..."
분명 얼굴이 엄청 빨개져 있겠지.
나를 안아들고 있으라 손을 못 쓰는 걸 기회로 삼아, 아서의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어차피 아무런 타격도 없겠지만, 신경이라도 쓰이라고.
"계속 그러면 혼 난다?"
"흥, 어차피 손도 못 쓰지 않느냐."
"손 대신 다른 걸 쓰면 되지."
손 대신 다른 거라니?
쪽ㅡ
"흐얏?!"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멍하니 아서를 올려다보니 멋들어진 미소가 그 잘생긴 얼굴에 그림 같이 걸려 있었다.
반칙이야, 그런 표정.
아니, 그보다 다시 또 뽀뽀하려고 하지마!
"잠, 계속 달라붙으면 때릴 거다!"
"때려도 상관 없으니까, 키스 해도 돼?"
"안 된다! 그런 짓 따위ㅡ 읏ㅡ"
"아리엘, 응?"
안, 되는데...
아서에게 안겨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키스까지 한다면 분명ㅡ
분명 죽어버릴 거야.
수치사 해버릴 거라고.
"아리엘."
"아, 알겠으니까아..."
하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면, 내가 밀어붙이는 것이 약한 타입이라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얼굴을 들이미는 아서에,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백기를 들어버렸다.
항복, 항복!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 얼굴 좀 그만 들이밀어!
"햣..."
아니, 부담스러우니까 그만 좀ㅡ
"츕♥, 츄읍♥ 흐♥ 자, 잠깐...♥"
내 혀를 겁탈하는 아서의 혀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키, 키스를 하려면 조금 더 나를 배려하란 말이야...
잔뜩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자, 다시금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놀리지 말거라."
아서는, 진심으로 S인게 분명해.
언제나 나를 아프게 하고, 울리고, 괴롭히고, 놀리니까.
봐, 지금도 나를 놀리면서 자기만 잔뜩 웃고 있잖아.
...그런데도 미워할 수 없다는게 문제였지만.
"계속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놀리고 싶어지잖아, 아리엘."
"그런 표정이라니, 어떤 표정을 말하는 거지?"
"귀여운 표정."
그러니까 귀여운 표정이 대체 뭐ㅡ
잠, 깐! 그러면서 은근슬쩍 입술 내밀지마!
비죽 튀어나온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아, 꾹꾹 짓눌렀다.
"아주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놀리는구나, 아서."
"너 아니면 이러지도 않아."
"읏..."
역시 야겜 주인공.
어떻게 그런 말을 그 정도로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거야?
머릿속에 이미 기본 설정으로 탑재가 되어 있는 건가?
눈앞에 있는 여자를 꼬시라고?
"자, 너무 흥분하지 말고. 이제 돌아가야지."
"...그래, 돌아가야지."
아서의 고향은 이곳 왕국이었지만, 우리가 돌아갈 곳은 바로 북부ㅡ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수가 있는 곳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마음의 고향이라고 볼 수도 있는 곳.
한참이고 떠돌아 다니다가 결국 돌아갈 장소가 되었으니 조금 이르지만 집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집, 집이라...'
나에게 있어서 집이란 언제나 어둡고, 쿱쿱하고, 곰팡이가 잔뜩 핀 빌어먹을 장소이기만 했는데.
"돌아가자, 집으로."
"...응."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아서가 있었으니까.
"아리엘 씨!"
아, 물론 엘리도 있었고.
"정말 안에서 하고 온 거야? 아니, 그보다 배가 벌써 저렇게 커졌다고?!"
"너도 저렇게 생겼으니까 너무 놀라지는 말지?"
에밀리랑 케이도.
그보다, 살아있었구나.
"다행이구나, 케이."
"당연하지, 내가 쉽게 죽을 사람으로 보여?"
"내 덕분에 목숨 건진 주제에 잘난 척 하지마, 망할 쥐새끼."
가슴을 쭉 펴며 코를 울리는 케이와 그런 케이를 타박하는 에밀리까지.
이 풍경 자체가 하나의 행복으로 다가온다면, 너무 설레발을 치고 있는 걸까.
마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더 이상 누구도 고통 받지 않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 위에 선 우리들.
"아서."
"응, 아리엘."
"너를 용서할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그리고ㅡ
"고마워."
"...별말씀을."
***
"잘도 살아돌아왔구나. 설마 이 정도로 멀쩡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햇는데."
북부에 도착한 우리들을 맞이한 건 역시나랄까, 에반젤린 여왕이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핏자국으로 가득했지만 정작 본인 피는 한 방울도 묻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엄청난 괴물이잖아, 이 사람.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여왕."
"그대야말로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마왕."
여자끼리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서로 눈을 마주하고 빙긋 웃으니 괜히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이렇게나 맞이해주는 사람도 있고 참 복 받았구나, 나라는 인간은.
"피곤할 텐데, 방에서 쉬거라."
"고맙구나, 여왕."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마왕이라는 존재를 이 정도로 믿어주는 건 지인들을 제외하면 에반젤린 여왕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아니, 이미 에반젤린 여왕도 지인이기는 했지만서도.
"여왕이 아니라 에반젤린이라고 부르거라."
"...그렇다면 나도, 아리엘로 불러주거라."
"아리엘."
"에반젤린."
서로 이름을 한 번 씩 부르고는 빙긋 웃었다.
옆에 선 아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통성명 할 때 특유의 쾌감을 모르다니 인생 절반 손해 봤네, 아서.
피식거리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서니,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다. 오늘은 특별이 내 방을 비워뒀으니, 그곳에서 지내도록."
손님 방이 아닌 본인 방을?
에반젤린의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자, 내 손을 꼭 잡은 아서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도 오른쪽으로.
"아서, 잠깐ㅡ 실례이지 않겠느냐?!"
"호의를 거절하는게 더 실례야, 아리엘."
"교, 교접할 생각 잔뜩인 주제에!"
이 머릿속에 섹스만 찬 호색한 같으니라고!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사라져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냥 원래부터 이런 남자였던 걸까.
아서에게 있던 최소한의 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싫지는 않았지만, 에반젤린의 방과 집무실은 생각보다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게 문제였다.
"여, 여기서 하면 에반젤린이 듣지 않겠느냐...?"
침대에 앉은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섹스를 하는 건 솔직히 상관 없었지만, 섹스를 하는 소리를 다른 이에게 들려준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들어도 상관 없겠지. 본인이 직접 내어준 방인데."
"...바보."
"물론, 아리엘이 싫다면 하지 않을게."
"......"
쿵, 하고 아랫배가 울렸다.
뱃속의 아기가 발을 구르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ㅡ
'...자궁이, 아기를 가지고 싶다고 외치고 있어♥'
어쩌면, 선이 사라진 건 아서 뿐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선이 완전히 사라져, 이런 상황에서도ㅡ 심지어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아기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미안해, 아가..."
이런 몹쓸 엄마라서 미안해.
네가 뱃속에 있는데, 다른 아기를 가지고 싶어해서 진심으로 미안해.
속으로 잔뜩 사과했지만, 그 사과 때문인지 배덕감이 장난 아니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리엘, 시작해도 돼?"
"마음대ㅡ 흑?!"
그리고 그 사실을 일러주듯, 배가 찢어지게 아파왔다.
지금 하려는 짓을 당장 멈추고 이쪽에 신경 쓰라는 것 같이.
"아리엘?!"
"아, 아기가... 읏, 흐아..."
앉아 있을 기운도 없어고,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옷을 반쯤 벗어내린 상태라 젖가슴이 훤히 드러났지만, 지금은 그런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아기가 나오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였지.
"소, 손 좀 빌려다오."
"알겠어!"
순식간에 출산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아서의 손을 꼭 잡았다.
이번에는 허리를 붙잡기 위해 벌린 다리가 아니라, 아기를 낳기 위해 벌린 다리였다.
부디 아프지 않게만 나와주렴.
"으, 으하으으으으...!!!"
질내를 벌리며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하는 아기에, 가느다란 비명이 터져나왔다.
역시, 아프지 않을 리가 없구나.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에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그래도 펑펑 울지는 않았으니 많이 발전 한 거야, 아리엘.'
분명 그랬다.
처음에는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엉망으로 울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