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3 - 해피 엔딩.(3)
"으앙."
태어난 아기가 처음 한 말이었다.
아니, 말이 아니라 운 건가?
그렇다고 울었다고 하기에는 하나도 운 것 같지가 않은데.
대뜸 '으앙'이라니, 누가 봐도 운게 아니잖아.
눈동자도 엄청나게 초롱초롱하고.
"...억지로 우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단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초록색에, 귀도 뾰족하고.
...
응, 그렇네.
"레이나."
"으앙."
"...레이나."
아기의 품에 코를 파묻었다.
언젠가 맡았던 숲 향기와 더불어, 아기 분내가 내 마음을 가득 물들였다.
드디어구나.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
더 늦게 죽은 에밀리보다 늦게 태어나다니, 분명 나를 놀리려고 그런게 틀림 없었다.
"으아아앙, 으앙."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조금 자란 다음에 말해다오. 어차피 하루나 이틀 정도면 적당히 자랄 테니까."
손을 뻗지도 못하는 몸으로 말은 잘도 해댔다.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는 아기라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서도.
"...뭔가 너에게서 레이나 씨가 태어났다고 하니 느낌이 묘한걸."
"언제는 안 묘한 적이 있었더냐? 에밀리도 케이도 내 뱃속에서 태어났는데."
"그래도 레이나 씨는 나이가ㅡ"
"으아아앙!!!!!"
진짜 울었다.
방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하는 아기에 아서의 머리를 탁탁 내려쳤다.
바보, 바보야!
그렇다고 그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직접 꺼내면 어쩌자는 건데?!
아무리 레이나라고 해도 지금은 아기란 말이야, 아기!
"품어주지는 못할 망정 놀리기나 하고, 몹쓸 남자 같으니!"
당분간은 내 몸에 손 대는거 금지야!
...라고 말하기에는 그건 나에게도 힘든 조건이었기에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아기가 금방 울음을 그친 걸 다행으로 여겨.
만약 아직까지 울고 있었다면 오늘은 진짜 각방을 썼을지도 몰랐으니까.
"아가, 그래. 배고프지?"
바보 아서 따위는 놓아두고, 아기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훤히 들어난 젖가슴을 아기의 앞에 가져다 대니 오물거리면서 젖꼭지를 찾더니 이내 앙, 하고 깨물었다.
"...으하."
역시 아파.
젖을 먹는 힘이라더니, 역시 엄청났다.
내 가슴 속의 우유가 쭉쭉 빨려나가는 것 같달까.
역시 젖꼭지는 아기 전용 빨대가 맞을지도 모르겠네.
"......왜 그렇게 빤히 보느냐?"
"아니, 너무 예뻐서."
"레이나가 예쁘기는 하지."
"아기 말고 너, 아리엘."
진짜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런데, 어딘가에 대본이라던지 적어두고 있는거 아니지?
입을 벌릴 때마다 설탕을 쏟아내는 아서를 마구 쏘아봤다.
품에 아기가 안겨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
만약 이 애가 아니었으면 하루 종일 네 위에 올라탔을 테니까.
'...물론 아서가 먼저 지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부족하다면 부족하다는 표정을 지을 망정 아서가 지친 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공평해.
원래 이런 건 비슷하게 지쳐서 함께 잠드는 편이 기본적인 거잖아?!
...정력을 줄이던지, 미리 빼놓고 오던지 하란 말이야.
'아니, 아기즙을 굳이 미리 빼고 올 필요는 없을지도...'
아깝잖아.
전부 다 아기를 만들 수 있는 자원인데, 아무런 의미도 없이 쾌락만을 위해 싸지르고 온다는 것이.
"아리엘, 그나저나 이제 비지 않았어?"
"응? 비다니? 뭐가 비었다는 거지?"
"...아니, 아니야."
품은 아기에게 내어주느라 비지를 않았으니, 남은 건ㅡ
...설마.
설마, 아니겠지?
"변태."
아기를 바짝 끌어당김과 동시에 침대 끄트머리로 도망쳤다.
비었다는게, 내 자궁을 이야기 하는 거였다니.
"바보."
"아리엘."
"저질."
"그러니까ㅡ"
"쓰레기."
잔뜩 당황한 아서에게 혀를 비죽 내밀고는 벌떡 일어났다.
방금 아기를 낳은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버틸만은 했다.
계속 이 방에 있다가는 몸조리를 하기는 커녕 그 다음 아기를 임신하게 될 것만 같았다.
"잡으면 울 거야."
내 팔을 향해 뻗어진 손에,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아서는 내가 우는 걸 제일 무서워 하니까 말이지.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아서를 두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벌써 가는 건가? 뜨거운 밤은 보내지 않고?"
"오늘 밤은 이 아이랑 보내기로 했다."
집무실을 지나치는 순간, 문이 열리고 에반젤린이 튀어나왔다.
은근한 표정으로 나를 보기에 품 안의 아기를 보여주니, 미려하게 휘어진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런 표정을 짓기도 하는구나.
이렇게 보니까 은근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벌써 아기를 낳을 줄이야. 뭔가 선물이라도 준비할까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구나."
선물 같은 건 괜찮았지만, 말만이라도 고마웠다.
원래 선물은 말보다는 마음이라고 했으니까.
그저 말 한 마디라도 나와 아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잔뜩 들어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나 다름 없었다.
"자리를 옮기려면 고양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보도록 해라. 분명 좋아할 테니까."
"...충고 고맙구나."
에반젤린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근 들어서 자기들의 냄새를 내 몸에 묻히겠다고 어찌나 성화던지.
털 갈이가 끝나서 완전 폭신폭신해진 꼬리 때문에 한 번 빠지면 쉽게 벗어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랴뇨리나 벨이 아니었다면 평생 붙잡혀 있었겠지, 아마.
"아리엘 냄새다!"
"아리엘!"
역시.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고양이들이 엉겨붙었다.
"죄송해요, 아리엘 씨..."
"괜찮다.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니까."
대화에 자주 끼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대화 나누는 걸 좋아하는 느낌의 사람이었으니까 말이지.
아이들이 엉겨붙는 건 또 다른 문제이기는 했지만, 그런 것도 별로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렇게나 내가 보고 싶었느냐"
"응, 응! 완전!"
"뱃속에 있는 아기 만나보고 싶었어!"
지금은 태어났지만.
그래도 앞으로 내 배가 부를 일은 한참이나 남았으니 아이들이 실망할 일은 없을 터였다.
"자, 보렴. 내 뱃속에 있던 아기야."
슬쩍 몸을 숙이며 품에 안겨 있던 아기를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조금 전까지 깨어있었는데 지금은 곤히 자고 있구나.
아기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낸다더니, 그건 다시 태어난 존재라고 해도 딱히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우와, 귀여워!"
"요정님 같아!"
"응응, 숲의 요정님 같아!"
아이들의 말에 벨의 표정이 묘해졌다.
"숲의 요정이라는 건 수인들의 말로 엘프를 뜻하거든요."
확실히, 엘프기는 하지.
너무 작아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기의 귀는 누가 봐도 사람의 귀가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뾰족했다.
엘프 그 자체랄까, 요정처럼 귀엽다는 것도 맞았지만.
"으응, 새싹 향기가 나..."
"나 이 아기 좋아! 지금까지 봤던 아기들 중에서 가장 좋아!"
엘프는 자연의 사랑을 받는다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수인들이 아기를 좋아하게 되는 건 필연일지도 몰랐다.
벨의 표정도 조금이지만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고.
"냥, 엘프의 아기를 보는 건 꼬리 나고 처음이다냥."
"확실히, 엘프의 아기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으니까요..."
그 정도로 희귀하구나.
하긴, 장수종의 아기를 보는 건 분명 힘들겠지.
하물며 그게 평범한 생명체보다 몇 배, 혹은 몇 십 배 더 오래 사는 존재라면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운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냐~"
"엘프 아기를 봤다는 이야기는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을 정도의 자랑거리니까요."
슬며시 움직인 꼬리가 아이의 정수리를 슥슥 쓸어내렸다.
랴뇨리나 벨에게도 인기 만점이구나.
평소에는 꼬리가 쥐어지는 즉시 도망쳤는데, 정작 아기가 잡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조용했다.
역시 아기의 힘은 대단해.
낳은 보람이 엄청났다.
"그래도, 이제 금방 자랄 거니까..."
"아기 때의 모습은 얼마 못 보겠다냐..."
"그건 조금 아쉽네요..."
무언가 사진이라도 남겨놓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기들이 나중에 컸을 때를 대비해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예를 들자면 카메라라던지 그런 것들.
'뭐, 이 세계에 그런게 있을 리가 없지만 말이지.'
염사 마법 같은게 있다면 가능할지도 몰랐지만, 유일한 마법사는 영원히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버렸기에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나.
"그래도, 다음 기회라는게 있겠지냐~"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꼬리를 빼낸 랴뇨리가 고양이 자세로 기지개를 쭉 켰다.
허리가 마치 엿가락처럼 주욱 늘어나는 것을 보니 조금이지만 상당히 놀라버렸달까.
역시 고양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유연하구나...
"응? 어쩐지 사람이 많다 했는데 너도 와있었구나. 심지어 아기까지 데리고."
"미코."
"엘프의 아기로구나? 엘프의 아기는 나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데 말이지!"
엄청 오래 산 여우 수인마저도 보지 못한 엘프의 아기라니.
이 정도면 내 품에 안긴 아기의 가치가 나보다 높을지도 몰랐다.
마왕은 그래도 몇 번 봤으니까 말이지.
"으응, 역시 좋아. 엘프들의 몸에서 나는 숲의 향기가 어릴 때는 마치 숲이 아닌 싱싱한 들판과 같구나."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미코가 코를 킁킁 울렸다.
향기 좋지?
아기의 장점에 대해서라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지만, 그런 요소들 중 가장 좋은 점을 뽑으라고 한다면 아기 특유의 체향이 아닐까 싶었다.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향기.
나에게 있어서는 마치 보물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